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껏 시도되지 않았던 이성애 문화에 대한 고찰!
“왜 어떤 이들은 오히려 이성에게 끌리는가?” 여기 ‘사랑의 역사’에 관해, 보다 구체적으로는 ‘이성애 역사’에 관해 흥미진진한 문제 제기를 던지는 책이 출간되었다. 문학과지성사에서 ‘현대의 지성’ 시리즈로 출간된 『사랑의 역사—이성애와 동성애, 그 대결의 기록』이 바로 그것. 이 책은 누구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전제, 즉 이성애는 ‘자연의 질서’라거나 ‘인간 사회의 기조’라는 전제를 역사적 맥락에 비추어 논박하고 있으며, 남녀관계의 과도한 일반화는 그다지 오래된 문화 현상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 문학작품에 의거하여 흥미롭게 논증하고 있다.
저자 루이-조르주 탱은 이 책을 통해 ‘이성애’라는 개념에 대해 독창적이면서도 탁월한 방식으로 질문을 던진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는 이성애 커플의 상상세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우리를 행복감에 젖게 하는 마법에 온통 사로잡혀 있다. 어린이용 동화, 어른용 소설, 영화와 텔레비전, 신문과 잡지, 광고와 대중가요, 모든 것이 행여 뒤질세라 남녀 커플을 예찬해 마지않는다.” 그러나 매우 놀랍게도 우리 사회에서 이성애 자체에 대한 성찰은 거의 이루어진 적이 없다. 즉 “이성애는 일반적으로 모든 견해의 시점, 따라서 맹점이었다. 이성애는 도처에 존재하고 무대화되고 예찬되면서도 마치 스스로에 대해 투명한 것처럼, 마치 자기 반영의 속성을 갖지 못한 것처럼 전혀 고찰되지 않았다”는 것. 뒤집어 말해 이 책의 문제의식은 “왜 우리는 그토록 이성애에 관해 별로 말하지 않는가?”에서부터 출발한다.
이성애 문화는 언제부터, 어떻게 동성애 문화에 승리하였나?
이렇듯 이 책 『사랑의 역사—이성애와 동성애, 그 대결의 기록』은 언제부터, 어떻게, 그리고 왜 우리 사회는 이성애 커플을 기리기 시작했는지를 여러 프랑스 문학작품을 논거로 삼아 흥미롭게 추적해나간다.
우선 저자는 ‘사랑’이라는 인간의 감정이 인류의 번식, 즉 ‘생식’이라는 궁극목적으로만 환원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전제한다. 물론 생물학적 생식은 이성애적이지만, 사회생활은 지배, 경쟁, 협력, 그리고 제법 엄밀한 기능성에 따라 훨씬 더 복잡한 방식으로 맺어지는 관계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것. 따라서 이성애적 생식이 인간 사회의 생물학적 토대라 해도 이성애 문화는 다른 문화들 가운데 한 구성물일 뿐이고, 이 점에서 유일하고 보편적인 본보기로 표명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이를 위해 이성애를 ‘자연의 질서’에서 끌어내어 ‘시간의 질서’ 속으로, 다시 말해 ‘역사’ 속으로 끌어들인 저자는, 12세기부터 20세기까지의 주요한 프랑스 문학작품을 통해 통사적으로 이 문제를 살피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이성애 문화는 12세기 초 무렵 궁정사회 덕분으로 서양에 등장한다. 그 이전에는 남녀 커플이 주요한 대상이거나 관심을 끌지 않았다. 오히려 상찬되고 고양되었던 것은 남성들 간의 우정이었다는 것. 이러한 사실은 봉건사회의 근간이었던 기사도 문화와 관계가 깊은데, 이 시대의 동성애적 관계는 오늘날과 달리 사적이자 공적 관계였으며, 또한 육체관계로까지 나아가지는 않았지만 우정 이상의 것, 즉 아모르라 지칭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12세기에 이르러 궁정식 사랑이 등장하면서 동성애 커플을 밀어내고 이성애 커플이 전면에 등장하기에 이른다. 