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 정신분석의 임상적 쟁점들과 그 사상사적 의의를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리비돌로지—라캉 정신분석의 쟁점들』(맹정현 지음)이 문학과지성사에서 ‘현대의 지성’ 시리즈로 출간되었다. 그동안 국내에서 라캉 정신분석은 문학 이론, 철학, 정치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활발하게 수용되었으며, 이를 직접적으로 다룬 연구들 또한 수없이 소개되었다. 이처럼 라캉 정신분석의 수용 및 언급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음에도 불구하고, 라캉 정신분석에 관한 연구서들이나 번역서들이 대부분 개론적인 수준에 머물러왔던 것도 사실. 라캉의 원저인 ‘세미나’ 시리즈가 출간되기 시작한 것이나 라캉 자체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라캉 정신분석을 정신분석 이외의 사상사적인 맥락이나 문화 비평사적인 맥락, 혹은 개론적인 틀에서 접근하기보다는 라캉의 원문에 입각해 그것이 원래 출발했던 ‘임상적인 맥락’으로 되돌아가 정신분석의 장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현안들을 본격적으로 소개하고, 그것이 사상사적으로 어떤 의의를 갖는지를 써내려간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욕망의 원인이자 충동의 대상인 ‘대상 a’가 정신병리학과 메타심리학의 수준에서 어떻게 쟁점화되는지, 그리고 그것이 윤리적·정치적 맥락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게 되는지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철학, 문예 이론, 문학 비평적 접근에 한정되어 있는 국내 라캉 연구의 진전!
라캉 정신분석의 ‘임상적 쟁점’들과 그 사상사적 의의를 말하다
이렇듯 『리비돌로지—라캉 정신분석의 쟁점들』은 라캉 정신분석의 임상적 쟁점들을 소개함으로써 인간이 주체로서 욕망하고 행동하는 무의식의 장을 기록하고자 한다. 젊은 소장학자이자 라캉 정신분석 연구에 한길을 매진해온 저자 맹정현의 첫 저작이기도 한 이 책은, 그동안의 연구들을 묶어 펴낸 심도 깊은 결과물이다. 저자 맹정현은 지난 2008년 국내에 처음 소개된 라캉의 『세미나 11권: 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 개념』을 우리말로 옮겨 탁월한 번역 능력과 학자로서의 성실함, 무엇보다도 라캉 정신분석에 대한 전문가적인 식견을 이미 인정받은 바 있다. 덧붙여 라캉 ‘세미나’ 시리즈의 편집자이자 라캉의 사위이며 라캉 저작물의 모든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는 자크-알랭 밀레(파리 8대학 정신분석학과 학장)의 제자라는 점도 흥미로운 사실.
이처럼 저자는 전문가적인 식견과 면밀한 텍스트 분석력으로 라캉 정신분석의 쟁점들을 독자들 앞에 스스럼없이 풀어놓는다. 무엇보다 이 책의 장점은 ‘지극히 난해하다’고 알려진 라캉의 텍스트를 한국의 독자들에게 우리말로 소개함에 있어 저자의 정신분석에 대한 탁월한 이해와 흥미로운 논리 전개가 돋보인다는 점.
이렇게 저자가 라캉의 원문에 입각해 그것이 원래 출발했던 ‘임상적인 맥락’으로 되돌아가 정신분석의 장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현안들을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까닭은, 우선 “정신분석 이론 자체가 추상적인 개념들의 장이라는 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분석 이론은 사변적인 성찰로부터 도출된 것이 아니라 분석 실천 속에서 발생하는 구체적인 사안들을 해결하기 위해 요청된 것”이기 때문. 또한 앞서도 밝혔듯 국내의 라캉 연구가 드문 예를 제외하곤 ‘임상의 장’으로까지 진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을 국내 독자들에게 소개하고자 하는 것이다.
