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철학계의 두 거장, 필립 라쿠-라바르트와 장-뤽 낭시의 “라캉” 읽기!
문학과지성사에서 ‘파라디그마’ 시리즈로 필립 라쿠-라바르트와 장-뤽 낭시의 공저 『문자라는 증서—라캉을 읽는 한 가지 방법』(김석 옮김)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부제가 선명하게 지시하듯 라캉에 대한 “단 하나의 독해, 그리고 단 하나의 텍스트에 대한 독해”로, 라캉의 이론화 작업에 대해 철학자의 시각에서 그 의의와 특이성을 연구하고 평가한 논쟁적 문헌이다. 1973년 처음 출판된 이래 많은 라캉 연구자들이 필독서로 삼은 책으로, 라캉 자신 역시 1975년 세미나 『앙코르』에서 이 책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 바 있다.
이 책은 1957년에 발표되고 작성된 라캉의 「무의식 속에서 문자의 심급, 혹은 프로이트 이후의 이성」을 단 “하나의” 텍스트로 삼고 있다. 그러나 저자들은 이 책이 라캉에 대한 해설서로 읽히는 것을 경계한다. 또 라캉이 새롭게 고안하거나 발전시킨 개념이 철학과 어떻게 연관되는지 주석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도 저자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저자들은 이 책에서 난해하고 꼬여 있는 문체로 악명 높은 라캉의 문자 이론이 실제로 겨냥하는 바를 충실하게 좇으면서, 라캉이 제시하는 문자의 전략을 몸소 실천해보고자 노력한다. 특히 이 책은 욕망과 이를 규정하고 구조화하는 시니피앙의 결정적 역할을 인정하면서 여기에 맞춰진 글쓰기를 통해 문자의 본질과 텍스트 너머를 제시하고자 하는 라캉 작업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즉, 저자들에 따르면 텍스트의 난해함은 독해의 어려움이 아니라 의미화의 불가능성에서 발생하는데, 이런 이론적 배경을 잘 짚어내는 게 바로 이 책의 장점이다. (문학과지성사 刊, 2011)
라캉에 대한 ‘하나의’ 독해, 그리고 단 하나의 ‘텍스트’에 대한 독해!
책의 저자 필립 라쿠-라바르트와 장-뤽 낭시는 자크 데리다, 알랭 바디우와 더불어 프랑스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중요한 철학자로 평가받는다. 저자들은 스트라스부르 대학 철학과 교수로 함께 재직하면서 공동으로 저서를 펴내는 한편, 철학과 문학, 공동체, 승화 등에 관해 독자적인 사상을 전개해왔다. 이들의 작업은 텍스트의 고정된 의미화를 탈피하고 의미의 변화를 텍스트 자체의 구조에서 찾는 데리다의 해체 작업과도 통하는데, 최초의 공동 작업이 바로 이 책 『문자라는 증서』이다.
책의 구성을 보면 제1부에서는 ‘시니피앙의 논리’가 무엇이고 그것이 라캉의 문자의 과학을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특히 대수학 공식 S/s가 새롭게 공론화하는 이론사적 의의를 정리한 부분은 라캉 연구자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으며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인용되기도 하였다. 문자가 단지 재현이나 표현의 도구가 아니라 주체를 구성하면서 삶 자체를 창조하는 진정한 원인이자 물질이라는 것, 즉 문자가 이처럼 상징적 구조를 포함하면서도 의미화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실재에 속한다는 것이 바로 저자들이 짚어내는 라캉의 강조점이다. 그러나 책의 저자들은 문자의 전능성을 부각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호성과 의미화에 저항하는 문자로 이루어진 텍스트에 대해 어떤 전략을 세울지를 제2부 ‘시니피앙의 전략’에서 제시하고 있다. 만약 저자들이 강조한 것처럼 “텍스트가 스스로를 읽을 만한 것으로 제시하면서도, 독서의 조건들을 끊임없이 벗어나게 하고 연기한다”면, 텍스트 자체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전략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즉, 저자들은 텍스트가 아니라 그 너머에 주목하라고 강조하는데 “텍스트 너머는 욕망과 진리가 함께 모이면서 전체를 구성하는 장소”를 말한다.
