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냉정하고 엄혹할 우리 앞의 삶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건너는 네 식구의 이야기
“마음먹은 길을 끝까지 가볼 거예요. 저의 밤바다를 건널래요.”
■ 책 소개
강미 작가의 성장소설 『밤바다 건너기』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문지 푸른 문학’ 열세번째 권이기도 한 이 소설은, 현직 교사로 몸담고 있는 작가만의 오랜 현장 경험과 고민 등이 풍부하게 녹아 있는 작품이다. 고 삼 수험생이자 쌍둥이 남매이지만 서로 너무나도 다른 연우와 동우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밤바다 건너기』는 성장소설의 스펙트럼 내에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기존의 성장소설과 뚜렷하게 차별된다는 점에서 눈길을 사로잡는다.
우선,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주된 인물은 ‘청소년’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연우와 동우를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어주는 종술 씨와 명옥 씨 역시, 단순히 부모라는 이름으로 정형화된 이미지에 갇히지 않고서 저마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풀어낸다.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왔던 종술 씨에게는 종술 씨 나름대로, 큰아들을 가슴에 묻은 명옥 씨는 명옥 씨 나름대로 걱정과 괴로움, 아픔이 있다. 소설을 읽는 동안 때로는 동우의 눈으로, 때로는 명옥 씨의 마음으로 끊임없이 보듬고 살피게 한다.
이 소설의 중심축은 쌍둥이 남매인 연우와 동우다. 공부는 잘하지만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모르는 깍쟁이인데다 이기적이기까지 한 연우. 연우에게 중요한 것은 원하는 대학에 무사히 들어가서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는가, 다. 그런 연우와는 달리 공부에는 취미도 없을뿐더러 불합리한 일이 생겼다 하면 참지 못하고 주먹부터 날리고 보는 성격 때문에, 담임선생에게 ‘정의의 사나이’란 빈정거림을 듣고 사는 동우. 사회봉사활동 같은 각종 징계 처분은 덤이요, 동우가 친 사고로 인해 생긴 합의금은 종술 씨와 명옥 씨 몫으로 고스란히 남는다. 달라도 이렇게 다를 수가 없는 이 쌍둥이 남매에게, 서로를 이해하기란 그저 요원한 일이다.
한편, 아버지 종술 씨의 회사가 파업을 이어오면서 월급이 제대로 나오지 않자 연우네 가족도 그에 따른 생활고로 허덕인다. 파업이 시작된 즈음에 큰아들 동세를 사고로 잃은 어머니 명옥 씨는 눈물과 술로 하루하루를 채운다. 친구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일하며 생활비를 겨우겨우 벌고는 있지만, 자신을 포함해 남겨진 가족들의 안위 같은 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돈도 제대로 벌어오지 못하는 무능한 아버지, 먼저 보낸 아들 생각에 가슴을 움켜쥐고 사는 어머니 모두 연우에게는 마뜩치 않기만 하다. 고 삼 수험생인 자신을 뒷바라지해주기는커녕, 부담스럽고 창피하다. 모범생인 자신과 달리 공부도 못하고 걸핏하면 주먹을 휘둘러 사고 치기 일쑤인 쌍둥이 동우도 곱게 보일 리 없다. 동우라고 해서 할 말과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은 먼저 간 형보다도 못한 말썽쟁이일 뿐이다. 이들 모두에게, 삶은 공평히 버겁다.