리비돌로지—언어를 먹는 존재들의 성과 욕망, 죽음의 지형도
20세기 초 프로이트는 인간이 자신의 삶 속에서 세계와 맺는 관계를 그 근원으로부터 재구성하기 위한 독특한 장치를 고안하고 그것에 ‘정신분석’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렇듯 프로이트가 의식의 배후에서 ‘무의식’이라는 검은 대륙을 발견한 최초의 탐험가였다면, 일찍이 “프로이트로의 회귀”를 주창한 20세기 후반의 라캉은 이 첫번째 탐험가의 고난 어린 발굴의 흔적들로 거슬러 올라가 무의식에 대한 과학적 이해의 길을 열고 인간의 성이 갖는 다양한 함의를 추적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성적인 존재이며 그러한 성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주체화하면서 살아간다. 인간이 성적 주체로서 자신을 실현한다는 것은 그가 성욕의 장에서 자신의 대상을 구성하고, 그 대상과의 관계를 통해 삶의 고유한 원리를 형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신분석이 이 점을 중요하게 고려하는 이유는 그렇게 성적 실천의 장에서 구성되는 대상이 궁극적으로는 인간 활동의 모든 장의 대상들을 추동하는 원인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라캉은 그러한 원인의 위치에 있는 비표상적 대상을 ‘대상 a’라 불렀다. 그는 인간에게서 떨어져 나온 신체의 일부가 어떻게 다른 모든 대상을 유인하고 결정하는 특권적인 대상을 구성하는지를 규명하고자 했다. ‘말하기’ ‘보기’와 같은 인간 행위는 ‘의사소통’이나 ‘지각’의 기능만을 갖는 것이 아니다.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말과 시선은 우리 몸에서 떨어져 나가 그 자체로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일종의 배설물과 유사하다. 그리고 그렇게 잘려나간 내면으로부터, 외부로 척출된 어떤 상실된 대상을 향해 뻗어나가는 리비도의 벡터가 작동한다. 시선, 목소리, 똥과 같은 배설된 내적인 대상들은 타자의 욕망과의 관계 속에서 리비도적 공간을 구성하고 그것을 떠받치는 주축이 된다.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충동의 대상들은 말의 편린들에 실리거나 이미지의 옷을 입고 나타나 나르시시즘, 욕망, 주이상스로 구성된 리비도의 장을 활성화한다. 우리가 읽게 될 글들은 바로 이 ‘대상’이란 측면에서 접근한 인간 정신의 지형도, 전부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분명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게 될 지형도이다. 우리는 그러한 지형도를 ‘리비돌로지’라고 부른다.
이 책은 이러한 지형도를 세 가지 측면에서 그리고 있다. 모두 3부로 구성된 이 책의 제1부 ‘대상의 병리학’은 리비도적 대상, 충동의 대상이 인간 정신의 병리성을 만들어내는 양상을 살펴보기 위한 장이다. 여기서는 대상 a의 병리적 작동 방식을 환각, 망상, 행위, 정동이라는 측면에서 확인한다. 제2부 ‘대상의 논리학’은 병리학으로 들어가는 데 필요한 이론적 전제들에 대한 논의로 대상 a에 대한 메타심리학적 접근을 담고 있다. 여기서는 정신분석의 핵심 개념인 욕망, 전이, 성욕이 라캉의 대상 a라는 개념틀 속에서 어떻게 재구성되는지를 살펴본다. 제3부 ‘대상의 윤리학’은 이렇게 리비도적 장의 대상을 전면에 배치하는 것이 어떠한 윤리적․정치적 함의를 담고 있는지를 검토한다. 이 글에서는 정신분석의 담화가 어떤 지점에서 전통적인 형태의 담화들을 극복하고 가치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 책 속으로