결론적으로 저자들이 라캉이 문자 이론에서 강조하는 것은 대상과 사유의 정합적 일치처럼 정의되는 그런 진리가 아니라, 이른바 무의식에 속하는 ‘프로이트적 진리’의 특이성이다. 라캉의 소쉬르의 차용과 대수학 공식은 프로이트적 진리를 완성하고 제시하기 위한 노력들이다. 저자들이 라캉의 텍스트에서 유독 「무의식 속에서 문자의 심급, 혹은 프로이트 이후의 이성」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이 글이 진리를 가장 전면적으로 다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진리는 문자 혹은 말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욕망과 관련이 많다. 문자의 과학이 ‘기호 이론 없는 언어학’으로 정의된다면, 이것은 언어를 통해 드러나면서도 그 대상의 불가능성 속에서 무한히 반복하는 욕망의 본성 때문이다.
물론 이 책은 논쟁적인 책인 만큼 저자들이 라캉의 진리 개념을 하이데거의 진리 개념과 동일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가에 대해 많은 논란과 비판이 있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라캉의 문자 이론이 세심하게 전개하지 못하는 전제들을 철학적으로 잘 조망하고 있으며, 특히 많이들 혼동하는 시니피앙의 논리의 본질과 진리 개념에 대해 이 책만큼이나 그 의미를 잘 설명해주는 책도 없다는 점에서 학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 책 속으로
우리가 희망하는 것은 적어도 이 책의 독해가 그러한 효과를 사라지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시나 암시가 아니라면 라캉이 쓴 ‘하나의’ 텍스트에 대한 해독의 수행 그 이상을 넘어서는 것이 이 책에는 없다. 이것은 특별히 라캉의 텍스트 자체는 그 고유한 상황이 갖는 한계를 넘어 연구되거나 검토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텍스트는 우선 라캉 작품의 연대기적 차원 속에서, 그리고 텍스트의 “이론적” 위치와 그 기능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이 용어에 대해 취하게 될 그러한 의미에서 검토될 것이다. 이론적이라는 용어는 “연결articulation”처럼 텍스트에 대해 대학에서 통용되는 ‘기교’와 관련된다. 이것은 정신분석의 담론을 과학과 철학의 담론에 연결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것이 우리 연구의 유일하게 합법적이고 제한된 기능일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앞으로 보겠지만 외형상 보이는 것과는 달리 잠정적으로나마 이하에서 라캉 저서를 치밀하고 체계적으로 “해석”하려는 생각이나 계획을 가정하는 일은 전혀 없을 것이다. 달리 말해 라캉 저서의 어떤 의미적인 규명이나 충만함을 겨냥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다. 여기저기서 언급할 라캉의 다른 텍스트에 대한 언급들은 우리가 원하는 것처럼 분산되고 복수화된 주석의 형태로서만 그 의미가 있을 것이다. 우리 작업은 라캉에 대한(다시 말해 동시에—비록 직접적이지는 않지만—프로이트에 대한) “해석”이라는 문제의(혹은 문제 속에 있는) ‘결정 불가능성’에 의해 촉발되었다. 그리고 이 작업이 유지되는 곳은 해석 불가능성 자체이다. (「책의 구성」, 13~14쪽)
이제 라캉에게 시니피앙이 무엇인지,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라캉이 시니피앙에 가한 수정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시니피앙은 더 이상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연합 속에서만 존재하면서 시니피에에 대해 기호의 또 다른 면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따라 차이로서 법칙이 등록되고 표기되는 이 간격의 영역이다. 혹은 달리 말해 그것을 ‘구조적 구멍’이라고 명명해야 하는데 그것에 의해 법칙이 차이로서 구별된다는 것을 이제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여전히 작용 자체가 수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수학의 기능을 확실히 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의미화”는 시니피에를 통해서는 진행되지 않기 때문에 결국 시니피앙만이 유일하게 이러한 기능의 모든 무게를 지탱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시니피에 속으로 들어가지만 어떤 순간에도 어떠한 시니피에에 의지하지 않는 ‘입구’를 마련해야 한다. (제1부 2장 「대수학과 작용」, 60쪽)