거부할 수 없는 바다…… 거부해서는 안 되는 바다…… 신비롭고 무서운…… 그렇다면 나는 어디쯤 건너는 중일까, 얼마나 더 가야 이 밤이 끝날까…… ―본문 중에서
바로 이 지점에서『밤바다 건너기』는 특별한 위치를 얻는다. “여러 가족들과 이웃에 대한 이야기”라고 작가가 밝힌 것처럼, 성장소설이기도 한 동시에 가족소설이기도 한 것이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는 온 가족이 함께 성장해 가는 소설이라 할 수 있겠다. 저마다의 삶의 좌표에 따라 그 방식도 형태도 다 다르지만,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것들을 알게 되고, 보지 못했던 것들을 깨달으면서 서로가 있어야 할 자리를 재확인하고 보듬는 과정이 진하게 그려져 있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떨리더니 고개가 푹 숙어진다. 동우의 눈에 아버지의 뒷덜미가 들어온다. 검고 주름진 피부 위로 척추뼈가 도드라져 있다. 동우는 저 뼈가 받치고 있는 아버지의 얼굴을 그려본다. 그 얼굴은 아버지가 아니라 자신과 연우였다는 생각이 든다.” ―본문 중에서
작가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연우와 동우의 가족 주변에 있는 이들에게도 아낌없이 공간을 내어주고 있다. 넉넉한 환경에서 부족한 것 없이 행복하게 살 것만 같았던 친구들, 창미와 진석에게도 타인에게 쉽게 털어놓기 어려운 그늘이 존재하고 있으며 동우의 심적 버팀목 역할을 하는 최혜진 선생에 이르기까지, 『밤바다 건너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소설 내에서 그들의 삶을 각기 입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어 치밀한 구성을 돋보이게 한다. 작중 화자가 여럿이라 인물마다의 감정선을 그대로 느껴가며 읽는 것이 보통 일은 아닐 텐데도, 책장을 덮고 나면 어느 하나 쉬이 잊히는 인물이 없다. 글의 흐름과 구조, 장면들을 섬세하게 설계하고 다듬은 작가의 필력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아울러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 그저 묵묵히 살아온 종술 씨지만, 비정규직 입장에서 고용주의 계속되는 부당한 행태에 파업 동참을 결심한 것, 그 지난한 과정에서 빚어지는 생활고로 인해 가족들과 부딪히는 것은 소설을 읽는 독자 모두가 곱씹어야 할 부분이다. 가족 사이의 화해야말로, 갈수록 격해지는, 인간에게 가해지는 외적․파괴적 압력에 대한 보호 공간이기 때문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이 특별할 수 있다면,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며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점에 있지 않을까.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은 거부해서는 안 될 저마다의 밤바다와 마주하고 있다. 신비롭고 무서운, “그들 앞에 놓인 각자의 삶” 말이다. “삶이란 그렇게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엄중하고 냉혹”할지 모르지만 저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는 밤바다를 건널 수 있게 해주는 힘은 가족과 친구들을 포함해 결국 주변의 소중한 이들 덕분임을 작가는 은은하고도 따뜻하게 그려내고 있다.
■ 작품 줄거리
아버지 종술 씨가 대무 기사로 근무하고 있는 은하교통은 정규직 전환과 체불 임금 등을 둘러싸고 파업 중이다.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오던 종술 씨의 월급이 끊긴 지도 따라서 일 년 가까이 되었다. 친구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어머니 명옥 씨가 근근이 일하고는 있지만 그걸로는 네 식구 목에 겨우 풀칠만 하는 상태. 종술 씨는 이러한 상황이 면목 없으면서도 자신을 이해하고 보듬어주지 못하는 가족들이 서운할 따름이다.
한편, 일 년 전 사고로 큰아들 동세를 잃고 난 후 명옥 씨의 눈에는 눈물 마를 날이 없다. 친구 진숙은 다른 두 아이들을 생각해서 정신 차리라고 충고하지만 명옥 씨 가슴속에는 떠나보낸 동세만이 가득 차 있을 뿐이어서, 슬픔을 안주 삼아 술 마시는 것만이 애면글면 삶을 붙잡고 있는 명옥 씨에게 위안거리다. 동전까지 세어 가며 살아야 하는 현실은 고스란히 남편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지고, 종술 씨가 동세의 기일까지 잊자 명옥 씨는 그저 이렇게 삶이 끝났으면 싶다.
명옥 씨는 버스 정류장에 선다. 멀리 고개를 빼고 있던 진숙이 시야에 들어온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든다. 버스 타면 돼, 명옥 씨가 만류했지만 들은 체 만 체다. 택시가 다가오는 동안 진숙이 명옥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새삼스럽게 왜? 진숙은 대답 대신 친구를 우악스레 잡는다. 명옥아, 서운해하지 말고 들어. 오늘이 동세 기일이라는 말 듣고 아차 했다. 그런데 있잖아, 이제 좀 빠져 나와라. 평생 이러고 살 수는 없잖아. 연우와 동우는 자식 아니니? 동세 때문에 네 생활을 팽개치는…… 그, 그만해. 명옥 씨가 말을 끊는다. 두 눈에는 이미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아니, 계속 할란다. 다 생각하기 나름이야. 너는 이러는 게 자식 잃은 엄마 도리라 생각하겠지만 세상천지 물어봐라…… 때마침 택시가 와서 다행이다. 명옥 씨는 진숙이 잡은 손을 뿌리치고 서둘러 차에 오른다. (82쪽)
하지만 고 삼 수험생 연우에게는 이 모든 것이 불만이다. 공부는 뒷전인 채 언제나 사고만 치고 다니는 쌍둥이, 동우도 거추장스럽고 창피하기만 하다. 도움을 주기는커녕 “도대체 이놈의 집은 조용하게 넘어가는 날이 없”으니, 어떻게든 좋은 대학에 들어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더 멋진 삶을 누리는 게 살 길이라 생각한다. 장학생으로 다니고 있는 승리학원의 장 원장이 연우에게 잠깐이나마 열어준 그런 세계 말이다. 연우에게, 삶의 주인은 바로 자신이어야만 했다.