환청의 주된 내용이 욕설인 것은 그것이 주체를 고정시키는 데 S2를 필요로 하지 않는 예외적인 어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수한 어휘를 가지고 자신을 소개할 수 있다. 가령 나는 학교에선 ‘선생님’이고 집에선 ‘가장’이며 조기축구회에선 ‘골키퍼’이다. 이렇듯 무수한 명사와 수식어들로 나 자신을 지칭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나 자신의 존재가 그것들로 환원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상징적으로 주어진 정체성의 이면에는 근원적 소외가 자리 잡고 있으며, 이는 무엇보다 정체성(‘나’)과 존재(‘이다’)가 분열되어 있다는 데서 비롯된다. 물론 이러한 분열은 역으로, 자신이 원치 않는 호칭에 의해 지칭될 때 그것을 견딜 수 있는 버팀목이 되기도 하는데, 왜냐하면 ‘존재’가 ‘정체성’ 저편에 자리 잡고 있는 이상 우리는 그러한 ‘정체성’이 단지 허위(상블랑)에 불과한 것이라며 자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위에는 한계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을 향한 욕설을 듣는 경우이다. 왜 우리는 누군가가 우리를 향해 던진 욕설을 견딜 수 없는 것일까? 왜 그것이 한낱 허구일 뿐이라며 웃어넘길 수 없는 것일까? 그것은 욕설이란 ‘외관’이 아닌 ‘존재’를 겨냥하는 특권적 시니피앙이기 때문이다. 욕설은 ‘정체성’과 ‘존재’의 분열을 봉합하는 예외적인 지점이다. 바로 이것이 라캉이 “욕설은 말의 행위의 최고봉 중 하나”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제1부 제1장 「환청의 논리학」, 25~26쪽)
정신병자를 설득하는 것은 어렵다. 설득이란 납득하기 어려운 어떤 시니피앙을 납득할 만한 이유로 기능할 수 있는 또 다른 시니피앙과 연동시키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타자에 의해 설득된다는 것은 지식이 타자에게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러한 전제는 시니피앙이 자기 자신을 대표할 수 없다는 것,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은 자신의 궁극적인 원인이 될 수 없다는 데서 비롯된다. 물론 지식이 타자에게 있다고 가정하기 위해 반드시 주체가 자신의 무지를 스스로 깨달을 필요는 없다. 신경증자라면, 누군가가 그 앞에 하나의 시니피앙을 던져놓는 것만으로 충분히 의미에 대한 ‘갈망’을 느끼게 될 것이며, 곧바로 그 의미를 제시해줄 수 있는 또 다른 시니피앙을 가정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정신병자에게 결여된 것은 바로 이러한 ‘유혹의 놀이’이다. 심지어 그에게는 그런 식으로 던져진 시니피앙이 ‘유혹’이 아닌 ‘박해’의 징조가 될 수 있다. (제1부 제2장 「망상적 전이와 광인의 비서」, 47쪽)
그렇다면 불안과 우울은 어떻게 다른가? 이 둘은 욕망의 소멸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언뜻 유사한 위치를 점유하는 듯 보인다. 가령 우울의 주된 특징은 단순히 어떤 상실감이 아니라 그러한 상실감을 보상할 만한 욕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욕망의 원인이 더 이상 욕망의 원인으로 기능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울증자는 식욕을 잃듯이 삶의 욕망을 잃는다. 이처럼 욕망의 원인이 작동하기를 멈추는 것이 우울의 특징이라면, 불안은 욕망의 원인이 되는 대상의 근접을 알리는 신호라는 점에서 우울과 다르다. 즉 대상의 과도한 근접은 주이상스가 욕망을 초과하며 상실의 공간이 사라진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욕망이 사라질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경고이지만, 또한 장차 욕망의 도래를 알리는 지표로도 읽힐 수 있다. 왜냐하면 불안은 실재의 근접을 미리 알리며 주체로 하여금 숨 쉴 수 있는 공간, 상실의 공간을 찾을 수 있도록 안내하는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불안과 우울은 시간과 관련해서도 다른 양상을 보인다. 불안은 앞으로 도래하는 것에 대한 신호, ‘나쁜 만남’에 대한 예기라 할 수 있다. 물론 지나간 경험의 재활성화에 의해서도 불안이 발생할 수 있다. 과거의 불쾌한 경험이 되살아나 불안을 일으키는 것이다. 하지만 이때의 과거는 아직 주체화되지 않은 어떤 실재를 담고 있기에 완료되지 않은 과거이다. 과거이지만 앞에서 도래하는 과거란 점에서 늘 새로운 〔미래와 다르지 않은〕 과거이다.
