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이자, 시인, 사회 평론가로 경계를 넘나들며 활발하게 활동해온 작가 복거일이 ‘문학’에 관해 쓴 글을 묶어 책으로 펴냈다.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된 『수성獸性의 옹호—복거일의 문학 에세이』가 그것. 이 책은 문학에 관한 진지한 성찰을 바탕으로 문학이 처한 현실을 진단하고, 앞으로 우리 문학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다양한 논의를 담고 있다. 그동안 신문과 잡지 등 여러 매체에 기고한 글들 가운데 ‘문학’과 관련된 글을 정리해 묶었다. 특히 저자 특유의 날카롭고도 통찰력 있는 시각이 돋보이는 이 책은, 문학 내부에서 벌어지는 생생한 논의를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한편, 문학을 둘러싼 다른 지적 영역들까지 다양하게 아우르며 문학 전반에 관한 논의를 더욱 풍부하게 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그동안 ‘보수 논객’에서부터 ‘진정한 자유주의자’까지 다양한 층위의 해석을 불러일으킨 바 있는 작가 복거일의 문학에 대한 인식과 성찰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독서를 제공한다. (문학과지성사 刊, 2010)
문학의 본질은 이야기며, 문학의 핵심은 이야기하기
“이야기는 영원하다”
문학의 위기, 즉 문학의 앞날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높은 가운데 이에 대한 다양한 진단이 나오고 몇몇 처방들도 뒤따랐다. 이 책에서 저자 복거일은 문학 전반을 아우르며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냉철한 시선으로 비판의 목소리를 서슴지 않는 저자의 글에는 안타까움과 애정 어린 질타가 묻어나는 한편, 희망적인 전망도 엿볼 수 있다. 저자는 현시점 문학의 위기에 대해 “문학이 자신을 두른 울타리는 높고 투과성이 낮다”라고 진단한다. 따라서 앞으로 문학이 나아갈 길에 대해 “스스로 둘러친 울타리를 낮추고 다른 지적 분야들로부터 자양을 받아들이는 일이 바람직”하다는 것이 이 책을 관통하는 저자의 문제의식.
우선 저자는 문학에 대해, 즉 문학의 본질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해 들어간다. 그에 따르면 ‘문학’은 “사람의 혼란스러운 경험들에서 질서를 찾아내서 그런 질서들을 되도록 높은 차원의 지식들로 다듬는 작업”이어서, “대부분의 지식들은 부분적이고 분석적이다, 문학은 그런 부분적이고 분석적인 지식들을 종합해서 ‘이야기’라는 형태를 갖춘, 전체적 지식들로 만들어낸다. 그래서 문학의 본질은 이야기며, 문학의 핵심은 ‘이야기하기’다. 이야기는 일관성을 지닌 흐름이며, 자신 밖의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는 자족적 존재다. 그래서 문학작품들은 가장 높은 차원의 지식들이다. 그리고 문인들은 본질적으로 자신들의 경험을 높은 차원의 질서를 지닌 이야기들로 만들어 들려주는 사람들이다”라고 말한다. 책의 제목 ‘수성獸性의 옹호’가 의미하는 바도 이와 같은 맥락에 닿아 있다. 인성人性, 즉 이성이 득세한 현대 사회에서 예술가들은 우리 마음의 원시적 부분들, 즉 수성獸性을 대변한다고.
이렇듯 이 책 『수성獸性의 옹호』는 문학에 관한 진지한 성찰을 바탕으로 현재 문학이 처한 냉엄한 현실을 진단한다. 특히 저자는 비단 문학에만 국한되지 않고, 인문학과 자연과학 등 다른 학문 분야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이를 통해 흥미로운 의견을 개진해나간다. 예를 들어 문학의 중심적 형식인 소설이 “먼 미래에선 아마도 ‘박물관 예술’이 될 것”이라는 예견,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의 본질인 “이야기는 영원”할 것이라는 주장이나 언어가 발생하고 쇠퇴해온 역사를 통해 민족어들이 현재 처한 운명에 대한 진단, 모국어를 민족주의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에 대한 비판, 그리고 저자가 오래전부터 주장해왔던 영어공용화에 대한 의견 등이 그러하다.
