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

김이설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10년 3월 11일 | ISBN 9788932020334

사양 양장 · · 284쪽 | 가격 10,000원

책소개

단단한 문장, 적절한 여백으로 환기되는 참혹한 일상,

그 들끓는 얼룩과 폭력, 고통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신예 김이설 첫 소설집

 

“나는 가만히 누워 다리를 뻗었다. 발끝이 벽에 닿았다.

세상은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자연히 알게 되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열세 살」(p.16) 중에서

 

200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열세 살」이 당선되어 등단한 이후, 첫 장편 『나쁜 피』를 2009년 동인문학상 최종심 후보작 4편에 올리며 선배 작가 김경욱, 박성원, 이현수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등 크게 주목받아온 신예 김이설이 첫 소설집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문학과지성사, 2010)을 출간했다.

 

폭력과 고통, 불륜과 불행으로 일그러진 날것의 삶

지하철 노숙자 신세로 살아가는 열세 살 어린 소녀의 시점으로 처참하고 궁핍한 우리 사회의 밑바닥 현실을 묘파한 그의 등단작 「열세 살」은, 소제와 주제, 구성과 문체의 균형미를 고루 갖추며 그야말로 2006년 새해 벽두의 독자들에게 강렬한 인상과 서늘한 충격을 안기기에 충분했다. 이어 발표한 작품들에서 김이설은 한결같이 폭력과 고통으로 점철된 극단적 삶,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 싶은, 그래서 ‘아무도 입 밖으로 내어 말하고 싶지 않은’ 비리고 습한 어둠을 집요하게 응시하며 비의지적 인물들이 도덕적으로 타락해가는 모습을 핍진하게 그려내 왔다.

친모에게서 버림받고 고속도로 갓길에서 만난 트럭 운전사를 아빠라 부르며 그의 아이를 낳는 소녀(「순애보」), 사고로 아이와 남편을 잃은 후 죽은 남편의 형과 동거하며 성폭력과 가학의 세계에 내몰리는 여인(「오늘처럼 고요히」), 수술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처지로 이혼을 결심한 찰나 친모의 자궁암 판정과 죽음까지 목도하는 여자(「환상통」), 빚 때문에 가족들과 뿔뿔이 흩어져 살며 대리모로 생을 이어가는 여대생(「엄마들」) 등 이번 소설집에 묶인 8편의 단편들은 “나의 기원이자 벗어날 수 없는 근원”인 ‘가정’이 와해되면서 개인의 삶이 뿌리째 뒤흔들리는 무겁고 어두운 시간들을 담고 있다.

동세대 젊은 작가들의 작품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최신 유행이나 담론, 폐쇄적 인물의 불안정한 내면이나 관념적이고 감각적인 문체와는 거리가 먼 김이설의 소설은 그렇게, 자의든 타의든 삶의 벼랑 끝에 내몰려 인간 윤리까지 말소당한 듯한 인물들을 ‘자조’와 ‘침묵’이 틈입하는 간결한 문장으로 재현함으로써 바로 우리가 눈감고 싶은 불편한 현실에 직면하게 한다. 문학평론가 김나영의 정치한 분석처럼, 그의 소설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괜찮아”와 “공평하다고 생각했다”라는 두 문장은 “고통스러워하는 타인과 연계된 자신의 삶에 은닉된 고통을 환기”하고 “언제든 사람들이 자신의 불행을 감각할 때에는 타인의 불행을 전제”하고 있음을 함축하는 중요한 의미 요소이자 무거운 주제를 무겁지만은 않게 그려내는 데 주효한 형식 요소이기도 하다.