이는 우울과 정반대의 시간적 질서에 속한다. 우울을 앓는 사람은 상실의 경험에 슬퍼한다. 우울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겪은 상실, 혹은 겪게 될 상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러한 상실은 과거의 경험일 수도 있고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상실, 즉 앞으로 다가올 상실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울을 앓는 사람은 그러한 상실의 경험을 이미 ‘완료된’ 것으로 체험한다. 그러한 상실이 앞으로 발생할지도 모르는 미래의 가능성일지라도 그것은 이미 결정된 미래, 완료된 미래일 뿐이다. 이미 상실된 것이 미래의 의미를 결정하기에, 이때 미래는 과거의 한 끄트머리와 다르지 않다. (제1부 제3장 「불안의 리비돌로지」, 76~77쪽)
하지만 더 이상 자본주의의 문제는 경계선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경계선은 와해되고 무의미해지고 있다. 극단적 형태의 자본의 병리성은 배제, 살해, 폭력에 기초한 희생의 논리가 아니라 주체 스스로 그 병리성을 떠맡는 ‘순교’의 논리이다. 이제 유대인이나 광인 등과 같이 ‘낙인찍힌’ 모호한 예외가 아닌 구성원들 각각이 조금씩 나누어 갖는 선택된 병리성이 문제인 것이다. 각자가 자본의 희생자를 자처하고 그 병리성을 체현함으로써 사회의 죄를 씻고 그것의 일관된 내부를 구성하는 것, 바로 여기에 현대의 막다른 골목이 자리 잡고 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현대의 우울증에 주목해야 한다면, 이는 그것이 이 순교의 논리를 더없이 순수한 형태로 구현한다는 데 있다. 우울증은 ‘예외성’을 각인하는 사회의 낙인으로 기능하기보다는, 오히려 시대에 대한 주체의 응답으로서의 무의식적 선택이다. 자본의 논리에 의해 잉태된 현대의 아포리아를 우울증자는 욕망의 아포리아라는 형태로 응축해낸다. 우울증자가 보이는 리비도의 출혈과 죽음에 대한 편향성은 개인적 특이성으로 국한되지 않고, 과잉의 문명에 대한 어떤 윤리를 전제로 한 선택이다. 우리는 이런 맥락에서 우울이 “영혼의 상태”라기보다는 오히려 “도덕적 죄악”에 가깝다는 라캉의 진술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따르면 우울은 자신의 욕망에 대해 양보했다는 데서 비롯된 죄악, 대상의 상실을 리비도적 경제 속에 기록해내는 무의식적 긍정을 포기했다는 데서 비롯된 죄악이다. (제1부 제5장 「자본의 순교자—현대성의 우울증적 기원」, 133~34쪽)
주체가 상대에게 바라는 지식은 그 어떤 현실적 앎으로도 축소될 수 없는 지식이다. 따라서 주체가 그 지식을 통해 겨냥하는 것은 바로 상대가 가지고 있지 않은 무엇이다. 요컨대 그는 타자의 결핍을 겨냥한다. 사랑을 통해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상대가 주기를 바라지만, 그러면서 결국 상대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겨냥하는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상대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 바로 그것이 ‘되기’를 원한다. 상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기 위해선 먼저 상대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사랑은 또한 타자의 결핍에 대한 요구이며, 따라서 그가 가정하는 지식에 대한 사랑은 타자의 장소가 아닌 타자의 빈 곳, 다시 말해 타자의 공백을 겨냥할 수밖에 없다. (제2부 제1장 「전이의 연금술과 정신분석가의 욕망」, 147쪽)
우리를 둘러싼 현실 속에서 성욕은 비지식의 공간을 점유한다. 성욕이 비지식의 공간을 점유한다는 것은 그것이 주체에게 무엇보다 트라우마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과 관련된다. 〔……〕 성적 발달에 대한 프랑수아즈 돌토의 질의에 답변하면서 라캉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성욕을 도입하는 교접 행위는 트라우마를 일으킨다. 바로 여기에 커다란 흠집이 있다.” 여기서 ‘흠집’이란 성욕이 인간의 사유에 남긴 상처, 문신을 말한다. 성욕과의 대면은 표상의 체계에 프로그램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우연한 만남이다. 우연한 만남은 그 무엇으로도 통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표상의 프로그램을 교란시키는 과잉이다. 그리고 이 과잉에 의해 초래된 교란, 그것이 트라우마다.
