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박한 삶 속에 감춰진 결곡한 신비를 노래하듯,
허기진 기억으로 그린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
■ 책 소개
“한국 서정시의 전통을 가장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있는 시인”으로, “이지와 감성의 결합, 언어와 율조의 긴장, 감각과 서정의 균형 등을 통한 시적 성취를 높이 평가”(2009년 제24회 소월시문학상 대상 심사평)받고 있는 박형준의 다섯번째 시집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199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家具의 힘」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시인은, 1994년 첫 시집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 하련다』를 펴낸 이후 3~5년 마다 꾸준히 시집을 펴내어 올해로 등단 20년을 맞이했다. 이런 뜻 깊은 해에 출간된 새 시집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는, 2005년에 출간한 전작 『춤』이후 6년 만의 새 시집이라는 점에서 더욱 반갑지 않을 수 없다.
긴 시간 때문이었을까. 2009년 제24회 소월시문학상 대상 수상작인 「가슴의 환한 고동 외에는」 외 14편의 작품을 비롯, 2009 ‘올해의 좋은 시’를 수상한 「무덤 사이에서」와 2010년 제10회 미당문학상 본심 진출작 「빗소리」 등을 포함하여 시인이 엄선한 작품들을 추려 모았음에도 그 편수가 100편을 꼬박 채우고 있다.
‘제1부 아버지의 죽음에 바치는 노래’는 그 제목에서부터 느낄 수 있듯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로부터 일상으로 이어지는 시간 속에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시편들이 묶였다. 각각의 작품에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박형준 특유의 모든 공간과 사물의 이미지로 표현되고, 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시인은 생과 사의 공존을 그려 보인다.
논과 밭 사이에 있는 우리나라 무덤들은 매혹적이다.
죽음을 격리시키지 않고 삶을 껴안고 있기에,
둥글고 따스하게 노동에 지친 사람들의 영혼을 떠안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나라 봉분들은 밥그릇을 닮았다.
조상들은 죽어서 산 사람들을 먹여 살릴 밥을 한 상 차려놓은 것인가.
내가 찾아 헤매고 다니는 꽃과 같이 무덤이 있는 들녘,
산 자와 죽은 자가 연결되어 있는
밥공기와 같은 삶의 정신,
푸르고 푸른 무덤이 저 들판에 나 있다.
-「무덤 사이에서」 부분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날까지 동구의 작은 밭을 싸리비로 마당을 쓸듯이 손으로 일구다가 가셨다. 그러니 아버지는 이 세상의 채소를 다 먹고 하늘나라 채소를 맛보러 떠나셨을 것이다. 아버지의 하늘나라 길에는 채소밭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밭을 사랑하여 밭 언덕에 모셔진 아버지,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잇는 그 싸리비질 소리.
-「나는 채소 먹으러 하늘나라 가지」 부분
“손대지 않은 광채가/남아 있습니다/꽃 속에 부리를 파묻고 있는 새처럼/아직 이 세상에 오지 않은/말 속에 손을 집어넣어봅니다”라는 진술이 담긴 「서시(序詩)」로 문을 여는 ‘제2부 책상에 강물을 올려놓고’와 이어지는 ‘제3부 남은 빛’에서는 풍경과 사물이 언어와 만나 어떻게 박형준 식으로 빛을 발하게 되는지를 느낄 수 있다.
사물은 어느새
광대뼈가 툭 튀어나온 어머니
반짝거리는 외투
나를 감싸고 있는 애인
오래 신어 윤기 나는 신발
느지막이 혼자서 먹는 밥상이 됩니다 -「서시(序詩)」 부분
“언어상징을 사용하는, 우리 시단에 흔치 않은 경우”(평론가 유성호)라는 평가가 무색하지 않게, 박형준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서도 그 안에서 빛나는 이미지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어려서부터 ‘이야기에서 빛을 발하는 이미지’에 호기심을 느꼈다고 고백한 시인은, 자신의 시가 “의도를 가지고 관찰한 결과가 아니라 주변 풍경이 내게 들려주는 것을 하인처럼 충실하게 받아 적은 기록”이라고 말한 바 있다. 풍경이나 사물을 지그시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 속으로 불현듯 이미지가 건너오는 순간, 그것이 한 편의 시가 되는 것이다.
그의 시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기억’이다. “기억으로 기억을 구원하고자 하는 시인”(시인 김행숙)으로 호명된 바 있는 박형준 시인은 시 안에서 과거의 기억을 울림이 큰 한 폭의 그림으로 완성한다.
