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

문학과지성 시인선 373

이병률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10년 2월 11일 | ISBN 9788932020327

사양 신46판 176x248mm · 152쪽 | 가격 12,000원

책소개

바닥없는 슬픔을 응시하는 깊고 담박한 시선

서서히 차올라 기어이 무릎을 꺾게 하는 이병률의 詩

 

정체되어 있지 않은 감각으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바람”(신형철) 이병률이 세번째 시집 『찬란』(문학과지성사, 2010)을 펴냈다. 전작 『바람의 사생활』(창비, 2006) 이후 3년 3개월 만에 발간되는 이번 시집 속에는 ‘살아 있음’을 통해 만난 생의 떨림으로 가득하다. 지극히 투명하고 눈부신 모든 생, 그 ‘찬란’의 순간을 시인의 눈으로 손끝으로, 귀와 입으로 더듬어 감각해낸 『찬란』의 총 4부 55편의 시들은 읽는 이를 “차가운 물의 명백함, 물이 들어 지워지지 않는 그 격렬한 시간들”과 마주할 수 있게 한다.

 

찬란이 아니면 다 그만이다

죽음앞에서 모든 목숨은

찬란의 끝에서 걸쇠를 건져 올려 마음에 걸 것이니

지금껏으로도 많이 살았다 싶은 것은 찬란을 배웠기 때문

그러고도 겨우 일 년을 조금 넘게 살았다는 기분이 드는 것도

다 찬란이다 ─「찬란」에서

 

‘찬란’은 무엇일까. 시인은 말한다. “살고자 하는 일이 찬란이었”다고. 살고자 하는 모든 것은, 그러므로 찬란하다. 빛이 번쩍거리거나 수많은 불빛이 빛나는 상태이다. 또는 그 빛이 매우 밝고 강렬하여 매우 화려하고 아름다운 상태다. 이병률의 새 시집 『찬란』은 이처럼 살아 있음에 대한 감탄이자, 의지를 노래한다. 그렇기에 이병률의 언어는 말을 갓 배운 아이의 그것처럼, 절박하고 순결하다. 이 순도 높은 언어로 여민 생의 속내들.

 

이 꽃다발은 할머니한테 어울리네요

가지세요

할머니는 한사코 가져가라고 나를 부르고

나는 애써 돌아보지 않는데

또 오기나 하라는 말에

온다는 말없이 간다는 말없이

꽃 향은 두고

술 향은 데리고 간다

좁은 골목은

식물의 줄기 속 같아서

골목 끝에 할머니를 서 있게 한다

다른 데 가지 말고

집에 가라는 할머니의 말 ─「온다는 말 없이 간다는 말 없이」에서

 

 

생의 속내들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우리네 삶이 그러하듯 그것은 이따금 슬프고 이따금 아프다. 이병률은 이를 지나치지도, 무화시키지도 않는다. 쓰린 상처마저 그대로 두고 본다. 그렇게 유심히 들여다보는 통증에는 온전한 치유는 없더라도 진실한 위로는 있을 수 있다. 위로는 이해하는 자의 것이다. 이해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닌 가슴의 것이기에 감정도 온도도 아니다. 내미는 손의 온도가 좋은 것일 리 없다. 그저 내미는 마음. 그 마음의 씀. 처연한 생을 파고드는 영혼의 다 씀이 있는 것이다. 마음의 결을 모두 겪고 나서야 할 수 있는 일을 이병률은 시집 『찬란』을 통해 하고 있다. 들여다보고 말 없이 위로하는 손의 한 끝을 통해 그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그 존재에는 사물의 근원이 있다. 공부를 통해 습관을 통해 아는 것이 아니라 길을 떠나 무릎 절어가며 그린 궤적 안에서, 그 마음과 성찰을 통해 얻어내는 이 과정은 그야말로 시인의 것이다. 이번 시집 『찬란』의 해설을 맡은 이는 1990년대 초 우리의 가슴을 지독한 쓸쓸함으로 몰아넣었던, 그렇게 위로해주던 시인 허수경이다. 그녀는 이병률의 이 ‘찬란’한 시들을 “영혼의 두 극지 사이에 서 있는 사과나무”라고 명명한다:

 

