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1 문학과지성사 낭독의 밤(2011/04/13, @살롱 드 팩토리)
시간을 분절하는 감각, 모종의 불안을 자극하는 배음背音
일상의 내부에서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파국의 잔영
한국일보문학상, 이효석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수상 작가
편혜영 세번째 소설집 『저녁의 구애』
섬뜩하고 그로테스크한 ‘아오이가든’의 세계에서 일상의 내부에 자리한 불안과 소음, 파국의 전조를 특유의 하드보일드 문체로 집요하게 응시하고 있는 작가 편혜영의 신작 소설집 『저녁의 구애』(2011)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지난해 벽두에 첫 장편 『재와 빨강』(2010)을 발표한 직후 곧바로 계간 『문학과사회』에 자신의 두번째 장편 「서쪽 숲에 갔다」(2010년 봄호~겨울호, 총 4회, 2012년 초 출간 예정)를 연재했던 편혜영은, 소설 창작과 직장 생활을 동시에 병행했던 10여 년의 시간을 정리하고 오롯이 전업작가로 돌아와 이번 책을 준비했다.
편혜영의 신작 소설집 『저녁의 구애』는 도시 문명 속에 길들여진 현대인의 감춰진 불안과 고독, 황폐한 내면을 꿰뚫으면서, 편리하고 안온한 일상이 끝 모를 공포로 탈바꿈해가는 순간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시종일관 감정의 절제를 잃지 않는 정교하고 탄탄한 문체로 지금껏 너무도 익숙해서 의심의 여지를 두지 않았던 도시 일상을 속속들이 묘파해가는 편혜영의 소설은, 견고한 기계문명과 첨단 설비 시스템으로 말미암아 예외성과 일탈을 거부당하고 – 마치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의 한 장면처럼 – 위생과 편의, 지극한 도락으로 포장된 도시 문명이 정작 인간을 ‘非정서화, 非문명화, 新야만’의 세계로 몰고 가는 주범임을 고발한다.
완벽하게 균질화된 ‘동일성의 지옥’
현대 사회도시 문명의 소음이 익숙한 당신에게 띄우는 초대장
‘똑똑! 웰컴 투 하드보일드 헬!’
200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이슬털기」가 당선되어 등단한 이래, 꾸준한 집필과 발표, 주요 문학상 수상으로 이어지는 분주하고도 화려한 작품 활동을 해온 작가 편혜영이 세번째 단편집 『저녁의 구애』(문학과지성사, 2011)를 발표했다.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하드고어적 이미지와 상상의 분출로 출간 직후 시대를 절묘하게 반영한 문제작으로 뜨겁게 주목받은 첫 단편집 『아오이가든』(문학과지성사, 2005), 저수지와 습지에서 들려오는 기이한 소음과 그로 인해 분열과 파괴로 치달아가는 두번째 작품집 『사육장 속으로』(문학동네, 2007), 그리고 어두운 인간 세계, 절대고독의 내면을 치밀하게 파고들었던 첫 장편 『재와 빨강』(창비, 2010)에 이은 작가의 네번째 책이다.
이번 『저녁의 구애』는 두번째 작품집 출간 이후 지난 2008~2009년간 꾸준히 발표해온 총 8편의 단편을 수록하고 있다. 이효석문학상(2009년), 이상문학상 우수작, 황순원문학상 최종후보작, 문학동네 젊은작가상(이상 2010년) 등 각종 문학상을 수상했을 뿐 아니라 발표하는 소설마다 평단의 비상한 주목을 받으며 해당 연도 우수작으로 빠짐없이 거명된 작품들로 풍성하다. 언뜻 평온해 뵈는 일상이 감춘 불안과 고독, 현대인의 내면을 깊게 응시하는 중층적 겹의 시선, 치밀한 문제의식, 이제는 거의 “기예”에 가깝다는 평을 듣고 있는 탄탄한 하드보일드의 완숙한 문체와 독특한 상상력으로 극찬을 받았던 단편 8편을 모은 작품집이다. 마치 여러 권의 문학상 수상집을 한 권에 읽는 재미마저 쏠쏠하다.
어둠이 어른의 숨처럼 천천히 내려앉는 시간. 어둠에 묻힌 도시, 한밤중이 되어서야 뜬금없이 달리며 등장하는 마라토너,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통조림(「저녁의 구애」). 기시감이 드는 낯익은 길 속에 칼날 같은 섬뜩한 정적과 암전이 잇달아 찾아드는 산책로(「산책 」 ), 지루할 정도로 세밀하게 일상을 규격화해낸 복사실과 어제와 오늘 그리고 아직 닿지 않은 내일까지도 예측이 가능한 도서관(「동일한 점심」), 수십 년 동안 한 치의 오차도 없을 것 같던 통조림 공장 현장에서 틈 없이 밀봉하듯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사람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한 시스템(「통조림 공장」), 파견 기간 동안만 돌보고 또 버리는 토끼처럼 자신 역시 짧은 파견 근무 이후 삶의 방향을 잃고 조직에서 잊히는 사무원(「토끼의 묘」, 「정글짐」), 일상의 일탈을 감행했다가 고독도로 복판에서 길을 잃고 불안과 공포로 빨려 들어가는 남자(「크림색 소파의 방」), 끝없이 이어지는 고속도로를 목적지도 없이 일정한 속도로 앞으로만 내달리는 버스 속에 자루에 담겨 운반되는 남자(「관광버스를 타실래요?」) 등 동일성과 반복으로 특징 지워지는 현대인이 겪는 무미하고 건조한 삶과 불안과 공포의 색은 한결같이 잿빛이다.
