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세월, 지난한 도정에서
진정한 근대적 주체의 발견을 꿈꾸다
총 5개의 작품으로 구성된 최인훈의 연작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은, 질문과 대답이 엇갈리고 과장스런 말이 오가는 한 가족의 기이한 대화를 통해 소통 장애와 강박 증상에 시달리는 현대인의 일상과 내면을 날카롭게 꼬집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아버지로 대변되는 유교에 기반한 전통 사회의 가부장적인 권위와 크리스마스이브를 즐기려는 딸 옥이가 상징하는 서구에서 들여온 근대의 산물에 맹목적으로 흡수되는 젊은 세대, 그리고 좀더 비판적으로 근대성을 바라보고자 하는 아들인 화자 ‘나’의 이른바 삼각 구도가 이 연작소설의 주요 얼개이다. 이 작품에서 작가 최인훈은 고유한 전통을 망각한 채 서구의 근대를 무분별하게 추종하기에 급급한 한국의 일그러진 근대화 풍경을 묘파한다. 더불어 서울의 밤거리 즉 어둠의 광장으로 그려지는 4․19 혁명과 5․16 군사 쿠데타를 거치는 동안 강압적 폭력과 억압 속에서 오히려 자유로운 주체의 발견에 이르는 개개인의 내면을 집요하게 탐문한다.
「크리스마스 캐럴」 연작에서 작중 인물 간의 비틀린 대화로 되풀이되는 강박 증상은, 지금-여기의 부정적 삶을 빚은 근원―일제 식민지에서 남북 분단으로 이어지는 한국 근현대사의 병폐―에 대해 탐색하고 그 의미를 질문하며, 더불어 동시대의 담론 형식을 효과적으로 재현하는 장치로서 최인훈 소설의 한 특징을 이룬다. 이를 통해 작가 최인훈은 소통 장애를 겪는 한 개인의 진정한 자아의 완성과 사랑의 실현 가능성을 타진함은 물론이고, 나아가 우리가 당면한 현실 사회적 맥락을 반성적으로 고찰하고 희화하며 그 허구성을 적극적으로 폭로한다.
‘헛된 탈을 벗으려는 고민과 간절한 사랑을 찾는 춤’
종교와 예술, 그리고 인간에게 주어진 지상 최고의 가치,
사랑의 이름으로 구원의 문학을 완성하다
최인훈의 중편소설 「가면고」는 주인공 ‘민’의 현실 세계에서의 정신 편력과 최면에 의해 고백되는 그의 전생의 방황(왕자 다문고), 그리고 그가 구상하여 안무하는 무용극 「신데렐라 공주」(마법에 걸린 왕자)라는 세 개의 이야기가 하나로 얽히면서 ‘인간은 사랑을 통해 구원받는다’라는 주제를 연주한다. 민과 함께 그가 사랑하는 현실의 여인 ‘정임’ 역시 전생에서는 공주 마가녀로, 무용극 속에서는 신데렐라로 등장하며 ‘헛된 탈을 벗으려는 고민과 간절한 사랑을 찾는 춤’을 애타게 추구한다. 이처럼 소설 「가면고」는 등장인물들의 전생의 고백이 보여주는 강렬한 종교적 구도와 가장 추상화된 예술 형태인 무용극을 통해, 사랑을 통한 구원이야말로 전쟁을 치르고 난 공허한 현대인의 삶을 어루만지는 치유책일 뿐만 아니라 영원성을 지향하는 종교와 절정에 가 닿으려는 예술에 있어서도 변함없는 지상 최고의 명제임을 힘주어 말한다. 작가 최인훈이 말하는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아집과 오만을 떨쳐버리고 자아를 완성할 수 있게 하는 장치이며, 엄혹한 현실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의 원천에 해당한다.
현대는 말하기 어려운 때다. 인간과 인간의 오감이 끊어진 시대, 그러므로 현대에서 말을 하려고 한다는 사실만으로서도 덕이라 불려야 하며, 동시에 악덕 혹은 악취미라 불려야 한다.
한 사람의 연인을 가진다는 것은 현대에서 가능한 최대한의 정의 실현이 아닐까? 본문에서
살아 있는 지식인의 표상이자, 삶과 소설이 쉽게 분리되지 않는 운명을 지닌 작가의 상에 가장 적확한 최인훈. 그의 문학적 진면모를 오늘에 되살려 독자들이 한층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문학과지성사는 2008년 11월부터 새로운 판형, 정교한 편집으로 독자들에게 ‘최인훈 전집’을 새로이 선보이고 있다. ‘최인훈 전집’ 6권으로 펴내는 『크리스마스 캐럴/ 가면고』 역시 최인훈 작가의 놀라운 상상력과 예술적 깊이를 확인시켜주는 중요한 텍스트로써 독자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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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사랑을 통해 구원받는다’는 저 파우스트적 주제를 품고 있는 「가면고」에서 말해지는 최인훈의 사랑은, 그 사랑이 상대방을 향해 무한히 열려 있으며 그 열려 있음을 통해 구원의 길을 향한 매듭을 푸는, 그런 사랑이다. 이 점에서 그의 사랑의 형태는 극히 서구적이다. 그러나 이 사랑을 통해 얻게 되는 구원의 양상은 ‘자신의 완벽한 초상’을 소유하려는 동양적 구도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매우 논리적이고도 그 논리를 뛰어넘는 사상이다. 우리는 아마 「가면고」에 대해 한국인의 의식으로서는 극히 희귀한, 한국 문학에서는 거의 유일한 ‘구원의 문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김병익(문학평론가)
「크리스마스 캐럴」 연작에서 작중 인물 간의 비틀린 대화로, 「가면고」에서 주인공의 얼굴에 대한 집착으로 되풀이되는 이른바 강박 증상은, 지금-여기의 부정적 삶을 빚은 근원―일제 식민지에서 남북 분단으로 이어지는 한국 근현대사의 병폐―에 대해 탐색하고 그 의미를 질문하며, 더불어 동시대의 담론 형식을 효과적으로 재현하는 장치로서 최인훈 소설의 한 특징이다. 이를 통해 작가 최인훈은 소통 장애를 겪는 한 개인의 진정한 자아의 완성과 사랑의 실현 가능성을 타진함은 물론이고, 나아가 우리가 당면한 현실 사회적 맥락을 반성적으로 고찰하고 희화하며 그 허구성을 적극적으로 폭로한다. 강헌국(문학평론가)
[표지 그림] 유근택, 무제, 목판화, 2005
[작가 컷] 김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