 

벼랑 끝 삶에서 다시금 잉태되는 생의 의지

이렇듯 폭력과 고통에 휘둘리는 개인의 끝없는 불행 속에서 결국 작가 김이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육체의 고통을 견뎌내면서라도 다만 살아야 한다,라는 무조건적인 생의 의지이다. 한 예로 수록작 「오늘처럼 고요히」의 여자는 자신과 나이 어린 혜경을 유린한 병운을 제거한 후 미역국을 끓여 먹으며 그렇게 또 삶을 이어가고, 「엄마들」의 화자인 대리모 여인은 낳아놓고도 제대로 젖 한번 물리지 못할 아기를 위해 사골국을 남김없이 마시며, 「막」의 주인공은 피폐한 현실 속에서도 자신의 존재 의미를 확인하기 위해 실패를 무릅쓰고 계속해서 ‘오디션’에 도전한다. 가슴으로 전해지는 통증이나 이성을 마비시킬 정도로 육체에 가해지는 타인의 폭력, 병이나 수술칼로 도려내지는 물리적 고통은 등장인물들의 침묵의 공감 속에서, 침묵으로 타인과 공유하게 되는 비밀을 통해서 상쇄되고 다시 생으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 김이설의 소설에서 삶은 곧 “몸이 겪어내는 기억, 혹은 시간의 궤적”이다. 때문에 “개인들의 사소한 체험들은 추상적인 삶의 비의를 암시하는 구체적인 사실 그 자체로 기능”하며, 그리하여 자기위안과 자기처벌을 유발하는 타인들의 삶은 곧 ‘나’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으로 기능한다(김나영, pp.278~80). 그야말로 “살아 있으면 어떻게든 살게 돼 있”(p.43.)는 것이 삶인 것이다.

 

여러 삶들의 연쇄를 낳는 가족, 그 낱낱의 해부

한편 이번 소설집에 수록된 8편 모두 혈연이든 필요에 의해서든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나의 불행이 단지 나 개인에게서만이 아니라 내가 속한 가장 기본적인 혈연공동체인 가족에서 비롯되며 나아가 내가 관계 맺는 타인과의 삶 속에 그 씨앗이 근거하기에, 와해와 재구축을 반복하는 가족은 선택 불가결한 소재일 수밖에 없는 탓이다. 문학평론가 김나영은 해설에서 “삶의 ‘악무한’을 초래하는 힘의 환유로서 가정은 너무도 손쉽게 와해되고 다시금 더 온건히 구축되어 개인을 구속한다. […] 김이설의 소설은 그렇게 기존의 소설에서 이미 발가벗겨진 가정의 맨몸을 한 번 더 공격한다”(pp.258~59)고 분석한다. 그리고 “삶은 고통스럽고 그 이유는 나의 삶이 남의 삶과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이 가정이 김이설의 소설들을 관통하면서, “모든 개별적인 삶이 오직 개인의 것만은 아니라는 표층에서부터, 소란스러운 한 생의 진원(가족)으로, 개인의 삶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삶의 심층(가족)까지 파고”(p.258)든다고 말한다. 더불어 “병들고 찌든 삶의 단면들에 대한 우리의 거부 반응은 오히려 그에 대한 모종의 공유과 공감”(p.257)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힘주어 말한다.

 

문득, 소설 속 인물들의 운명에 대해서 생각했다. 비로소 그들에게 미안하다.

그들을 위해 오늘 밤도 깨어 소설을 쓴다.

―「작가의 말」에서

 

감히 단언하건대, 김이설은 미적 전위나 형식적 완결의 성취를 포기하면서도 날것 그대로의 삶을 파고들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김이설의 소설을 관통하고 있는 하나의 가정(假定)이 있다면, ‘삶은 고통스럽고 그 이유는 나의 삶이 남의 삶과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단순하고도 예리한 가정은 모든 개별적인 삶이 오직 개인의 것만은 아니라는 표층에서부터, 소란스러운 한 생의 진원으로, 개인의 삶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삶의 심층까지를 파고든다.