어머니 혼자 집을 지키고 있다. 아버지는 회사에 있는 모양이다. 차를 몰고 있는지 준법투쟁 중인지 모를 일이다. 아버지가 무엇을 하든 연우는 상관없다. 운전을 하든 구호를 외치든 돈만 벌어다주면 된다. 자식이 걱정 없이 공부하도록 밑거름이 되는 것, 그게 부모 노릇 아닌가 말이다. (29쪽)
동우는 자기밖에 모르는 연우가 못마땅하다. 돌아가며 하기로 한 빨래도 공부를 핑계로 나 몰라라 외면하고, 가족끼리 다툼이 벌어져도 제 방 안에 틀어박혀 공부만 하는 연우가 마뜩할 리 없지만 그래도 연우는 모범생이다. 공부에는 취미도 없으며 ‘정의의 사나이’라 불리우는, 말썽쟁이 자신과는 다르다. 얼마 전에도 같은 학년 친구를 괴롭히는 상급생에게 주먹을 휘둘러 합의금조로 천만 원이나 물어야 했다. 당연히,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다. 물론 자신의 방식이 옳지 않다는 것은 알지만, 부당해 보이는 일을 참을 수가 없을 뿐인데 왜 항상 이런지 모르겠다. 일 년 전에 죽은 형 동세를 조금이라도 닮았다면 이러지는 않을 텐데, 하는 자괴감이 들어 괴롭기만 하다.
그런데 그 이후 남자는 ‘폭행상해’라는 무시무시한 죄목으로 동우를 몰아세웠다. 동우는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그 인간 앞에 무릎을 꿇은 채로 긴 연설을 들었다. 혼자서 열을 냈다 삭혔다 하는 꼴이 K선생처럼 보였다. 결국 해결은 돈이었다. 어떻게, 얼마가 들었는지 아버지는 입을 닫았다. 동우는 물어볼 염치가 없었다. 상급생의 이를 부러뜨렸을 때처럼 난감하고 미안했다. 형만큼은 아니더라도 좋은 아들이 되고 싶었는데, 사고나 치고 돈만 축내고 말았다. 세상의 일들은 늘, 동우의 의도와 상관없이, 불리하게만 흘러갔다. 나쁜 마음을 먹지 않았는데 일은 커지고 마무리는 힘들었다. 세상은 견고했고 자기만 부딪혀 나동그래졌다. 왜 나만 이래요? (177쪽)
눈앞의 현실은 연우의 바람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집안에 돈이 없는 탓에 학급 임원 자격으로 관리해왔던 학급 공금을 멋대로 써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돈 사십만 원을 구할 길이 없어 동동거리다 장 원장에게 빌리지만, 보험 차원에서 익명으로 모종의 ‘협박 문자’를 보냈다가 도리어 덜미를 잡히고 만 연우. 장 원장은 연우를 불러내 경찰에 넘기겠다며 어깃장을 놓는다. 한편 동우는 연우의 친구이자 자신의 여자친구이기도 한 창미의 연락으로 현장을 찾았다가 앞뒤 정황을 파악할 새도 없이 장 원장에게 주먹을 날린다. 돈이 없어 변변한 준비도 하지 못하고 절에 다녀온 명옥 씨는 집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파업에 동참하는 다른 이들을 설득해달라며 은하교통의 전무가 종술 씨에게 돈을 건넨 날. 모두, 동세의 기일 저녁에 벌어진 일이었다.