봉건사회를 떠받치고 있던 기사들의 저항, 성적인 욕망을 금기시했던 가톨릭교회의 저항, 심지어 근대에 이르러서는 사랑을 ‘병’으로 간주했던 의사들의 저항이 있었지만, 결국 이성애 문화가 동성애 문화에 압승을 거둔다는 것을, 이 책은 저자의 전공답게 프랑스 문학 텍스트 분석을 통해 생생하고도 구체적으로 그려낸다. 즉, 현재 우리 사회 도처에 이성애가 범람하고 그로 인해 우리가 이성애의 보이지 않는 제국에 살고 있다 해도, 이성애는 처음부터 자명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으며 오랜 역사에 걸쳐 동성애를 밀어내고 동성애에 대한 우위를, 다시 말해 헤게모니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흥미로운 주제를 다루는 만큼, 시종일관 위트 있고 유머러스한 문체로 논지를 전개해나간다. 불문학을 전공한 학자이자 성의 역사에 대한 전문가인 저자 루이-조르주 탱은 성소수자 차별과 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운동가로도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국제 동성애 혐오 반대의 날International Day Against Homophobia, IDAHO’(매년 5월 17일)의 창설자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소수자의 편에 서서 활동하는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항상 “탐구의 대상은 타자, 비정상적인 자였다. 설명되어야 하는 사람은 동성애자였다”라고. 이렇듯 우리 사회를 둘러싸고 있는 이성애에 대해, 다시 말해 오늘날의 사회-성적 장치에 대해 줄기차게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이 책은, 저자의 표현대로 ‘이성애의 역사’를 구성할 첫번째 권이자 ‘이성애 문화의 계보학’을 위한 하나의 실마리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 책 속으로
오늘날 게이 및 레즈비언 문화가 빠르게 퍼져 나가면서 역설적으로 이성애(異性愛) 문제에 관한 근본적인 성찰이 일고 있는데, 이는 참으로 새로운 현상이다. 사실 수세기 전부터 무수히 많은 저작물에서 이성애자들의 결혼, 가족, 사랑 또는 성이 다루어져왔지만, 매우 놀랍게도 그 글들에서 이성애 자체는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성애는 일반적으로 모든 견해의 시점, 따라서 맹점이었다. 이성애는 도처에 존재하고 무대화되고 예찬되면서도 마치 스스로에 대해 투명한 것처럼, 마치 자기 반영의 속성을 아직 갖지 못한 것처럼 전혀 고찰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성애에 관한 성찰의 부재는 비록 주목받은 적이 별로 없다 해도 그 자체로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는 이성애 커플의 상상세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우리를 행복감에 젖게 하는 마법에 온통 사로잡혀 있다. 어린이용 동화, 어른용 소설, 영화와 텔레비전, 신문과 잡지, 광고와 대중가요, 모든 것이 행여 뒤질세라 남녀 커플을 예찬해 마지않는다. 이 세계는 보이지 않는, 적어도 대부분의 이성애자에게는 보이지 않는 제국이다. 이성애는 공유된 자명한 이치이자 ‘자연스러운’ 본성이다. 그런데 이 주제와 관련해서는 가장 단순하고 어쩌면 가장 근본적일지도 모르는 문제조차 늘 해결되지 않았고, 심지어 늘 제기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먼저 원인의 문제가 여전히 미결 상태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건대, 왜 어떤 이들은 오히려 이성의 인물에게 끌리는 걸까? 이 질문은 아마 기발하고 터무니없고 도발적으로까지 보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 현상의 병인론은 아직까지 거의 탐구되지 않은 분야인 만큼 이 질문은 승산이 없는 어려운 성찰을 촉구한다. (「머리말」, 5~6쪽)
