“이곳은 여전히 암흑이야. 제정신으로 살 수 없는 세계지.”
침묵 속에 터지는 충동, 서서히 침윤하는 욕망,
왜곡된 정념으로 물들어가는 젊은 세대의 슬픈 초상
2007년 데뷔 후 독특한 감각의 경신과 꾸준한 자기 세계의 확장으로 주목을 받아온 작가 윤보인의 첫 소설집 『뱀』(문학과지성사, 2011)이 출간되었다. 이번 소설집에서는 길들여지지 않는 인간 본연의 충동을 집요하게 추적하며, 소리 없이 젖어드는 욕망이 왜곡된 형태로 발현되어가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처음 윤보인의 작품을 접한 독자는 그녀의 낯선 감각과 그로테스크한 표현에 당혹스러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외부 세계로부터 가해지는 위협과 폭력 속에서의 생에 대해, 특히 어린 여성의 삶에 집중한 윤보인은 본인 특유의 감성으로 일면 익숙한 이야기를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끌어내고 있다. 문학평론가 우찬제는 이러한 그녀의 폭로에 대해 “경계에서 세상의 온갖 거짓과 위선을 추문화한다”고 표현한 바 있다.
이 소설집의 표제작 「뱀」에서는 사회적으로 상징화된 사랑에 수렴되지 않는 개인의 충동과 욕망에 대해 말한다. 이 소설에서 뱀은 노점의 노인에게 우연히 사게 된 애완동물로, 일종의 사회에 포획되지 않은 날것의 인간 충동을 상징한다. 헌책방을 운영하는 주인공 여자는 어느 날 팔려온 책 속에 끼인 반지를 발견하게 되고 얼마 후 그 반지를 찾기 위해 한 남자가 그녀를 방문한다. 그녀는 그에게 미묘한 감정을 느끼게 되고 반지를 내어주지 않는다. 그가 돌아간 뒤 그녀의 뱀이 반지를 삼킨다는 점에 반지라는 사회적으로 코드화된 사랑에 대한 부정과 거부를 눈치챌 수 있다. 허물만을 남겨둔 채 사라졌던 뱀은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그녀의 질 속에서 발견된다. 윤보인은 표제작이자 등단작인 이 소설을 통해 자신의 충동과 한 몸이 된 인간의 초상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악취」에서는 한 발 더 나아가 후각을 통해 감각의 전면성에 도전한다. 망집에 가까울 정도로 악취 환각에 집착하는 여성이 있다. 향수를 지독히 혐오하고 썩은 악취에 매료된다. 독특한 악취로 그녀를 매료시켰던 남성 피터가 떠나간 다음 악취 환각은 심화되고 악취에의 욕망은 증폭된다. 그럴수록 주인공의 일탈 행동도 더욱 그로테스크해진다. 다채로운 향기가 추앙받는 이 세계에서 악취는 진실의 위악적 상징과 같은 것이다. 하여 진실의 심연으로 내려가고자 하는 깊은 욕망이 독특한 악취 환각을 자아낸 것이다.
「줄」과 「일요일」, 그리고 「꼽추의 장례식」은 모두 왜곡된 가부장적 권위에 시달리는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이는 기성 사회에 대한 강렬한 부정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집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려 언제든 소녀들을 죽음으로 이끌 수 있는 줄. 그러나 공포는 매달린 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 자체다. 집주인에게 지속적으로 겁탈당하는 부모 없는 소녀들에게 세상은 이미 제정신으로 살 수 없는 공간이며 삶 자체가 공포인 것이다. 이는 왜곡된 아버지, 꼽추로 구현된 아버지로부터의 일상적 폭력과도 같은 맥락에서 읽힐 수 있다.
중편소설 「바실리 사원」과 「살풀이춤」은 이러한 생의 고난 속에서 피어나는 예술에 대한 이야기다. 어린 시절 매향리의 포탄 소리에 시달려오다 적막을 찾아 러시아 마임이스트가 된 이정경. 그녀를 취재해가는 과정을 담은 「바실리 사원」은 그러한 상처로부터 하나의 예술이 숙성하기까지 걸리는 오랜 시간에 대해 집중 조명한다. 그리하여 「살풀이춤」에서는 도달하고자 하는 예술의 경지가 결국 자신의 삶, 나아가 가족의 삶을 온전히 다 바쳐서야만 탄생하는 것이었음을 말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뛰어넘는 일종의 절대적인 무언가로 그려지고 있는 살풀이춤의 경지가 바로 이것이다. 예술가에게 이 극한의 의지는 벗어날 수 없는 욕망이자 숙명인 것이다.
