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간, 시간을 담은 시
1964년 시단에 나와 올해로 등단 46년을 맞은 최하림 시인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시전집을 출간하였다. 시집에 묶이지 않은 습작 시절의 시부터 그가 펴낸 일곱 편의 시집에 담긴 시, 그리고 근작 『때로는 네가 보이지 않는다』 이후인 2005년부터 2009년까지 쓴 근작 시까지, 반세기 동안 써온 그의 시를 담고 있다. 1961년부터 1963년까지 씌어진 습작 시 10편, 1964년부터 1976년까지 씌어진 시들을 엮은 『우리들을 위하여』의 시 28편, 1964년부터 1982년까지 씌어진 시들을 엮은 『작은 마을에서』의 시 42편, 1982년부터 1988년 사이에 씌어진 시들을 엮은 『겨울 깊은 물소리』의 시 50편, 1988년부터 1998년까지 씌어진 시들을 엮은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의 시 48편, 1991년부터 1998년까지 씌어진 시들을 엮은 『굴참나무숲에서 아이들이 온다』의 시 57편, 1998년부터 2001년까지 씌어진 시들을 엮은 『풍경 뒤의 풍경』의 시 52편, 2002년부터 2005년까지 씌어진 시들을 엮은 『때로는 네가 보이지 않는다』의 시 55편, 그리고 마지막으로 2005년부터 2008년까지 씌어진 근작 시 21편의 총 363편의 시는 시인이 다시 다듬고 추려 모은 작품들이다. 그 안에는 우리 시대의 시간과 시인의 시간이 오롯이 녹아 있다. 그 흐름을 더듬으며 한 번도 그 품위를 잃은 적 없었던 최하림의 시의 변화와 성취를 느껴보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가질 것이다. “최하림은 우리 시단을 주도해왔던 두 경향의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으면서 순수와 참여의 분리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시의 완성이라는 목표에 연결시키려 했다”는 문학평론가 김치수의 말처럼, 시인은 ‘시의 중심’에 들어가는 방식으로 우리 시대의 파란만장한 역사 속 자신의 자리에 서 있었다. 그의 시는 발레리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우리말은 우리 현실과 우리 문화와 우리 역사를 떠날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시는 가난한 내 현실의 목소리로 말해야 된다고 생각하여 발레리의 역반응으로 눈을 뜨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역사가 중심이었던 초반의 시 세계에서 시인은 1980년 광주의 기억을 시의 중요한 질료로 삼는 등 역사를 응시하면서도, 동화적 상상력이 결합된 정교한 언어의 탐구로 시세계를 구축했다. 그러다 차차 지날수록 그 관심은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가에 대한 것으로 옮겨간다. “촌로들이 햇볕에 앉아 이야기하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에 대해 쓰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그의 시에서는 역사마저도 시간의 한 경과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그가 이번 전집 시인의 말에 밝히고 있는 것처럼, 흐르는 침묵과 흐르는 시간을 붙잡아 쓰고자 했던 시인의 꿈일는지도 모른다. 그의 꿈의 기록을 한 권의 책으로 만나는 일은 그래서 더욱 감격스럽다.
시인의 말
보이지 않게 흐르는……
1990년대 중엽, 한 친구에게 근황을 적은 편지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이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매일 아침, 유리창 가득 들어오는 햇빛을 받고 일어나, 건넛산에서 나무들이 기지개 켜고 일어나고, 골물이 졸졸졸 흘러내리고, 새들이 날아오르는 풍경을 본다고. 때로는 비행기 같은 이물질이 지나는 것을 볼 때도 있다고. 그 같은 정경이 날마다 계속되는 가운데 서서히 여름이 가고, 나뭇잎들이 져 내리고, 흰 눈이 내린다고.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배후 없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모든 현재가 과거라는 시간의 그림자를 끌고 이동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나 자신도 그런 그림자를 끌고 고향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림자를 끌고 산을 넘고 넘어 어머니의 둥근 무덤으로, 어머니의 바다로 가고자 합니다. 나의 ‘창밖으로 세상 보기’는 어머니의 무덤과 바다를 보고자 한 여행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옛사람들은 시나 그림은 ‘和’를 근본으로 한다(聲音以和爲體)고 했습니다. ‘和’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평화이고, 그것들의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평화로서의 ‘和’를 구하면서도, 그것들이 내면화되는 과정에서 솟구쳐 오르는 울음소리를 들었습니다. 예울림 같은 화가가 그 예에 속합니다. 예울림의 나무와 돌, 무인성자에는 들리지 않는 울음소리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화가는 고향을 버릴 수 없습니다. 신생은 고향에서밖에 일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고향에서밖에 다시 태어날 수 없습니다. 신생도 부활도 이 지구 위에서는 다 재현될 수 없습니다. 詩에서는 있을 수 있으되 현실에서는 없다는 것을 나는 침묵에서 봅니다. 있고/없음을 침묵은 껴안을 수 있습니다. 침묵은 고여 있지 않습니다. 침묵은 흘러갑니다. 그것은 그려져 있지 않는 빈 공간이라 해도 됩니다. 그려지지 않았으므로 그것은 없고 ‘有’의 세계를 감싸고 있으므로 그것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없음’ 혹은 침묵을 나는 쓰기가 어렵습니다. 연과 연 사이, 행과 행 사이, 단어와 단어 사이의 침묵을 나는 포기하고 줄글을 씁니다.
마침내 나는 쓰기를 그만 두고 강으로 나갑니다. 나는 바위에 앉습니다. 비린 내음을 풍기며 강물이 철철철 흘러갑니다. 세상은 어느 만큼 살았으며, 세상 흐름을 얼마쯤 내다볼 줄 아는, 죽은 자들과 대면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 나는 흐르는 물을 붙잡으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을 붙잡으려고 하는 순간에 강물은(혹은 시간은) 사라져버리겠지요. 그런데도 내 시들은 그런 시간을 잡으려고 꿈꾸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그런 꿈을 쓸 수 있도록 보이게, 보이지 않게 도와준 여러 친구들에게 감사드리며, 또한 가족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그 꿈을 기록한 나의 시들을 아름다운 책으로 엮어주신 문학과지성사에 머리 숙여 깊이 인사드립니다.
2010년 2월
최하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