이성애 문화는 역사 속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만큼 우리 사회에서 어느 시대에 이성애 문화가 출현했는가를 자문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사실상 이성애 문화는 다름 아닌 12세기 초 무렵에 궁정사회 덕분으로 서양에 등장한다. 확실히 이전 세대에는 남녀 커플이 그 자체로 예찬되지 않았다. 남녀 커플은 여기저기 존재하기도 했고 때로 무대화되기도 했지만 주요한 대상이거나 유난히 관심을 끈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반대로 12세기부터 남녀 커플은 텍스트와 예술적 재현에 자꾸 나타나면서 현실이 된다. 남녀 커플은 흔히 행복감을 자아내는 수많은 담론을 불러일으키며 끊임없이 분석되고 노래로 불리고 상찬되고 고양된다. 남녀 커플은 그 자체로 문화물, 심지어 숭배의 대상이었다. (제1부 이성애 문화에 대한 기사들의 저항, 15쪽)
상징적인 거주지를 지정받은 여자들의 현실이 여자다움의 매혹적인 이미지 너머에 여전히 가로놓여 있었다. 사실 기사들의 감탄과 남프랑스 음유시인들의 찬탄에 부쳐지는 귀부인의 존재는 완전히 봉건적인 논리에 포함되었다. 그 모든 용사와 기사 지망자와 그 밖의 모든 이가 궁정에 상주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들을 부리고 그들의 충성을 이끌어내야 할 봉건군주에게 필요한 일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성과 사회에서의 욕구불만이 그 어떤 것에서라도 성공하기를 바라는 그 모든 독신 젊은이의 성급함을 부채질하는 만큼 혼란과 무질서의 근원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귀부인의 아름다움과 높은 신분은 거친 사내들을 사로잡았다. 그들은 길들여졌다. 귀부인의 애정 표시, 가령 눈길, 관심, 어쩌면 우아함이 서서히 내보여짐으로써, 단지 그뿐이지만 그들의 욕망은 달래졌고 그들의 품성은 다듬어졌다. 이런 식으로 그들이 귀부인에게, 다시 말해 봉건군주에게 계속 종속되어 있는 덕분에 봉건권력이 강화될 수 있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궁정사회에서 귀부인에 대한 기사들의 사랑이 맡은 기능은 예전에 성(城)에서 남성의 우정이 맡은 것과 정확히 동일했다. 즉, 양자 모두에게 정신과 육체의 장치, 우정과 사랑의 목적은 봉건군주의 권위를 확고히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먼저 동성사회 문화가 권력에 일조했고, 다음으로 이성애 문화가 권력에 기여했다. 게다가 이 기능상의 상동(相同)은 겉보기에 너무나 대조적인 두 패러다임이 어떻게 그토록 급속하게 잇따를 수 있었는지를 설명해준다. (제1부 이성애 문화에 대한 기사들의 저항, 56~57쪽)
예전에 나약한 남자는 에레크처럼 여자의 환심을 사려는 풍조와 이성애 문화를 다소 지나치게 추종하는 이였고, 반대로 남색자는 남성의 동성사회 문화를 다소 지나치게 따르는 이였다. 이것들은 매우 상이한 두 가지 고정관념이었다. 그러나 앙리 3세는 프랑수아 1세처럼 두 가지 이상, 즉 무인과 궁정인의 이상을 한꺼번에 구현하려고 시도한 만큼 사실상 이 두 비판을 동시에 받을 위험에 직면했다. 