따라서 성욕과의 만남이란 언제나 “잘못된 만남”이며, “중심의 잘못된 만남은 성적인 수준에 있다.” 성욕과의 만남을 ‘잘못된 만남’이라 표현한 것은 그것이 예견된 만남이나 적절한 만남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욕은 약속 장소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성욕은 사유가 기대하는 곳에서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허약한 틈새를 뚫고 나타나 사유의 밖에서 장막을 찢고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만든다. 정신분석이 이런 관점을 고수하는 한 그것은 결코 범성욕주의pansexualisme로 환원될 수 없다. 정신분석은 모든 것을 성욕으로 귀착시키는 성 기술이 아니다. 성욕이 사유의 바깥에서 사유에 구멍을 낸다면 정신분석은 그러한 흔적을 더듬어 그러한 구멍을 주체화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제2부 제4장 「성욕과 욕망의 변증법」, 225~26쪽)
주체가 사라진 시대, 시선이 사라진 시대, 그렇다면 그 이후의 가능성은 무엇일까? 사라짐이 사라지고 끝이 끝장날 때, 더 이상 무엇이 사라질 수 있을까? 이러한 물음은 몰락과 황혼의 징표가 아니다. 물음은 니힐리즘을 견뎌낼 수 있는 버팀목이 된다. 그러한 사라짐을 탈근대적 자폐증이라는 임상적 범주로 진단할 수 있다면 이는 그것이 주체성의 한 가지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체의 봉쇄, 주체성의 종언으로만 치부될 수 없다. 그것은 자신을 향해 문을 굳게 걸어 잠근 새로운 유형의 주체일 뿐이다. 탈근대적 자폐증은 이 세계의 출구 없음, 그 밀폐성을 보여주는 사회적·병리적 현상으로 한정될 수 없다. 그것은 주체를 짓누르는 시대의 운명이 아니라 그러한 짓누름에 대한 주체의 선택 가운데 한 가지일 뿐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주체가 자신에게 명하는 내부로부터의 유형流刑이다. 따라서 그러한 자폐증으로부터의 탈출은—타자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다른 세상으로 바꾸는 것은—존재하지도 않는 타자를 찾아 다시 길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 타자의 부재를 짊어진 주체의 위치를 바꾸는 일이다. 요컨대 주체성의 구조를, 그 배형을 바꾸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러한 변화의 가능성을 미리부터 속단할 수는 없다. 세계의 운명은 주체의 운명과 동일시될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시대의 운명을 정확히 자리매김하고 그것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주체가 소멸된, 시선이 폐제된 탈근대를 여러 주체적 입장들 속에 다시 담아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라캉의 정신분석학이 들려준, 탈근대적 담화들의 울창한 숲을 건널 수 있는 지혜이며 우리가 라캉의 담화에 닻을 내리는 이유이다. (제2부 제5장 「시선의 패러다임—푸코, 보드리야르, 라캉」, 282~83쪽)
몽상가가 아닌 임상가로서의 라캉의 시선은 철저하게 낮게 비행한다. 신경증자의 시선을 따라 그의 눈에 비친 세계의 구조를 탐색하는 동시에 그 현실성의 한계를 간과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너머에 자리 잡고 있는 실재의 경계선을 더듬는다. 신경증자가 머뭇거리면서 선택했을 바로 그 실재의 언저리를 더듬으면서 그에게 또 다른 선택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의 병리성은 그것이 ‘비판’이라는 초월적 시선에 의해 허구적인 것이라고 폭로된다고 해서 말소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병리성은 좀더 단단한 껍질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병리성을 지탱하는 믿음과 신앙은 맹목적인 귀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누군가가 그 믿음과 신앙의 일부가 되어주지 않는다면, 그 맹목적인 귀는 다시는 열리지 않을 것이다. 바로 여기에 라캉의 출구가 있다. 우리는 바로 이 출구로부터 시작해 역으로 입구 쪽으로 다시 들어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제3부 제4장 「전이의 정치학」, 353쪽)
책머리에
제1부 대상의 병리학
제1장 환청의 논리학
제2장 망상적 전이와 광인의 비서
제3장 불안의 리비돌로지
제4장 욕망의 극장—돌발 행위의 위상학
제5장 자본의 순교자—현대성의 우울증적 기원
제2부 대상의 논리학
제1장 전이의 연금술과 정신분석가의 욕망
제2장 새들의 사유와 제욱시스의 욕망—라캉의 회화론
제3장 프로이트로의 회귀—포르트-다에 대한 세 가지 독법
제4장 성욕과 욕망의 변증법
제5장 시선의 패러다임—푸코, 보드리야르, 라캉
제3부 대상의 윤리학
제1장 전복을 위한 몇 가지 연산
제2장 칸트와 정신분석의 윤리
제3장 차이의 정치학—정신분석이냐 분열분석이냐 1
제4장 전이의 정치학—정신분석이냐 분열분석이냐 2
제5장 탈오이디푸스로서의 정신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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