만유인력이라는 것을 우주의 질서를 세우는 기본 질서라고 가정할 수 있을 때, 사과나무 밑에 가방이 사과처럼 떨어져 있는 것은, 세계의 모든 가방이 사과나무 밑에 있는 것은 ‘끌림’ 때문이다. 끌림이야말로 이 우주를 지탱하는 완벽한 질서이다. 그 완벽한 질서 속에서 시는 생산되고 삶은 먹힌다. 삶은 어누 누구에게가 아니라 삶 자체가 먹어버리는 것이다. 삶이 삶의 위장에 갇힐 때 모든 불빛은 꺼질 것이나, “조각은 날카롭기보다 푸르렀다. 박히기는 좋으나 찌르기엔 부족한 조각은 턱으로 밝기를 받치고 있었다. 여태까지 본 모든 것을 기억하겠다는 것은 살아온 것보다 본 것이 더 단단하리란 것을 믿기 때문일 것이나”(「내가 본 것」)의 세계만이 남는다. 시다. 이병률이 쓴 “모호하게나마 마음이 간절해”지는 시다. 그리고 그것이 ‘찬란’이었고 ‘찬란’일 것이다.

-허수경, 해설 「영혼의 두 극지 사이에 서 있는 사과나무」에서

 

화살나무가 방 안으로 자라기 시작한다

너도 나도 며칠째 먹지 않았으니

이 모든 환영은 늘어만 간다

이리도 무언가에 스며드는 건

이마에 이야기가 부딪히는 것과 같다

묶어둔

너를 들여다보는 동안

나는 엎드려 있다

나는 너에게 속해 있었다 -「울기 좋은 방」에서

 

영혼의 극지에서 돌아보는 아스라한 생의 통증

 

그러므로, 타인이 타인이 아니게 될 때, 너의 눈물을 내가 울 수 있을 때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이 진심일 때 이병률의 시는 마치 가려져 있던 보석이 한 줄기 빛을 통해 찬란하게 빛나는 그 순간처럼 드러난다. 그럴 때 보석처럼 빛나는 그 시는 이병률의 것인 동시에 타인, 즉 우리의 것이다. 이병률을 둘러싼 그 모든 것들. 이병률의 시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 방법을 시인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불편하지 않은 것은/살고 있는 것이 아니리니/마음에/휘몰아치는 눈발을 만나지 않는다면/살고 있는 것이 아니리니.”(「시인의 말」에서)

 

살고 있음은 그런 것이다. 밖에서 안으로 끼치는 불편이거나, 휘몰아치는 눈발 같은 것. 그 불편함과 눈보라 속에서 우리는 눈물겹게 쓸쓸해지고, 그리워지는 것이다. 누군가의 근처가. 그 근처에 있는 안심이. 차가움이 아닌 따뜻함이. 그렇게 『찬란』의 시들은 나의 마음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당신이기도 하고. 그리고 우리이기도 하다. 그것이 ‘찬란’한 생이 아니겠는가. 눈부신 살아 있음의 힘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아직도 시와 시인이 있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시집 소개글

 

시집 『찬란』의 시들은 처연하고 오롯하다. 여전히 불분명하며 그윽한 순간들을 여미고 여며 아주 오랫동안 달인 듯한 그의 시에는 설명할 수 없는 생의 절박함, 그 피치 못할 영혼의 일이 새겨져 있다. 내 속에 있는 또 다른 나를 인식하며, 바닥없는 슬픔을 응시하는 시인의 깊고 조용한 시선에 우리 역시 마음의 경계가 흔들리고 이끌릴 수밖에 없는 연유다.

 

시인의 말

 

불편하지 않은 것은

살고 있는 것이 아니리니

마음에

휘몰아치는 눈발을 만나지 않는다면

살고 있는 것이 아니리니

 

2010년 2월

이병률

 

시인의 산문

 

조금 일찍 쓰련다. 찬란했다고.

 

금을 잘못 밟고 들어선 이 섬뜩한 세계는 살기보다는 팽창하기를 요구했다. 버젓한 한 세계로의 도착이 아닌 것 같아 너무 많은 것을 헤매며 사용했다. 감정까지도.

 

빛이 들지 않는 자리의 눈은 좀처럼 녹지 않고 눈길이 닿지 않는 곳의 먼지는 둘레를 키운다. 이 모두 내가 저지른 일만 같다. 안쪽의 사건들을 이해하겠노라고 바깥은 나를 받쳐냈다. 바닥에 끌리는 것들만 힘껏 받쳐야 할 게 아니라 명치에 도착하고 남은, 이 모르는 것들까지도 받쳐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준 자상한 시간들.