프랑스 역사에서 앙리 3세는 필시 남색자이자 동시에 여자 같은 남자라고 비난받은 최초의 주요 인물이라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이 결합이 어느 정도로 놀라운 일이었는지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적어도 19세기부터는 동성애자의 이미지가 대체로 여성화된 남자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앙리 3세 이전에는 이와 같은 동일시가 그다지 실재하지 않았고 여자 같은 남색자의 모습이 결코 그 정도로 공들여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따라서 이 모습의 표명은 오늘날에는 대수롭지 않고 거의 중복인 것 같을지 모르지만, 예전에는 틀림없이 기묘하고 심지어 역설적인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제1부 이성애 문화에 대한 기사들의 저항, 73쪽)
이성애 문화에서 기사도 윤리에 의해 비난받는 내용은 특히 여자에게 (적어도 겉보기로는) 더 넓은 자리를 할애하는 그 문화의 이성애적인 특성이었는데, 이것은 남자를 여자같이 나약하게 만들 우려가 있었고, 완벽하게 작동한다고 생각되는 동성사회적 세계의 정연한 질서를 결국 흩뜨려놓았다. 이에 따라 실체로서의 여자는 아니라 해도 여성성이 봉건사회에서 쟁점으로 떠올랐고, 기사들은 젠더, 즉 사회적 성의 문제와 마주치게 되었다. 성직자 역시 궁정사회의 비약적 발전에 저항했다. 그러나 이성애 문화에서 성직자 윤리에 의해 비난받는 것은 육욕에 더 넓은 자리를 할애하는 그 문화의 성적인 특성이었는데, 이것은 신자에게 현세의 쾌락에 대한 욕망을 부추길 우려가 있었고, 그리스도교의 영성으로 전향시켜야 할 세계의 정연한 질서를 결국 흩뜨려놓았다. 따라서 쿠르투아지의 범람으로 인해 교회에 섹스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때부터 구체제 사회의 제2계급뿐 아니라 제1계급도 남녀 커플의 문화에서 이룩된 비약적 발전과 대결이 불가피했다. 조르주 뒤메질의 전문 용어를 빌려 달리 말하자면 벨라토레스를 넘어 오라토레스 또한 이성애 문화의 출현을 가로막았다. (제2부 이성애 문화에 대한 성직자들의 저항, 103쪽)
또다시 논쟁의 대상은 명백히 신학과 사목의 영역에서 이성애 커플에게 부여할 수 있는 자율성에 관한 것이었다. 가톨릭 신자의 경우 사제에게 결혼을 허용하는 것은 성 바울로 이래 부부 또는 애정생활에 대한 경건한 독신생활의 우위를 명시해온 윤리와 전통을 포기하는 것이 되었다. 물론 결혼은 성사가 될 수 있었지만, 남녀 커플의 상징적인 인정은 더 진전될 수 없었다. 사제가 순결의 의무를 위반해도 괜찮을 수는 없었다. 부부생활과 성직자 생활 사이의 분명한 위계를 유지해야 했는데, 그렇지 않으면 성직자와 평신도가 동등해질 우려가 있었다. 달리 말하면 제도 자체가 다시 문제될 수 있었다.
논쟁의 관건은 하찮지 않았다. 육욕의 거부, 따라서 결혼의 거부로 표현되는 ‘희생’은 여러 세기 전부터 가톨릭교회의 사회적이고 상징적이며 영적인 권위를 더 확고하게 세울 수 있게 해주는 구별의 전략을 이루었다. 이 ‘희생’은 사제와 수도사에게 공덕과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증거였다. 실제로 성직자의 위신은 상당 부분 감각에 대한 정신의 지배력을 입증해주는 성적 금욕, 반(反)선정적 규율에 달려 있었다. 따라서 성직자는 육체를 초월하는 만큼 영혼의 지도를 권리로 요구할 수 있었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육욕 및 결혼의 단념은 성직자 제도의 든든한 기둥 가운데 하나였다. 가톨릭 성직자가 이 단념을 포기할 때면 그의 세속권도 약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제2부 이성애 문화에 대한 성직자들의 저항, 163~64쪽)