■ 작품 속으로
아버지는 저런 일을 두고 준법투쟁이라고 했다. 월급이 두세 달씩 밀린 지 일 년이 넘었고, 몇 달 전부터는 아예 한 푼도 나오지 않았다. 사업주가 농간을 부리기 때문이라고 했다. 동우는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든지 관심 없다. 하지만 월급을 못 받는 건 아버지만의 문제가 아니다. 집안 전체가 비상시국이 되어 쪼들린다. 짜증나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렇다고 데모를 해서 해결될 일일까? 몰라, 내가 알 게 뭐람. 동우는 복잡해지려는 생각을 툭툭 털어내듯 오른쪽 다리를 다시 떨어댄다. (10~11쪽)
오도카니 앉아 있는 어머니, 연우는 그만 맥이 풀린다. 어머니 손에 들려 있는 것은 보나마나 사진일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식탁 위에도 여러 장 흩어져 있다. 연우는 달착지근한 술 냄새 때문에, 허구한 날 들여다보는 저 사진 때문에 화가 난다. 자식 잃은 다른 부모들은 어떻게 하고 사는지 알아보고 싶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여자라고 생각하면 위안이 되는지…… 슬픔과 고통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주기적으로 울어줘야 하는지…… 정말 지긋지긋하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29~30쪽)
종술 씨는 파업 열흘째에 동참 쪽으로 돌아섰다. 잘못했다, 골프장을 정리하여 월급을 정산하겠다던 사장이 그 와중에도 공금을 끌어대어 미국에 빌라를 구입한 사실을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고개를 조아리던 사장을 믿은 자신이 어리석었다. 협조하면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는 소문을 믿은 것도 잘못이었다. 노사동행, 그것은 완전 생쇼였다. 나를, 우리를 가지고 놀았구나 싶은 생각이 들자 운전대를 잡고 싶은 마음이 싹 가셨다. 가족의 생계를 짊어진 가장들에게 거짓말을 해대는 족속이라면 인간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종술 씨는 뜻 맞는 대무 기사들과 함께 버스를 세웠다. 그러자 비상 노선이 금방 차질을 빚었다. 회사는 당혹해하고 파업 조합원 쪽은 힘이 실렸다. 그 순간만큼은 금방이라도 승리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변화는 쉬이 찾아오지 않았다. 가두집회와 시청 앞 천막 농성이 지리멸렬 이어질 뿐이었다. 그 와중에도 차를 운행하고 있는 기사들에 대한 불만과 성토가 높아 갔다. 그쪽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종술 씨가 보기에도 그들이 최대의 걸림돌이었다. 버스가 움직이고 있는 한 한 회사를 완전히 밀어붙이기는 힘들었다. (89쪽)
오늘따라 주유는 물론 세차 손님까지 뜸하다. 사무실에 앉아 있기가 갑갑하다. 월급을 받으면 창미에게 그럴듯한 선물부터 하려고 했는데 사장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이러다가 돈을 못 받는 게 아닌지 걱정된다. 내 일 실컷 해 놓고 목을 빼고 돈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 이렇게 초조한 일인 줄 몰랐다. 그런데 이런 노릇을 아버지는 일 년 넘게 하고 있다니, 새삼 동우의 입안에 쓴물이 고인다. (119쪽)
“……제가 못나 빠져서……”
“아서라, 그런 말할 것 없다. 애비야, 힘들어도 마음만은 팍팍하지 말거라. 살다 보면 다 기복이 있는 거다. 더한 일도 겪어냈잖아. 식구끼리라도 서로 보듬어야지. ……중심은 항상 외로운 법이야. 흔들려도 표를 낼 수 없으니 말이다. 맘을 크게 먹어라.” (163~164쪽)
“아이, 정말 창피해. 정말 몰라서 물어? 괴롭히지 말고 학교 좀 보내줘.”
“괴롭힌다고? 창피하다고? 고작 한다는 말이…… 그래 좋다. 뭐가 부끄럽다는 거냐? 아버지가 딸에게 묻는 게? 아님 내가 버스를 모는 게?”
“학교 늦는다니까!”