그렇게 편혜영의 소설은 우리의 인식 체계를 흔들고 균열을 내서 현실의 찢어진 틈새로, 섬뜩한 비현실과 불가사의가 엄습하는 시간여행 속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첨단화, 자동화된 도시 일상에서 타인과의 소통 부재는 물론, 자기 자신과도 소통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우리의 모습을 목도하게 한다.
원색의 화려함도, 흑백의 명징함도 아닌 무감하게 내려앉은 잿빛 기류의 도시 생활자들이라면, 그 안에서 부지불식간에 안온한 일상이라 자족하며 살다가 불현듯 엄습하는 낯섦에 눈을 홉떠본 적이 있는 당신이라면 이번 편혜영 소설집 『저녁의 구애』는 섬뜩한 그로테스크함보다 더한 고독과 현기증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간 ‘아오이가든’의 그로테스크함과 섬뜩함으로 규정돼온 편혜영의 작품 세계를 세 권의 작품집과 장편소설, 그리고 책에 묶이지 않은 작가의 단편들까지 찾아 재독한 문학평론가 손정수 씨는 주제의식과 서술 기법 측면에서 “상징과 상상과 실재가 보로매우스의 매듭처럼 얽혀 있는 인간 삶의 근본적 조건”을 추상성과 보편성의 적절한 배합으로 밀도 높게 형상화해가는 편혜영 소설의 지난 10년은 물론, 다가올 미래에 대한 든든한 기대와 진단을 함께 덧붙였다.
■ 해설
동일한 공간에서, 동일하게 분절된 시간표를 지키며, 동일한 식사를 하고, 동일한 의복을 입고, 동일한 독서를 하고, 동일한 교통수단으로 출퇴근하는 삶, 그래서 어떤 차이도 없고, 차이가 없으니 상처도 없고, 그래서 어떤 굴곡도 없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완전히 동일해지는 나날의 연속, 그것은 ‘삶의 복사’다. 그리고 저수기와 습지와 들쥐와 시체 들과 쓰레기와 악취와 하루살이가 주던 공포보다 더한 공포, 그보다 더한 ‘동일성의 지옥’이다. 동일하고 동일하고 다시 동일한 공간과 시간 속의 저 군상들, 그들이 사는 곳은 바로 그 이유로 미로이고 저수지이다. 야만이 문명이고 문명이 야만이다. 『저녁의 구애』가 우리에게 보내는 경고가 바로 이것이다. 김형중(문학평론가)
『저녁의 구애』의 세계는 상징과 상상과 실재가 보로매우스의 매듭처럼 얽혀 있는 인간 삶의 근본적 조건을 형상화하고 있는 듯하다.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마치 그 매듭이 상징과 상상과 실재의 면들을 차례로 드러내면서 자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그 판타지를 마주 보면서 함께 세계의 주위를 공전하고 있다. 우리는 그 판타지를 통해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의 존재를 느낀다. 손정수(문학평론가)
■ 본문 소개
시작은 이런 식이다. 시간에 쫓겨 택시를 탄 S가, 기사가 채널을 돌리다가 맞춘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온 청취자의 사연을 듣는다. 나는 그 무렵 시간을 보내던 도서관에서 되는대로 집어든 화집 속의 그림을 한 점 본다. 늘 어디론가 여행 갈 작당을 하는 우리들이 벼르다가 통영에 가고, 헤매다가 접어든 길에서 낡은 공장을 보고 Y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시나가와의 멘션에서 험상궂게 생긴 이웃과 엘리베이터를 함께 타고, 6층으로 올라가는 내내 마음 졸인다. 여행지의 한 거리를 무작정 걷다가 여러 번 같은 길을 지나가고, 그럴 때마다 거리 한복판에 뜬금없이 놓인 정글짐을 본다. 한 선배가 주소만으로 낯선 곳의 숙소를 한참 헤맨 끝에 찾고, 거기서 커다란 개를 만난다. S의 후배는 책을 한 권 사고, 거기에 나온 영화를 한 편씩 봐 나가고 있다. 오래전에 죽은 가수에 대한 기사를 잡지에서 보고 노래를 찾아 듣다가 유일하게 한 구절을 알아듣는다. 나는 여전히 이런 우연한 시작이 점점 몸을 부풀리는 걸 지켜보는 게 즐겁다. 이 책에는 필연도 진실도 아니거나 필연이거나 진실인 우연이 고스란히 담겼다. 소설을 쓰는 일이 매번 같은 강도의 노동을 반복하는 것임을 알게 되고, 나는 좀 달라졌다. 자괴하고 한탄하는 일이 줄었다. 소설 쓰는 일의 묵묵한 숙련 방식을 조금씩 깨우치고 있다. 물건을 보면서 노동의 경로를 생각하는 버릇은 오래되었다. _「작가의 말」