이 문자를 여전히 통과시켜야 한다. 제시된 환유가 끝으로 은유의 쪽에 제시하는 것이 바로 “단어가 또 다른 단어를 위해”라는 것인데 이것이 생산되기 위해서는 “단어에서 단어로”라는 순환과 우회를 차용해야만 한다. 마치 정치적인 박해라는 그 관계 속에서 “글을 쓰는 기술”처럼 환유는 시니피앙의 영역에 내재하는 일종의 “노예 상태”(E., 508)를 보여준다. 의미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환유 자체가—이 노예 상태의—계략이어야 한다. 문자는 무엇의 노예인가? ‘진리’라고 라캉은 우리에게 말한다. 그러나 이 진리에 대한 언술 행위—모든 비유적인 놀이가 이것으로부터 정돈되고, 주체가 관계하는 진리의 이론을 포함한 모든 주체의 이론이 그것과 더불어 정돈된다—는 문자에 대한 모든 논리를 담론의 새로운 연결 속으로 끌고 간다. 왜냐하면 라캉이 이 진리를 ‘프로이트의 진리’(E., 509)라고 명했기 때문이다. (제1부 4장 「의미작용」, 95~96쪽)
‘욕망’(연결이 결합해야 하는 곳이 결국 이것이다)이라는 말을 발음하자마자 진리가 아주 절박한 것으로 되고, 찾아야 하는 감춰진 대상이 너무 가까워 ‘우리를 달아오르게 하는’ 것이 확실히 우연은 아니다. 그것은 마치 사람들이 ‘물건 감추기’라고 부르는 놀이에서 말하는 것 같다. 이제는 은유를 당연히 드러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의 ‘폭로’가 절박한 이 진리는 문자를 ‘도장 찍는’ 것일 뿐 아니라, 우리를 불태우는 이 불이 갑작스럽게 작열하고 “도처에 번지기” 때문이다. 폭로가 불의 문자로 등록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혹은 최소한 드러나는 그것이 바로 불이다. 그런데 이 불이 태우고 여기서 황폐하게 만드는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결국은 연결 자체이다. 소쉬르와 프로이트를 체계적으로 접목하는 대신 그것은 불태우고, 그 결과 이렇게 구성된 문자의 과학에 대해 오직 타고 남은 재만을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감수해야 한다. (제2부 시니피앙의 전략, 102쪽)
그런데 이 순간부터 문제는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정확히 말해 문제가 되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이기도 하다. 끝내기 위해 우리는 ‘텍스트’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만약 엄밀하게 텍스트가 진리의 구조 속에서 이해 가능하도록 스스로를 허용하지 않는다면(그러한 것이라면) 말이다. 그러므로 이 “텍스트”에 연관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이 텍스트를 라캉이 그것에 부여한 의미를 통해서 ‘담론’으로 규정해야만 했다. 그런데 텍스트는 그것을 언술하는 행위에서 단절, 그 언어로부터 벌어짐, 그 공정으로부터 빗나감에도 불구하고 라캉의 담론이 그것에 재결합하는 데 도달하지 못하는 그런 것이다. 혹은 오히려 그 텍스트 속에서 라캉의 담론은 스스로를 잃어버리지 않는다. 의심할 바 없이 모든 담론은 언제나 하나의 텍스트이기도 하다. 그러나 ‘담론으로서’ 텍스트는 그것이 내포하는 텍스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 한에서 텍스트가 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그것을 알기를 원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여기서 프로이트의 텍스트를 우리가 (불가피하게) 붙잡는 혹은 그것에 우리가 (불가피하게) 붙잡혀 있는 담론 속에서 지목할 수 있다면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부인”이 엄밀히 말해 라캉의 텍스트(담론)를 존재론의 동일한 정식, 다시 말해 은유의 동일시에 가두는 것이 아니겠는가. 만약 환유에 대해 말하는 것이 또한 은유가 아니라면 어떠한 환유도 텍스트를 존재의 “결여”에 대해 다시 열 수 없을 것이 아닌가? (제2부 3장 「‘승인된’ 진리」, 176~77쪽)
서문
제1부 시니피앙의 논리
1. 문자의 과학
2. 대수학과 작용
3. 시니피앙의 나무
4. 의미작용
제2부 시니피앙의 전략
1. 전략
2. 체계와 조합
3. ‘승인된’ 진리
옮긴이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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