“학교? 인간이 안 됐는데 그깟 학교가 무슨 소용이야. 가지 마!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도대체 누구 때문에 그 짓을 하는데……”
“학교 안 가면? 그래서 아빠처럼 살라고?” (165~166쪽)
파업은 멈추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운전대를 잡았다. 정해진 근무시간도 없이 새벽부터 밤까지 차를 몰았다. 가족 모두에게 충격적인 일이었다. 애초에 나서지나 말지, 처음부터 회사 편에 섰더라면 변절자라는 소리는 안 들었을 텐데…… 하지만 동우는 아버지를 미워할 수 없었다. 오히려 아버지의 행동과 표정을 살피게 되었다. 아버지는 가두집회, 차고 점거, 공대위 협상을 알리는 뉴스를 볼 때마다 채널을 급히 돌렸다. 어떨 때는 화면이 바뀌는 줄도 모르는 채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했다. 보험을 해약하자마자 횡액이 생긴다고 푸념했고, 욕실에서 오래도록 근무복을 빨았다. 그런 모습들을 보며 동우는 우울했고 슬펐다.
(177쪽)
“그럼요,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잘못한 거, 못해준 것만 생각나니……”
어머니는 말꼬리를 맺지 못하고 울먹인다.
“……하지만 어머니, 아무리 애써도 시간을 돌이킬 순 없어요. 사람이 빠져나와야만 한다고요. ……여기서 웅크리고 자는 동우를 봐요. 불쌍하고 기특하잖아요. 나중에 동우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때는……”
“아이구, 그런 끔찍한 말씀을……”
“이미 어머니도 저도 경험했잖아요. 조금만 마음을 놓았다 싶으면 뒤통수를 치는 게 세상이더라고요. 그러니 이제는 동세가 아니라 동우 어머니로 사셔야 해요. 예?”
선생의 간곡한 호소가 벽을 넘어 동우에게도 전해지는 것 같다. 고맙습니다. 제발 그렇게 도와주세요. 우리 엄마 살려주세요! 동우는 요량 없이 젖어드는 눈가를 쓱쓱 비빈다. (182쪽)
“선생님, 저는요, ……아니에요.”
“말을 꺼냈으면 해야지. 그렇게 멈추면 궁금하잖아.”
“좀 생뚱맞은 얘기라서……”
“괜찮아. 아! 하기 힘들면 다음에 하고.”
“……할게요. ……저는 말이에요. 마음먹은 길을 끝까지 가볼 거예요. 옳은 길이 아닌지도 모르겠지만, 저의 밤바다를 건널래요. 지금은 그럴 수밖에 없어요. 대신 ……무조건 가지는 않을게요. ……많이 생각하고 제 마음도 챙길게요. ……주위도 살필 거예요. 「눈길」의 주인공 같이는 안 되게 말이에요.”
마침내 할 말을 했다는 듯 연우는 긴 한숨을 쉰다. (218~219쪽)
“……같이 하자고 권하기는 하는데 내 입장이 그렇잖아. 이제 와서 다시 그 편으로 갈 낯짝이 없지. 남들이 뭐라 하겠니?”
나뭇잎 하나가 천천히 떨어진다. 용기는 시간을 당긴다고 했다. 동우는 몇 번을 망설이다가 아버지 손을 끌어다 잡는다. 가슴이 쿵덕거린다. 동우는 자신이 닮았다는 아버지의 큰 눈을 바라본다.
“제가…… 사고 칠 때마다 그러셨잖아요. 누, 누구나 시행착오는 있다고요. 어른들도 그럴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아버지가 하고 싶으시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너는…… 내가 부끄럽지 않았니?”
동우는 구겨지는 아버지의 인상을 살피며 잡은 손에 힘을 준다.
“처음에야 뭐…… 그런데 지금은 우리 때문이라는 거 알아요. 연우도 느끼는 게 많다고 했어요. 학원 원장과 그런 일 있고 나서 말하더라고요. 죄송하다고……”
“그, 그래?”
아버지의 목소리가 떨리더니 고개가 푹 숙어진다. 동우의 눈에 아버지의 뒷덜미가 들어온다. 검고 주름진 피부 위로 척추뼈가 도드라져 있다. 동우는 저 뼈가 받치고 있는 아버지의 얼굴을 그려본다. 그 얼굴은 아버지가 아니라 자신과 연우였다는 생각이 든다. (225~227쪽)
■ 작가의 말
한 개인을 규정짓는 말들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저 같은 경우는 청소년을 가르치는 교사인 동시에 청소년의 엄마입니다. 청소년소설을 쓰는 사람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그런지 다양한 각도에서 많은 일을 듣거나 겪게 됩니다. 성적이나 가족 때문에 힘들어하는 아이들을 보고, 이해할 수 없는 자식과의 간극을 하소연하는 부모를 만나며, 본질은 던져둔 채 경쟁과 성과 내기에 급급한 교육현장을 온몸으로 느낍니다. 이러다가는 자본주의라는 저 거대한 괴물에 가정과 학교가 붕괴되는 건 아닌가 하는 무섬증마저 듭니다.