그날은 서해 바다가 저 멀리 떠오르는 맑은 날이었지요
내려오는 길에는 당신과 남산의 진달래 길을 걸었지요
당신은 저에게 주려고 진달래를 따서 옷자락에 가득 채웠지요
그런 뒤로 저는 당신의 옷에서 향기가 날 때마다
당신이 저를 위해 꽃을 딴 것은 아닌지
당신의 냄새를 맡아보곤 했지요
-「진달래 길」 부분
시인은 “아주 오래전 유년의 어느 한순간, 그 과거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고 한 적이 있다. 과거에 얽매여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시인은 현재의 자리에서 과거를 생각한다. 이때 필요한 것은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과거의 그 순간이 가진 의미와 비밀을 드러내주고, 그것이 생의 진실과 아름다움에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 확인하게 해주는 열쇠가 된다. 그리하여 불현듯, 일상의 사물에서 과거 한 순간의 의미가 붕, 떠오르고 그 기억이 온전한 추억이 되면, 거기에 박형준의 시가 남는다.
소멸되어가는, 텅 비어버린, 허기 같은 공허함이 시인의 이미지와 만나 맑은 빛을 입는 결곡한 신비를 독자들은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노인은 먹은 것이 없다고 혼잣말을 하다
고개만 돌린 채 창문을 바라본다.
개밥바라기, 오래전에 빠져버린 어금니처럼 반짝인다.
노인은 시골집에 혼자 버려두고 온 개를 생각한다.
툇마루 밑의 흙을 파내다
배고픔 뉘일 구덩이에 몸을 웅크린 채
앞다리를 모으고 있을 개. 저녁밥 때가 되어도 집은 조용하다
매일 누워 운신을 못하는 노인의 침대는
가운데가 푹 꺼져 있다.
초저녁 창문에 먼 데 낑낑대는 소리,
노인은 툇마루 속 구덩이에서 귀를 쫑긋대며
자신의 발자국 소리를 기다리는
배고픈 개의 밥바라기 별을 올려다본다.
까실한 개의 혓바닥이 금이 간 허리에 느껴진다.
깨진 토기 같은 피부
초저녁 맑은 허기가 핥고 지나간다. -「개밥바라기」 전문
■ 작품 속으로
내가 들판의 꽃을 찾으러 나갔을 때는
첫서리가 내렸고, 아직 인간의 언어를 몰랐을 때였다.
추수 끝난 들녘의 목울음이
하늘에서 먼 기러기의 항해로 이어지고 있었고
서리에 얼어붙은 이삭들 그늘 밑에서
별 가득한 하늘 풍경보다 더 반짝이는 경이가
상처에 찔리며 부드러운 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거기서 내가 날려 보낸 생의 화살들을 줍곤 했었다.
내가 인간의 언어를 몰랐을 때
영혼의 풍경들은 심연조차도 푸르게 살아서
우물의 지하수에 떠 있는 별빛 같았다.
청춘의 불빛들로 이루어진 은하수를 건지러
자주 우물 밑바닥으로 내려가곤 하였다.
겨울이 되면, 얼어붙은 우물의 얼음 속으로 내려갈수록 피는 뜨거워졌다.
땅속 깊은 어둠 속에서 뿌릭들이
잠에서 깨어나듯이, 얼음 속의 피는
신성함의 꽃다발을 엮을 정신의 꽃씨들로 실핏줄과 같이 흘렀다.
지금 나는 그 징표를 찾기 위해
벌거벗은 들판을 걷고 있다.
논과 밭 사이에 있는 우리나라 무덤들은 매혹적이다.
죽음을 격리시키지 않고 삶을 껴안고 있기에,
둥글고 따스하게 노동에 지친 사람들의 영혼을 떠안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나라 봉분들은 밥그릇을 닮았다.
조상들은 죽어서 산 사람들을 먹여 살릴 밥을 한 상 차려놓은 것인가.
내가 찾아 헤매고 다니는 꽃과 같이 무덤이 있는 들녘,
산 자와 죽은 자가 연결되어 있는
밥공기와 같은 삶의 정신,
푸르고 푸른 무덤이 저 들판에 나 있다.