―김나영(문학평론가), 해설 「전전반측, 반전의 윤리」에서

 

김이설의 「열세 살」은 적절한 생략과 여백의 환기력을 시사하는 리듬 있는 단문들로 펼쳐놓고 있다. 고통스럽고 비극적인 이야기임에도 눅진하지 않게, 아니 오히려 경쾌하게 풀어나간다. 동시대의 사회적 문화적 풍토 속에서 볼 때, 노숙자들의 삶에 밀착하여 양극화가 심화된 오늘의 사회 경제적 생태를 실감 있게 환기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오늘의 많은 작가들이 사회적 상상력에서 자유롭게 이륙하여 내적 몽상과 판타지의 세계로 단독자적인 탈주를 보이는 경향이 두르러진 상황에서 기본적인 재현의 진실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측면은 작품의 평면적 진실에 지나지 않는다. 13세 소녀의 희망 없는 삶의 나날과 타락, 혹은 정처 없음의 확인, 이런 것들이야말로 꿈을 잃고 희망의 지렛대를 놓친 시대의 핵심적인 증후가 아니겠는가. 더구나 무거운 주제를 결코 무겁지 않게 이야기하면서 반성적 자의식을 유도하는 담론의 독자성 또한 어지간하다.

―우찬제(문학평론가), 김이설론― 「허망한 희망의 역설」(『문학과사회』 2006년 봄호)에서

 

 

본문 속으로

 

「열세 살」

열세 살 소녀 ‘나’는 아빠가 죽고 엄마와 단 둘이 지하철 역사 노숙자로 지내고 있다. 어느 날 다른 노숙자들과는 어딘지 모르게 구별되는 ‘흰얼굴’을 따라 쪽방촌에 들어가고 엄마와의 약속인 침묵을 어긴 채 그가 이끄는 대로 몸을 허락한다. 점점 자신의 배가 불러오자 엄마에게 고백하려 하지만, 지하철 계단참에 앉아 구걸을 하다 쫓겨나는 엄마를 보고 돌아선다. 아이와 자신의 아빠가 되어달라고 ‘흰얼굴’에게 매달려보지만 결국엔 혼자 미혼모 시설에 들어가 아이를 낳고 다시 거리로 나온다. 시설에서 지내는 동안 우연히 집어든 잡지에서 ‘흰얼굴’이 기사로 쓴 자신과 엄마의 사진과 이야기를 발견하고서야 ‘흰얼굴’이 나의 아빠도 왕자도 될 수 없는 이유를 깨닫는다.

“나는 가만히 누워 다리를 뻗었다. 발끝이 벽에 닿았다. 세상은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자연히 알게 되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나는 앞으로 나에게 벌어질 일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 (p.16)

“발갛게 살이 부어오르도록 때를 벗겨냈다. 엄마의 몸은 여기저기 멍 자국투성이였지만 나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찜질방에서 자는 날은 마치 천국에서 보내는 하룻밤 같았다. 푹신한 바닥, 공기 속에 맴돌고 있는 비누 냄새. 모두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으므로 누구도 나와 엄마를 쳐다보지 않는 것도 좋았다.” (p.31)

 

「엄마들」

L대 법대생인 ‘나’는 아빠의 빚으로 뿔뿔이 흩어져 살아가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대리모’를 전전하고 있다. 메일로 찾은 의뢰인의 요구에 따라 새 원룸으로 옮겨 정기적으로 의뢰인의 감시나 다름없는 보살핌 속에 산달을 채우며 받은 생활비와 착상 사례금, 계약금 등은 고스란히 목욕탕에서 때를 벗기는 엄마와 갓 제대한 남동생에게로 보내진다. 의뢰인 여자는 남편과는 법적 부부 관계만을 유지한 채 외도 중이다. 산후조리원의 보름을 채우고 아이를 보낸 후 아이 입에 물리지도 못한 젖으로 옷을 적시며 ‘나’는 또다시 대리모 의뢰인을 구하러 나선다.

“일 년만 숨어 살면 목돈을 쥐는 일이었다. 합법적이지 않다는 건 중요하지 않다. 빚을 지지 않고, 도망칠 수 없는 나라에 빠지는 위험 없이 오천만 원을 벌 수 있는 일이란 대리모 외에는 없었다. 할 수 만 있다면 열 번도 더 할 수 있는 일이었다.” (p.41)

“살아 있으면 어떻게든 살게 돼 있다. 가족이 와해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혈연이라는 것이 이렇게 허술한 구조였던가, 의아해할 사이도 없었다. 증오나 분노, 체념마저도 흐물거리는 미역처럼 빠르게 삭여졌다.” (pp.43~44)