19세기 말의 정신병 전문의들은 유난히 이 모든 문제에 대해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회 전체의 머리맡에 자리를 잡았고, 정신 현상의 생소한 영역을 탐색했고, 새로운 정신질환들을 설명했고, 그 미친 사랑, 그 연애망상, 그 위험한 병리를 지칭하기 위해 또 다른 용어를 찾아냈는데, 그것은 바로 ‘이성애’였다! 『이성애의 발견』에서 역사가 조너선 네드 카츠는 이 어휘의 출현을 집중적으로 탐색하는데, 그가 아주 놀라운 방식으로 밝히듯이 실제로 그 시대에 이성애는 의사들이 치료하려고 시도하는 정신질환을 가리켰다. 가령 1893년 생루이 병원의 저명한 의사 샤를 위그는 자신의 동료들에게 의학적 치료를 통해 “이성과 감정을 정상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가능하며 “동성애자와 이성애자라도 자연적인 연애 성향과 정상적인 충동을 지닌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제3부 이성애 문화에 대한 의사들의 저항, 236쪽)
사랑이라는 논거의 기능과 한계는 너무나 분명했다. 부부의 사랑에 대한 예찬을 통해 상징적 질서에 대한 여자의 매혹된 종속을 굳게 다지는 것이 관건이었다. 이처럼 여자는 자신이 사회적으로 지배당하는 구조를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도록 권유받았다. 〔……〕 그런데 이 경우에는 사랑이라는 논거가 명백히 여자의 동의를 부추기기 위해, 또한 남성의 지배를 가리고 따라서 강화하기 위해 도입되었다. 실제로 이 논거는 효과적이었다. 예컨대 1970년대까지, 심지어 그 이후로도 (이성애적인) 여권주의자들이 빈번히 이 논거에 걸려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떤 여권주의자들은 평등과 사랑 사이에서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일부 남자들이 기회주의적으로 양성(兩性) 사이에 전쟁이라도 벌이겠다는 말이냐고 위협했기 때문에, 그녀들은 남녀 사이의 사랑이 평등을 위한 정치 투쟁에 의해 약화될까 봐 두려워했다. 즉, 사랑은 여자의 아편이었다. (제3부 이성애 문화에 대한 의사들의 저항, 241~42쪽)
동성애의 ‘원인’과 동성애를 ‘치유할’ 수단에 관한 수십 년 동안의 생의학적 연구 끝에 1990년 5월 17일 세계보건기구는 마침내 동성애는 질환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했다. 확실히 이 영역에서 구상된 온갖 가설은 ‘과학의’ 관점에서는 의심스럽고 ‘치료의’ 관점에서는 대체로 파국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그렇지만 많은 국가들에서는 여전히 ‘원상회복 요법들’이 실행되고 있다. 어쨌든 성적 경향 일반이 아니라 별도로 동성애에 이 모든 이론이 집중되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이성애의 중대한 문제가 이 모든 이론에도 불구하고 어둠 속에 남아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누구나 설명하려고 애쓴 것은 이번에도 역시 타자, 비정상적인 것인데, 이마저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다. (제3부 이성애 문화에 대한 의사들의 저항, 246쪽)
머리말
제1부 이성애 문화에 대한 기사들의 저항
1. 중세: 동성사회 문화에서 이성애 문화로
2. 르네상스 시대: 동성사회 전통과 이성애 문화 사이의 갈등의 지속
3. 17세기: 이성애 문화의 압승
제2부 이성애 문화에 대한 성직자들의 저항
1. 중세: 가톨릭교회 대 남녀 커플
2. 르네상스 시대: 종교 문화와 이성애 문화 사이의 갈등의 지속
3. 17세기: 이성애 문화의 압승
4. 20세기: 가톨릭교회의 헛된 마지막 저항
제3부 이성애 문화에 대한 의사들의 저항
1.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의사들 대 남녀의 사랑, 상사병
2. 17세기: 상사병에서 의사로서의 사랑으로
3. 20세기: 이성애 문화에 대한 의학 담론의 헛된 마지막 저항
맺는말
옮긴이 해설
정선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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