이 소설집의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이경재가 말하듯 “윤보인의 작품은 정념으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그 솔직한 정념의 공간을 조성한 후에 작가는 “현실적인 것에서 현실을 빼내고, 인간적인 것에서 인간의 빼낸 그 텅 빈 공간 속에 진짜 현실과 진짜 인간을 자리 잡”도록 한다. 고난과 공포로 가득한 세상, 이는 비단 윤보인만의 세계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당신’, 알지 못하는 새에 어딘가 자리 잡은 당신의 ‘뱀’을 이번 소설집을 통해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본문 소개
고개를 숙이자, 거기에 뱀 한 마리가 나른한 듯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뱀은 한없이 부드러워 보이는 혓바닥을 길게 내밀고 있다. 여기에 숨어 있었다니. 여자는 뱀을 빼내기 위해 안간힘을 써본다. 조금만 더 손가락이 닿는다면 꼬리가 잡힐 것이다. 아니, 토실하게 살이 오른 뱃가죽이 먼저 잡힐 것이다. 무엇이 먼저 잡히든지 어서, 저 어두운 곳에서 빼내고 싶다고, 더는 축축한 곳에서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여자는 불안한 듯 얼굴을 찡그린다. 그러나 뱀은 아랑곳하지 않고 손이 닿을 수 없는 깊숙한 곳으로 멀리 달아나버린다._「뱀」
썩은 사과를 입에 물고 있었지. 하마터면 그걸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어. 피터가 게시판에 흔적을 남기고 간 거야. 거기엔 그의 그림이 올라와 있었지. 박쥐를 그린 그림이었어. 날개를 펼치고 있었어. 섬세하고 강렬했지. 박쥐들은 저수지 위를 날아가고 있었어. 섬뜩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어.
피터는 아무런 글도 남기지 않고 오직 그림들만 올려놓았어. 오랫동안 목말랐던 나는 몇 시간이고 그의 그림에 의존해야만 했어. 그러는 동안, 직감할 수 있었지. 그가 박쥐를 찾기 위해 떠났다고 말이야._「악취」
일상이라는 것. 사랑이라는 것. 고통이라는 것. 시간이라는 것. 슬픔이라는 것. 절망이라는 것. 어느 날 절망이 절망을 먹고 있다. 절망이 사라진다. 슬픔이 슬픔을 먹고 있다. 슬픔이 사라진다. 시간이 시간을 먹고 있다. 시간이 사라진다. 고통이 고통을 먹고 있다. 고통이 사라진다. 사랑이 사랑을 먹고 있다. 사랑이 사라진다. 일상이 일상을 먹고 있다. 일상이 사라진다. 소용돌이친다. 역겨워서 삼킨다. 역겨워서 토해낸다._「일요일」
“가끔 소음을 피하기 위해 오빠하고 무작정 버스를 타고 다른 지역으로 가보기도 했어요. 그러나 늦은 밤이 되면 다시 집으로 돌아와야 했죠. 그러다가 알렉세이 선생님이 한국에 오셨을 때, 그분을 뵈러 극장으로 찾아갔어요.”
그녀는 끝내 자신의 감정에 휩쓸리지 않았다. 오히려 소름 끼치게 냉정했다. 그때 조명이 켜졌다. 동시에 무대 위로 많은 배우들이 걸어 나왔다. 그들은 저마다 맡은 배역 속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들은 허공을 쳐다보며 서로 다른 동작을 표현해냈다. 순간 나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그렇다면 그 소음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마임이라는 장르를 택한 것일까._「바실리 사원」
잠시 후 무대 오른쪽에서 누군가의 실루엣이 보였다. 흰색 무복을 입은 남자가 고요한 자태로 서 있다가 가볍게 발돋움했다. 명주 수건이 흔들렸다.
저 명주 수건. 누군가의 목을 감싸던 흰색 명주 수건.
죽음으로 이끌던 저 수건.
숨을 죽였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으나 나는 그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저것이 살풀이춤인가. 죽은 자와 산 자를 이어주는 춤인가.
어디선가 징 소리와 함께 구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_「살풀이춤」
■ 해설
이러한 특징은 윤보인의 소설을 이해하는데 적지 않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그는 언어를 사용하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선명한 의미의 축조가 아니다. 그는 의미를 초월한 의미, ‘언어가 지워진 자리에서 생기는 언어’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윤보인의 작품은 적지 않게 현실의 중요한 지점들을 건드린다. 심지어 그녀의 소설에서는 매향리의 폭격까지도 서사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형상화되는 방식은 전통적인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흡사 마임이나 살풀이춤의 동작을 닮아 있다. 정념이나 이미지의 지나치게 격렬한 때로는 지나치게 완만한 배치를 통하여 정치적인 동시에 미학적인 효과를 겨냥한다. 현실적인 것에서 현실을 빼내고, 인간적인 것에서 인간을 빼낸 그 텅 빈 공간 속에 진짜 현실과 진짜 인간은 새롭게 자리를 잡는다. 이러한 새로운 미학적 진전이 뚜렷한 작가적 자의식에 바탕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윤보인은 무척이나 믿음직한 아방가르드이다. _이경재(문학평론가)
뱀
악취
줄
일요일
꼽추의 장례식
바실리 사원
살풀이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