이 지경이다 보니 왜 이런가 되짚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우선 우리 스스로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는 건 아닐까요? 자신의 입장만 틀어쥔 채 말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품 안의 아이로만 대하고 자식은 부모의 헌신과 희생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요? 교사와 학생 사이는 어떤가요. 상대를 관념적으로 상정해놓은 다음 그 선에 미치지 못하면 불신하고 외면하지 않나요? 서로 다가서는 방법, 마음을 나누는 방법은 조금도 고민하지 않으면서 말이에요.
지난 몇 년 동안 우리 문학계에는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1318세대’의 방황과 갈등을 다룬 청소년소설이 많이 생산되고 읽혔습니다. 반갑고 고마운 일이지요. 그런데 청소년소설은 청소년만 읽어야 할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청소년 세계를 잘 보여주는 소설이라면 청소년을 이해하고자 하는 어른들도 읽어야겠지요. 뿐만 아니라 요즘 애들을 모르겠다고만 할 게 아니라 부모의 갈등과 고민도 솔직하게 털어놓아야겠지요. 바로 여기에, 제가 청소년뿐만 아니라 어른들의 목소리도 담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이 글을 읽는 청소년들이 종술 씨나 명옥 씨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부모님을 이해하기를 바랍니다. 마찬가지로 부모와 교사들은 연우나 동우, 창미를 읽어나가며 아이들의 고충을 감싸주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베이스캠프인 가정에서 힘을 충전한 우리 청소년들이 학교 교육을 통해 사회의 동량으로 성장하길 소원합니다.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쓰면서 많은 가족을 기웃거렸습니다. 제 유년 시절의 가족, 제가 속하게 된 가족, 제가 꾸린 가족, 피붙이와 벗들의 가족을 고찰하는 시간들이 많아졌습니다. 한참을 들여다보니 연우처럼 까칠한 애나 동우처럼 학교 체제와 맞지 않은 아이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실직과 가난, 가정불화나 가족의 죽음으로 고달픈 삶을 영위하는 부모들에게 동병상련의 느낌도 가졌습니다. 그러니 이 소설은 제가 직․간접으로 경험한 여러 가족들과 이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그 모든 가족이 덜 힘들고 더 행복하길 바랍니다. 아픈 흔적으로 남은 분들의 명복도 빕니다.
누구에게나 밤바다는 있습니다. 인간은 각자의 몫으로 주어진 밤바다를 건널 뿐입니다. 때로는 어두운 물밑으로 빠지기도 하고 간신히 다시 올라서기도 하겠지요. 어리다고 봐주는 법 없고 어른이라고 수월한 게 아닙니다. 삶이란 그렇게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엄중하고 냉혹한가 봅니다. 저 역시 운명으로 주어진 밤바다를 안간힘으로 건너는 중입니다. 소설이라는 노를 가지고 말입니다. 이 사실은 저를 행복하게도 하고 두렵게도 합니다. 골방으로 밀어 넣기도 하고 광장으로 끄집어내기도 하니까요.
소설을 알게 된 후, 특히 요 몇 년 동안의 항해에 최시한 선생님의 가르침이 컸습니다. 그 분이 아니셨다면 이 책은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11년 1월
강 미
제1부 자기 앞의 바다
5월 16일, 동우
5월 18일, 연우
5월 24일, 동우
5월 25일, 연우
6월 1일, 동우
6월 10일, 연우
제2부 밤바다
7월 4일, 어머니 명옥 씨
같은 날, 아버지 종술 씨
같은 날, 연우
같은 날, 동우
같은 날, 어머니 명옥 씨
같은 날, 아버지 종술 씨
같은 날, 창미
제3부 바다 위의 길
7월 22일, 연우·동세 오빠
7월 26일, 동우·최혜진 선생
8월 1일, 연우·어머니
8월 8일, 동우·창미
8월 14일, 연우·김민숙 선생
8월 23일, 동우·아버지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