-「무덤 사이에서」 전문
가슴의 환한 고동 외에는 들려줄 게 없는
봄 저녁
나는 바람 냄새 나는 머리칼
거리를 질주하는 짐승
짐승 속에 살아 있는 영혼
그늘 속에서 피우는
회양목의 작은 노란 꽃망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눈꺼풀에 올려논 지구가 물방울 속에서
내 발밑으로 꺼져가는데
하루만 지나도 눈물 냄새는 얼마나 지독한지
우리는 무사했고 꿈속에서도 무사한 거리
질주하는
내 발밑으로 초록의 은밀한 추억들이
자꾸 꺼져가는데
-「가슴의 환한 고동 외에는」 전문
그 젊은이는 맨방바닥에서 잠을 잤다
창문으로 사과나무의 꼭대기만 보였다
가을에 간신히 작은 열매가 맺혔다
그 젊은이에게 그렇게 사랑이 찾아왔다
그녀가 지나가는 말로 허리가 아프다고 했다
그는 그때까지 맨방바닥에서 사랑을 나눴다
지하 방의 창문으로 때 이른 낙과가 지나갔다
하지만 그 젊은이는 여자를 기다렸다
그녀의 옷에 묻은 찬 냄새를 기억하며
그 젊은이는 가을밤에 맨방바닥에서 잤다
서리가 입속에서 부서지는 날들이 지나갔다
창틀에 낙과가 쌓인 어느 날
물론 그 여자가 왔다 그 젊은이는 그때까지
사두고 한 번도 깔지 않은 요를 깔았다
지하 방을 가득 채우는 요의 끝을 만지며
그 젊은이는 천진하게 여자에게 웃었다
맨방바닥에 꽃무늬 요가 퍼졌다 생생한 요의 그림자가
여자는 그 젊은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과나무의 꼭대기,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전문
■ 시집 소개
박형준의 시들은 기억의 감광막에 묻어 나온 사물들의 내밀한 도상을 펼쳐 보이며 현재의 팍팍한 시간들을 달랜다. 다사다난한 감정의 일렁임조차 일상 사물들의 범상한 형상에 투과해 부드러운 물질로 정화시키는 마력을 그의 시는 지니고 있다. 이 부박하고 처량 맞기도 한 삶이 본질적으로 감추고 있는 결곡한 신비에 대해 그는 줄곧 노래해왔다. 그의 시를 읽다 보면, 흐릿해진 시간이 곱게 펴지는 걸 느낄 수 있다. 그렇게 펼쳐진 시간은 문자가 환기하는 마음속 영상 그대로 온유하고 단아하다.
■ 시인이 쓰는 산문(뒤표지 글)
난 사랑을 잊지 않기 위해 당신과 만나지 않고, 당신과 숱하게 만나면서 당신과 나 사이에 잊혀진 사랑을 기억하기 위해 작별을 선택한 사람이다. 내게 시는 그런 것이다.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잊혀진 것을 기억하기 위해 쓴다. 내게 시는 망각이며, 정확하게는 기억을 향해 날을 세우고 있는 부재의 이미지이다. 난 길을 걷다가 눈을 감고 손을 내밀면 공기의 서랍장이 쓱 열릴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그 속에 무엇이 있을까 묻지는 말자.
보이는 세계 저편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숨겨져 있고 그 왕국에 스핑크스가 살고 있다. 스핑크스는 천 년보다 더 많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내가 방바닥에 펼쳐 놓고 있는 사진집에서 그는 지금 모래바람을 맞고 서 있을 뿐이다. 그는 다만 자신의 역사에서 추방된 징표인 기념물로서 ‘있을’ 뿐이다.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건축물이 아니라 방바닥에 한 장의 사진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는 한순간의 이 ‘있음’의 세계에 펼쳐져, 자신의 발치에 놓인 그림자에 비친 우물 같은 이미지로 자신의 돌이킬 수 없는 역사를 회상한다.
시인의 말
제1부 아버지의 죽음에 바치는 노래
황혼
시집
석산꽃
단풍
새
박쥐
백 년 항아리
마차
가을 이불
홍시
사경(四更)
별식(別食)
천장(天葬)
서커스
가을밤 귀뚜라미 울음
우물
아침 달 뜨면
꼬리조팝나무
무덤 사이에서
나는 채소 먹으로 하늘나라 가지
제2부 책상에 강물을 올려놓고
서시(序詩)
휘파람
저녁의 눈
빙산
시체의 악기
사랑은 꽃병을 만드는 일이라네
눈의 정글
뼈 위의 도서관
달에 기어간 흔적이 있다
개밥바라기
미역 건지는 노파
밤 시장
어린 시절
가슴의 환한 고동 외에는
책상
독음(獨吟)
여름밤
몽고반점
다림질하는 여자
절도광
계단의 끝-여림을 추억함
시 창작 교실
손
공포를 낚다
당신의 팔
먹구렁이
거미 혈액
코끼리 사냥철
황제펭귄
수문통 2
여우비
기관차 묘지-수문통 3
수문통 4
초파일
벽지
돼지의 속눈썹
창문을 떠나며
마리나 츠베타예바를 읽는 저녁
밤의 스핑크스
제3부 남은 빛
빗소리
해가 들지 않는 곳에서 빛이 내릴 때
강물이 언어로 속삭인다
근원 가까이에서 울고 있는 새들
가는 비
봄 우레
투명한 울음
부뚜막
초승달
날개옷
시신에 밴 향내
피리
초록 여관
불꽃
저녁 빛
눈 내리는 새벽
시간 두루미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여름의 슬픔
공터
저녁 밤
입술
눈썹
봄 저녁의 어두운 질주에 관하여
고향에 빠지다
이슬의 힘
술꾼
진달래 길
봄비
웃음
커튼처럼 사람을
들판의 나무 한 그루
타인들의 광선 속에서
겨울 아침
봄의 숨결
사막의 아침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남은 빛-파울 첼란의 「꽃」에 부쳐
발걸음
대지에 기도를 올리시는가-최하림 선생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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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숨은 빛-단편영화 「푸르른 운석」(가제) 촬영기․강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