이처럼 저자가 제기하는 주장들은 매우 독특하면서 우리 시대의 문학이 처한 현실을 두루 살피는 차원을 넘어 미래를 예견하는 통찰로서 읽힌다. 이는 저자 자신이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그동안 꾸준히 사회비평을 해온 평론가답게 그의 관심사가 넓으면서도 깊고, 또한 그것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 『수성獸性의 옹호』는 저자의 말처럼 “가장 높은 차원의 지식”인 ‘문학’에 대한 성찰이면서, 동시에 현재 우리 모습과 삶에 대한 통찰이기도 하다.
이 책은 모두 3부로 이루어졌다. 제1부 ‘문학에 관한 성찰’은 문학이 처한 현실에 대한 냉철한 분석을 바탕으로 문학의 본질과 문학과 언어 및 문학과 사회와의 관계를 비롯해 앞으로의 전망을 전반적으로 살피고 있다. 제2부 ‘작가에 대한 성찰’은 우리 사회에서 작가들이 처한 현실을 진단하면서 작가들이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고 있으며, 제3부 ‘작품들에 대한 생각’에서는 몇몇 작품들의 비평을 통해 작품과 작가, 작품과 독자들과의 관계에 대한 그의 사색을 풀어놓는다.
■ 책 속으로
그러면 우리가 아는 문학은 어떤 상태에 놓일까? 특히 문학의 중심적 형식인 소설은 어떤 모습을 할까? 그렇게 다중지각 예술 형식들이 융성하는 먼 미래에선 소설은 아마도 ‘박물관 예술’이 될 것이다. 소수의 애호가들이 즐기고 연구하지만, 대중들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자연히 필요한 시장을 확보하거나 뛰어난 재능들을 끌어올 만한 활력을 지니지 못한 예술 형식이 되었으리란 얘기다. 〔……〕
이런 전망은 문학에 종사하는 이들과 문학을 아끼는 이들을 적잖이 서글프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술 자체이지 우리에게 익숙한 예술의 모습이 아니다. 분명한 것은 이제 막 시작된 3천 년기에도 예술은 융성하리라는 점이다. 새로운 기술들과 사회환경이 나타나면서, 묵은 예술 형식들은 쇠퇴하고 새로운 예술 형식들이 끊임없이 나올 것이다. 그래도 예술이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기라는 사실은 그대로 남을 것이다. 이야기는 영원하다. (「이야기는 영원하다」, 24~25쪽)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아주 작은 것”일 수밖에 없다. 문학작품을 읽고서 투표에서 선택을 바꾸는 사람들은 드물고, 문학작품의 구입이 가계의 지출 항목 앞쪽에 놓이는 집안은 없다. 작가에게 문학은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지만, 오든의 탄식처럼, 현실에서 예술은 “사소한 것”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문학작품들을 찾는다. 그들이 찾는 것은 앞에 ‘민족’이나 ‘민중’과 같은 머리띠를 두른 문학이 아니다. 그들이 찾는 것은 이야기다. 재미있는 이야기다. 그리고 작가들은 이야기를 들려주면 된다. 자신의 이야기가 되도록 보편적이기를, 그래서 진실의 알맹이들을 많이 품기를, 덕분에 재미가 크기를 바라면서. 그것만이 문학이 궁극적으로 사회에 이바지하는 길이다. (「혼돈과 질서 사이에서」, 96쪽)
무릇 사물은 바탕이 넓어야 높이 쌓을 수 있다. 우리 작가들이 눈길을 밖으로 돌리고 보편성을 추구해서 우리 문학의 바탕이 넓어질수록, 우리 문학은 풍요로워지고 번창할 것이다. 우리 문학을 척박하고 사소하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길은 우리 문학의 바탕을 좁히는 것이다. 문화든 언어든, 국적을 따지고 눈길을 안으로 돌리는 것보다 활기를 앗는 처방은 없다.