인공이란 걸 의식할 수 없었으므로 그에게는 자연이나 다름없었다. 매연이 섞인 공기, 일정한 간격으로 심어진 수종이 같은 가로수, 빌딩 숲 사이로 올려다보는 하늘 따위가 그가 자라면서 경험한 자연의 대부분이었다. 푸른 하늘과 청명한 공기, 광활하고 너른 평야,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따위는 애당초 그의 삶과 관계없는 것이었다. 그는 이제껏 검은 하수가 흐르는 단단한 아스팔트, 밤이면 음식물 쓰레기 냄새가 흥건한 건물의 도시 골목, 매연을 뿜으며 날쌔게 달리는 택시의 불빛 같은 것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는 무겁게 침묵하고 차가운 공기를 내뿜고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나무로 가득 찬 숲과 그 숲을 품은 소도시가 싫어졌다. 모든 길을 감추는 숲에 비하면 한눈에 모든 길이 훤하게 들어오는 도시는 그야말로 천국에 가까웠다. _「산책」
일은 간단했다. 그가 있던 도시에서 온 문서를 정리하고 그 도시와 관련된 정보를 검색하여 간결한 형태의 서식으로 만들어 담당자에게 넘겨주면 되었다. 서식을 작성할 때면 그는 자신이 교무실에 남아 반성문을 쓰는 학생 같다는 생각을 했다. 매일 반복하는, 자료를 검색하는 일이나 서식을 작성하는 일은 진심이 담기지 않은 똑같은 말을 종이 가득 적으면서 사과를 하는 기분이었다. _「토끼의 묘」
끈에 묶인 두 사람은 퍼포먼스가 진행되는 1년 동안 친구들이 중재하지 않으면 손 쓸 수 없는 적대적인 사이로 전락해버렸다. 그들이 끈에 묶여 나누는 대화라고는 끈을 끊어버리고 싶다거나 평생 서로를 저주하겠다는 악담이었다. 그는 책을 덮었다. 결국 타인과의 완벽한 친밀감이란 동경에 불과하며 인간이란 타인과 최소한 2미터 이상의 거리를 가져야만 하는 존재인지도 몰랐다. 그는 복사실의 카운터와 쉴 새 없이 학생이나 강사 들이 지나다니는 복도까지의 거리가 대략 2미터쯤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는 언제든 누구에게든 그 정도의 거리를 유지해왔다. 그 거리는 복사실을 찾는 사람들과 그 사이에 놓인 카운터의 가로 길이와도 같았다. 누구도 카운터 너머로는 들어오지 않았다. _「동일한 점심」
진심과 상관없이, 여자의 마음과 상관없이, 그는 두려움이 점지해준 고백 때문에 곧 부끄러워질 것이며 어떤 말도 돌이킬 수 없어 화가 날 것이고 그 말이 불러온 상황과 감정을 얼버무리려고 애를 쓸 것이며 그럼에도 당시 마음에 인 감정의 윤곽이 무엇인지 헤아릴 것이었다. 그 생각에 김은 갑자기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트럭은 여전히 맹렬하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김은 땅에 박힌 듯 멈춰 서서 조등처럼 환히 빛나는 그 불빛을 바라보았다. _「저녁의 구애」
어디선가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보험회사 직원의 전화일 것이다. 망치 소리 같기도 했다. 망치 소리와 진의 구식 전화벨 소리는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는 점에서 같았다. 어쩌면 이삿짐센터 직원의 전화일지도 몰랐다. 그에게는 들여놓아야 할 짐이 많았고 그 짐의 위치를 정하고 정리해야 할 일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진은 통증을 느끼는 와중에도 피식 웃었다. 잘 피해온 줄 알았는데 제법 큰 웅덩이에 빠졌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미 빠진 줄로 모르고 용케 피했다고 안심하던 자신이 우스웠다. _「크림색 소파의 방」
똑같은 일이 계속 반복되지요. 저는 하루 종일 밀봉만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루 종일 꽁치 대가리를 치고 어떤 사람은 내내 생선 뱃속에 손가락을 넣어 미끈거리는 내장을 빼내요. 하루 종일 생선에 소금을 쳐 간을 하고, 하루 종일 깡통을 박스에 포장하기도 해요. _「통조림 공장」
「토끼의 묘」
「저녁의 구애」
「동일한 점심」
「관광버스를 타실래요?」
「산책」
「정글짐」
「크림색 소파의 방」
「통조림 공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