‘여자가 낄낄거렸다. 사랑이 뭐 대수니? 그치? 여자가 허리를 젖히며 자지러지게 웃어댔다. 나는 그를 떠올렸지만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육 년을 만났던 남자의 얼굴이 헤어진 지 반년 만에 새하얗게 지워져 있었다. 다행히, 사랑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괜찮아. 또 시작하면 돼. 그럼, 괜찮아, 괜찮아.”’(p.53)

“상대의 반응을 고려하지 않는 독백은 처연하다. 발산할 수 없는 나의 감정도 황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무심해져야 했다. 언짢은 기분마저 무의미해야 된다. 나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pp.54~55)

 

「순애보」

바람난 친엄마로부터 고속도로 휴게소에 버려진 소녀는 그 고속도로 갓길에서 만난 트럭 운전사를 아빠라 부르며 한동안 트럭에서 생활하다가 그와 함께 꿩 농장을 차려 지낸다. 그리고 아빠의 아이를 밴 채로 틈만 나면 갓길에 나가 트럭의 사내들에게 몸을 맡긴 채 항구로 나가려 한다. 허드렛일을 할 셈으로 사육장에 들인 청년 치우가 그녀에게 맘을 호소하지만, 밤이면 갓길로 나가 도로를 헤매고 아무 트럭에 몸을 싣는 일은 좀체 잦아들지 않는다. 아이는 낳을 무렵 아빠는 그녀에게 떠나라고 하지만 그녀는 그에게 칼을 들이댄다.

“내가 처음 죽인 건 몸집이 작은 까투리였다. 죽지를 움켜쥐며 일부러 엄마를 떠올렸다. 나는 의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 잘린 머리가 튀어 올라 마당에 툭 떨어졌다. 피식, 웃음이 났다. 잊겠다고 잊히는가. 그래서 나는 엄마를 용서하기로 했다.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까. 나는 더 이상 떠돌이가 아니니까, 아빠도 있으니까. 무엇보다도 나는 슬프지 않았다. 그러면 됐다.”(p.87)

 

「환상통」

결혼 후 아기를 가져보기도 전에 자궁경부암 3기 판정을 받은 나는 결국 자궁 척출을 하고 남편에게도 이혼을 통보한다. 설상가상으로 엄마 역시 자궁암 말기 판정을 받고 지난 3년 동안 자신이 치러낸 항암치료와 수술을 거듭하기 위해 퇴원 직후 입원이라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에 부닥친다.

“몸으로 기억된 고통은 완전히 잊을 수가 없다. 그러니 나는 괴롭다고, 정말 힘들다고 말했어야 옳지 않았을까. 이제 시작이니 힘내라는 말보다 시작으로 끝날 수도 있다는 것을 미리 알려줘야 하지 않았을까.” (p.104)

“암에 걸린 것도 억울한 일은 아니었다. 누구라도 걸릴 수 있는 병이니까. 나는 그저 무수한 암 환자 중에 한 명일 뿐이었다. 내 평생에 아이가 없는 것도 불운일 뿐, 억울한 일은 아니라고 여겼다. 아니, 그렇게 자위해야 했다.” (pp.105~06)

 

「오늘처럼 고요히」

형편이 어려워진 나는 혜경 엄마의 주선으로 어린 아이를 남겨둔 채 남편 몰래 노래방도우미 일을 시작한다. 그러나 불의의 화재로 하루아침에 아이와 남편을 잃고 남은 빚을 갚아준 남편의 형 병운과 협진상가의 식육점에서 동거에 들어간다. 어느 날 혜경 엄마가 다시 찾아와 재혼한 남편을 도저히 참을 수 없다며 대신 어린 혜경을 맡아달라고 한다. 혜경 엄마가 자살하던 날 말이 없고 어딘지 음습한 혜경을 데려와 거두지만 그런 혜경과 나를 병운은 거리낌 없이 오고 간다.