 

차가운 물의 명백함을, 물이 들어 지워지지 않는 그 격렬한 시간들을 차마 어떻게 마주한 것인지. 균형이었는지. 전부였는지. 그러므로 조금 미리 쓰련다. 당신도 찬란했다면 당신 덕분에 찬란했다고.

 

본문 시 미리보기

 

겨우내 아무 일 없던 화분에서 잎이 나니 찬란하다

흙이 감정을 참지 못하니 찬란하다

 

감자에서 난 싹을 화분에 옮겨 심으며

손끝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를 듣 것도

오래도록 내 뼈에 방들이 우는 소리 재우는 일도 찬란하다

 

살고자 하는 일이 찬란이었으므로

의자에 먼지 앉는 일은 더 찬란이리

찬란하지 않으면 모두 뒤처지고

광장에서 멀어지리

 

지난밤 남쪽의 바다를 생각하던 중에

등을 켜려다 전구가 나갔고

검푸른 어둠이 굽이쳤으나

생각만으로 겨울을 불렀으니 찬란이다

 

실로 이기고 지는 깐깐한 생명들이 뿌리까지 피곤한 것도

햇빛의 가랑이 사이로 북회귀선과 밤회귀선이 만나는 것도

무시무시한 찬란이다

 

찬란이 아니면 다 그만이다

죽음 앞에서 모든 목숨은

찬란의 끝에서 걸쇠를 건져 올려 마음에 걸 것이니

 

지금껏으로도 많이 살았다 싶은 것은 찬란을 배웠기 때문

그러고도 겨우 일 년을 조금 넘게 살았다는 기분이 드는 것도

다 찬란이다 -「찬란」 전문

 

 

네가 묶여 있다

의자에 있다

 

눈 내리는 천장 없는 방에

별이 가득 차고 있다

 

화살나무가 방 안으로 자라기 시작한다

 

너도 나도 며칠째 먹지 않았으니

이 모든 환영은 늘어만 간다

 

이리도 무언가에 스며드는 건

이마에 이야기가 부딪히는 것과 같다

 

묶어둔

너를 들여다보는 동안

나는 엎드려 있다

 

나는 너에게 속해 있었다 -「울기 좋은 방」 전문

 

 

나는 너에게 속해 있었다

저녁 숙소에 돌아와 누우려는데

무릎이 쓰리다

 

낮에 사진을 찍겠다고 무릎을 꿇었나보다

 

무릎 꿇는 법을 아는 사람이었던가

시에게 사람에게 세상의 내침에 무릎 꿇은 적 있던가

어떻게라도 한번 무릎을 꿇었다니

가뜩이나 서어한 마음 괜찮지 않은가

 

설산을 넘는 밤길

옆자리에 누가 있어 무릎이라도 닿을 수 있어서

무장 긴 길을 갈 수 있다면 낫지 않던가

 

낯선 곳에 들어섰는데 자리에 온기가 남아 있다면

그래도 밤을 생각하면 낫지 않던가

 

잊으면 낫지 않던가 -「마취의 기술」 전문

목차

제1부
기억의 집
햄스터는 달린다

자상한 시간
내가 본 것
거대한 슬픔
생활에게
이 안
새날
밑줄
그런 시간
바람의 날개
찬란

제2부
창문의 완성
사랑은 산책자
사과나무
모독
온다는 말 없이 간다는 말 없이
일말의 계절
다리
시인은 국경에 산다
무심히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삼월
망가진 생일 케이크
밤의 힘살
얼굴을 그려달라 해야겠다
울기 좋은 방
고양이가 울었다

제3부
마음의 내과
왼쪽으로 가면 화평합니다
팔월
절연
불편
달리기
슬픔의 바퀴
별의 자리
굴레방 다리까지 갑시다
기억의 우주
입김
좋은 풍경
화사한 비늘
유리병 고양이

제4부
있고 없고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겨울의 심장
길을 잃고 있음에도
굵은 서리
열차 시간표
마침내 그곳에서 눈이 멀게 된다면
붉은 뺨
불량한 계절
심해에서 그이를 만나거든
봉지밥
마취의 기술
진행의 세포

해설/ 영혼의 두 극지 사이에 서 있는 사과나무 _허수경

작가 소개

이병률 지음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시집으로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바람의 사생활』 『찬란』 『눈사람 여관』 『바다는 잘 있습니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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