우리 문학의 바탕을 넓히려면, 앞에서 살핀 것처럼, 우리 문학에 질곡으로 작용한 두 개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일이 긴요하다. 하나는 한국 문학의 범위가 한국의 국경이라는 생각이다. 다른 하나는 언어장벽이 한국어를 지키는 기능을 수행하며 필요한 정보들과 지식들은 번역과 통역으로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세계성의 시대에 전혀 맞지 않는 이런 미망에서 벗어나야, 우리 문학은 활기를 얻고 잠재적 능력을 한껏 펼쳐서 사람들의 넋들을 자유롭게 하는 자신의 소명을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성 시대의 한국 문학」, 165쪽)
책과 문학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는 세상이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문학은 오히려 중요해진다. 러시아가 공산주의 체제에서 벗어나려 애쓰던 1989년에 이리나 라투신스카야가 한 말은 우리에게 그 점을 새삼 일깨워준다. “러시아 문학은 내 영혼을 구해주었습니다. 내가 학교에 다니는 어린 소녀였고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를 물었을 때, 그 부패한 체제에 속한 누구도 나에게 그 답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얘기는 러시아 역사에서 가장 압제적이었던 시기보다 훨씬 너른 세상에 적용될 것이다. 인류 사회엔 늘 압제와 부패가 있을 터이다. 그리고 문학은 늘 할 일이 있을 터이다. (「왜 사람들은 소설을 읽지 않는가」, 179~80쪽)
예술은 그렇게 두려움에 질린 마음의 원시적 부분들을, 즉 수성獸性을, 대변한다. 갑자기 나타나서 빠르게 지배적 위치를 차지한 인성人性과 그것을 두려워하고 시기하는 수성이 맞설 때, 예술은 선뜻 수성의 편을 든다. 사람의 활동들 가운데 학문과 기술에선 인성이 큰 몫을 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예술은 사람 전체를 드러내므로, 우리 성품 속에 있는 수성이 자연스럽게 부각되고 학문이나 기술에서보다 훨씬 큰 목청을 얻는다. 〔……〕 바로 여기에 예술의 중요성이 있다. 예술은 사람의 삶에서 지성과 과학이 지닌 압도적 우위에 맞서 감정과 원시적 세계관을 대변한다. 예술은 우리의 몸과 마음속에 있는 짐승과 사람 사이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현상을 걱정스럽게 바라본다. 달리 말하면, 예술은 사람이 자신의 인성에 너무 주목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경고하는 기능을 수행한다.〔……〕그러나 예술이 그런 기능만을 수행해야 할 이유는 없다. 예술이 사람 속의 수성과 인성을 조화시킬 수 있다면, 당연히 더 좋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하는 것이 예술이 지향하는 ‘되도록 높은 차원의 질서’에 보다 가까이 가는 길이다. (「수성獸性의 옹호」, 191~93쪽)
1부 문학에 관한 성찰
이야기는 영원하다
아름다운 글을 찾아서—젊은이들을 위한 글쓰기 강좌
한 작가의 눈에 비친 민족문학 논쟁
지식으로서의 문학
제2부 작가에 대한 성찰
전체주의 사회에 예술이 존재할 수 있는가?
혼돈과 질서 사이에서
문학의 진화와 확산
언어는 진화해야 한다
언어 시장의 자유화
세계성 시대의 한국 문학
예술가는 기업가다
누구를 위해 쓸 것인가
왜 사람들은 소설을 읽지 않는가
신춘문예 제도의 효율
베스트셀러의 경제학
수성獸性의 옹호
제3부 작품들에 대한 생각
이정표가 되기를 바라면서
문학작품의 노후화
너른 대륙으로 가는 차표
압제적 세계에서 길을 찾는 사람들
좋은 편집자들이 드문 세상에서 소설 쓰기
견딜 만한 지옥의 지도—백민석의 『16믿거나말거나박물지』에 대한 해설
글을 마치며
미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