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눈에 아로새긴 ‘자연-우주’의 깊이
1966년 『문학춘추』로 시단에 나와 올해로 시력 43년째를 맞이한 시인 김형영이 여덟번째 시집 『나무 안에서』(문학과지성사, 2009)를 펴냈다. 『낮은 수평선』(2004) 이후 5년에 걸쳐 쓴 시 가운데 46편을 추려 묶은 이번 시집에서 김형영은, 80년대 이후 내면과 외부 세계가 교호하는 시적 순간을 수식과 기교 없이 간결하고도 응축된 시어로 담박하게 그려온 그간의 시적 경향을 유지하면서도, 무엇보다 그가 관악산 자락에 오래도록 머물면서 자연에서 얻은 몸과 마음의 여유를 시편 하나하나에 오롯이 담아내고 있다.
담박한 언어의 투명한 깊이, 그것이 자아내는 아름답고 견고한 빛
등단 직후 자기 폐쇄적이고 암울한 절망의 이미지나 관능적이면서도 자기 파괴적인 고통의 언어가 생경한 언어 구조의 실험과 함께 두드러졌던 초기의 시들(『침묵의 무늬』 『모기들은 혼자서도 소리를 친다』)을 지나, 시인 자신이 악성 빈혈로 죽음의 문턱까지 다다랐던 육체적 고통의 시기에 겪은 처절한 허무의 인식 그리고 이어지는 종교적 참회와 시적 정화의 단계를 격정적으로 통과해온 시인 김형영은, 시집 『나무 안에서』에서 보다 원숙해진 삶의 태도를 선보인다.
때로 내가 마음이 약해져서
온갖 유혹에 흔들릴 때는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
그래, 그래, 흔들리거라.
네가 내 안에 머물고
내가 네 안에 머무니
많이는 흔들리지 말고
뿌리 깊은 나무처럼만 흔들리거라.
그것도 잠시만 흔들리거라. ―「마음이 흔들릴 때는」 부분
위 시에서처럼 시인의 관조적이고 성찰적인 목소리는 내면의 잔잔한 소요와 갈등을 거쳐 나무 둥치 안에서 울리듯, 잔잔한 수면 위의 파문처럼 가슴께에 와 닿는다. 동시에 삶에의 긍정적 의지는 물론이요, 자연과의 조화를 넘어 그 속으로 하나 되어 물들어가는 시인의 눈과 마음은 세계에 대한 그의 이해의 정도가 보다 깊어졌음을 확인케 한다. 늘 순연한 자세로 말없이 자라는 나무처럼, 그리고 내어줄 것 따로 없이 그저 우리 주위를 감싸는 바람과 공기에 마음을 내맡긴 시인은 삶의 더께와도 같은 몸을 부려 둔 채 길고 바람 부는 길에 나선다. 슬쩍 옷깃을 채운 단추 하나 풀어놓고 내닫는 그의 발걸음은 “(나를) 걷어치우고/ 무엇에 홀린 듯 꿈길을” 가는 자의 그것으로 가볍다. 그 가벼움은 온갖 세상의 유혹과 더불어, 눈, 비, 바람과도 함께 부대낄 각오가 되어 있는 자의 여유로운 미소로 번져간다.
함께 존재함으로써 함께 새로워지기
―“안 보이는 것의 힘이여, 없는 것의 깊이여”
시집 1부를 온전히 차지하는 ‘나무’를 비롯해서 세상에 존재하는 작디작은 형상들(꽃, 꽃잎, 나비, 여치, 바람, 수면)에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시적으로 매혹당하는 시인은 시종일관 그 따듯한 눈길을 거두지 못한다. 시인은 만물에 대한 경외감으로 자신을 낮추고, 하여 한껏 가벼워진 시인의 몸에 바람이 들어왔다 가기에 “그 바람/ 그 깊이/ 그 넓이/ 한이” 없음을 노래할 수 있고, “꽃눈 본 벌같이 나를 잊고/ 일생 내가 꽃을 찾아”다녔기에 새순과 꽃잎이 벙글면서 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관조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내가 대상의 마음 안에 들어가 진정한 합일의 순간을 맛보는 이는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이번 시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나무 안에서」는 시인 김형영이 그런 극적 순간에 도달해 있음을 아주 담담하게 드러내고 있다.
정녕 나무는 내가 안은 게 아니라
나무가 나를 제 몸같이 안아주나니,
산에 오르다 숨이 차거든
나무에 기대어
나무와 함께
나무 안에서
나무와 하나 되어 쉬었다 가자. ―「나무 안에서」 부분
해설을 쓴 평론가 장경렬이 지적한 바처럼, 시인은 이내 소진되어버릴 소유의 욕망으로 대상과의 합일을 시도하지도, 무언가를 길어 내거나 혹은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의지에 얽매여 있지도 않다. 시인은 그저 ‘비, 바람, 햇볕, 새들의 지저귐, 어둠과 별, 숨이 막히는 공기’ 그리고 때로는 ‘사람’에게 시달리면 시달리는 대로 자신을 내맡긴다. 그리고 부지불식간에, 함께 존재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의 합일, 그들과의 ‘하나 됨’에 이른다. 맑고 깨끗한 세계를 그리는 김형영의 군더더기 없는 시적 표현은 그렇게 세상의 중심으로서의 ‘나’를 버리고서야 얻어진 값진 결실이다.
김형영의 『나무 안에서』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시어들과 시적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자아를 둘러싼 만물에 드리운 시인의 겸손하고 따뜻한 눈길은, 자아와 대상 사이의 벽을 허물고, 자아와 대상이 하나가 되는 깨달음의 순간으로 시인을 이끈다. 더불어 고통의 삶이 주는 압박을 체험한 후, 세상의 중심이고자 하는 ‘욕망’ 대신 그저 함께 ‘존재’하기를 소망하는 시인에게 허락된 깊이 있는 시적 상상력과 시적 예지가 자연스러운 공감의 울림을 자아낸다. 만물의 이치가 그러하듯, 원숙해질수록 깊어지고, 깊고 오묘한 것일수록 단순하고 맑게 빚어지는, 고전적 미학의 한 정수를 김형영의 『나무 안에서』는 보여주고 있다.
시인의 말
제1부
마음이 흔들릴 때
산책
꽃을 찾아서
봄바람
나무들
생명의 노래
늘푸른 소나무
우리는 떠돌아도
나무 안에서
제2부
이슬
시골 사람들은
초승달
나비
누가 뿌렸나
여름 소나기
여치
양파
이런 봄날
나팔꽃
水面 1
水面 2
변산바람꽃
제3부
나
절벽 앞에서
미륵사지석탑
석상에 바치는 송가
가을 단상
허풍
당신이나 나는
양귀비꽃
즉흥시
내 그림자에게
채석강에서
수평선 4
수평선 5
결국은
연못
낙엽
제4부
無名氏
날마다 생일 날
사랑의 숨결
너와 나 사이
바보웃음의 향기 하늘에도 퍼져라
엘 그레코의 ‘베드로의 눈물’을 보고
짧은 생각
사랑의 뿌리
해설|‘존재’의 시를 위하여 ․ 장경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