“오래전 혜경 엄마는 나의 좋은 이웃이었다. 훌륭한 친구였으며 기꺼이 산파가 되기도 했다. 어느 오래전에는 나를 노래방으로 이끌기도 했으며, 가지 말아야 할 곳으로 가는 나를 말리지 않은 사람이기도 했다. 혜경 엄마나 나를 만류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래도 나는 혜경 엄마를 원망했다. 끊임없이 혜경 엄마가 불행해지기를 바랐다. 그래야 공평하다고 생각했다.” (pp.143~44)

 

「손」

백수인 남자는 매형의 해외 파견으로 인해 비워진 누나의 아파트에 살고 있다. 그는 컴퓨터 모니터를 켜고 메일을 확인하고 기사 검색을 하거나 다운 받은 영화를 보고 온라인 게임을 즐기며 필요한 생필품 역시 온라인 주문으로 해결하는 등 좀체 외출을 하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우유 투입구로 드나드는 소리와 손을 의식하면서부터 그의 일상에 틈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나는 맨발로 문밖으로 나갔다. 사진 묶음은 없었다. 나는 문을 닫았다. 복도의 센서 등이 곧 꺼졌다. 나는 어둠과 정적 속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늘 안에만 있던 내가 바깥에 있었다. 내가 손이 되는 것이었다.”(p.180)

 

「막」

서른다섯의 나는 지방 소극단 출신의 단역배우로 오디션과 접대 알바를 전전하고 있다. 혈육이라고는 가난과 아들의 폭력을 못 견뎌 재가한 엄마와 집 나간 아버지를 신용불량자로 만들고 칠순 노인 할머니의 열댓 평 집까지 팔아넘긴 오빠가 있을 뿐이다. 같은 극단 스텝인 일곱 살 연하의 정국과 오디션과 배역을 빌미로 사사롭게 관계를 요구하고 또 알선하는 김 팀장의 사이에서 그녀의 일상은 핍진하기 이를 데 없다. 또다시 오빠의 행패로 경찰서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나간 자리에 재가한 엄마의 딸, 그녀의 이복동생과 마주하게 된다.

“끊임없이 오디션을 찾아다니는 건 내가 제대로 살기 위해 애쓴다는 자위였다. 떨어진 것이 뻔한데도 전화기를 손에서 놓지 못했다. 결국 전화를 걸어 내 이름이 없다는 걸 확인한 뒤에야, 다음 오디션에 집중할 수 있었다. 실패도 일종의 중독이었다.” (p.195)

 

「하루」

서른일곱의 나는 누가 봐도 평범한 주부다. 자가 소유의 아파트와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남편, 귀여운 유치원생 딸이 있고, 요가를 다니고 아파트 또래 주부들과 차를 마시고, 개인 블로그를 운영하는 여자다. 실상은 인물값 하는 남편과 분홍색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다섯 살 딸아이, 치매가 의심스러운 엄마가 그녀이지만, 그런 그녀를 같은 동의 지환 엄마는 늘 동경의 눈으로 바라보며 일방적인 친근함을 보인다. 고도 비만으로 남들의 호기심과 외면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 지환 엄마는 그러나 육아도 집안일도 성실히 잘해내는 사람이지만 늘 외로움을 호소한다. 어느 날 아파트에 경찰차와 응급차가 들이닥치며 소란스러워지고 지환 엄마의 갑작스런 자살 소식을 전해 듣게 된다.

“섬이 된 기분이었다. 실컷 떠들고 난 윤영은 통화 말미에는 꼭 저렇게 말했다. 걱정거리가 없이 산다고 부러움을 받는 건 좋다. 그러나 그런 오해가 가끔은 숨 막히게 했다. […] 섬처럼 외롭더라도 내 안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것이 나를 위하는 길이었다.” (p.240~41)

 

목차

열세 살

엄마들

순애보

환상통

오늘처럼 고요히

하루

 

해설| 전전반측, 반전의 윤리 _김나영

작가의 말

작가 소개

김이설 지음

1975년 충남 예산 출생으로, 명지전문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열세 살」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소설집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 『오늘처럼 고요히』, 경장편소설 『나쁜 피』 『환영』 『선화』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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