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생애

정찬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09년 8월 14일 | ISBN 9788932019833

사양 양장 · · 288쪽 | 가격 10,000원

책소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두 생애의 융화를 꿈꾸었다”

폭력과 절망 속에서 건져 올린 아름다운 희생과 공감의 메시지
인간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를 수행하는 작가 정찬의 새 소설집

폭력의 문제를 통해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는 인문학의 본질적 주제들에 접근해온 작가 정찬의 새 소설집 『두 생애』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폭력의 의미와 본질, 폭력의 탄생 과정,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과 폭력의 피해자가 된 사람의 내면세계를 집요하게 해부하고 있는 이번 소설집은 다소 무거울 수 있는 인문학적 주제를 특유의 진지한 문체로 서술하고 있어 작금의 가벼운 즐거움의 추구하는 소설들과 확연히 구분되며, 정찬만의 작품 세계를 일관되고 밀도 있게 그려내고 있다.
이번 소설집의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홍정선은 그의 소설을 읽는 것은 “일종의 의미 있는 형벌을 견디는 자세가 은연중에 요구된다”고 밝히면서 “그의 소설은 즉각적인 즐거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페이지를 차근차근 넘기는 독자들에게 점차 강한 흡입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며 끝까지 읽은 사람에게는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는 여운을 선사한다”고 역설한다. “그의 소설은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 독자들에게 인간에 대한 이해와 성찰이 더욱 깊어지고 높아졌다는 뿌듯함을 안겨”준다는 것이다. 그가 “정찬의 소설을 인문학으로서의 문학에 충실한 소설, 소설이 인문학에서 차지해야 할 본연의 자리에 걸맞게 인간에 대한 탐구를 본격적으로 수행하는 소설이라”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총 7편의 작품 속에서 일관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은 폭력에 노출된 인간, 혹은 고통의 기억을 안고 있는 인간이다. 그러나 정찬의 소설은 그들의 절망만을 보여주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의 모습을 통해 정찬이 진정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작품마다 보석처럼 숨어 반짝이며 독자들의 공감을 자아낸다. 그렇다면 그가 폭력과 고통에 빠진 자들의 절망에서 길어 올리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소설집 마지막에 수록된 「폭력의 형식」은 폭력이 한 인간에게 또 다른 폭력을 어떻게 만들어내는지를 잘 보여준다. 부모를 잃고 의지할 곳 없는 남매에게 가해지는 무자비한 폭력은 내면에 새로운 폭력의 분신을 키우게 하고, 그 폭력은 다시 타자를 향하거나 아니면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와 자해를 하도록 만든다. 작가는 여기서 그들에게 희망이 있었다면 그처럼 극단적으로 치닫지 않았을 것이라는 암시를 주고 있지만, 세상은 그 희망마저 기대할 수 없도록 할 만큼 그 남매에게 가혹하기만 하다.
그 희망이 꽃을 피웠을 때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희생」이다. 이 작품은 사회적인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된 1980년대 한국 사회의 젊은이들, 그중에서도 피해자일 수밖에 없었던 한 여성의 삶을 편지 형식을 통해 들려준다. 어느 날 들이닥친 경찰들이 자행한 끔찍한 폭력에 시달리고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겁탈을 당한 후 임신까지 하고 마는 그녀의 삶은 떠올리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운 것이었으나, 그 안에서 희생으로 건져 올린 희망의 메시지는 가슴 먹먹한 아름다움을 전해준다.
표제작인 「두 생애」는 인간의 고통의 의미를 되짚는다. 교황의 생애와 기구한 운명 속에 스러져간 한 소년의 생애, 거기에 어린 시절 신으로부터 외면당한 고통을 간직한 화자의 삶 속에서 고통의 본질은 서로 맞닿아 있으며, 그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랑을 낳게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이렇게 서로 정반대에 놓인 듯 보이는 두 생애가 사실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보여주는 모습은 다른 작품들에서도 엿볼 수 있다. 물 외엔 아무것도 삼킬 수 없는 바비 인형 같은 여자와 100킬로그램이 족히 넘는 거구의 여자가 등장하는 「바비 인형」은 분열된 자아의 모습을 그리고 있고, 여동생과 자신의 아이, 그리고 손주를 차례로 잃은 화자의 이야기 「강의 저쪽」은 죽은 자를 떠올리는 고통을 새 생명의 탄생을 상상하는 것을 통해 치유하는 모습을 담고 있으며, 햄릿 역을 하면서 정말 햄릿이 된 배우가 주인공인 「그는 누구인가」에서는 주인공과 연극 속 인물인 햄릿이 실제로 만나 대화를 나눈다. 이렇듯 서로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거리에 놓인 인물들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교감을 하는 데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에겐 잊히지 않는 어린 시절 고통의 기억이 있고, 그것이 현재의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여전히 그들은 고통 속에 놓여 있지만, 그럼에도 ‘서로를 간절하게 꿈꾸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토록 서로를 꿈꾸는 것일까? 그것은 타자를 향한 연민, 자신을 향한 연민, 나아가 세상을 향한 연민 때문일 것이다. 이 연민은 슬픔에서 기인한다. 작가는 「희생」에서 “희생자의 본질은 슬픔”이라고 말한다. “슬픔은 고통과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원한을 정화”한다는 것이다. “분노를 껴안으면서, 분노를 넘어서는 감정이”자 “분노가 또 다른 폭력으로 치닫지 않게 하는 고귀한 감정”이 정찬이 생각하는 슬픔이다. “세상은 폭력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럼에도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슬픔에 감싸여 있기 때문이”라고 작가는 소설 속에서 말하고 있다.
정찬의 새 소설집 『두 생애』가 빛을 발하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그의 소설이 폭력과 고통의 절망으로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배어나는 이유는 바로 ‘슬픔’의 정한이 스며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슬픔’이 폭력에 사로잡힌 이 세계를 구원할 수 있다고 그는 말하고 있는 듯하다.
신의 선택을 받은 인간과 신의 외면을 받은 인간,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 한 인간 안에 분열된 두 자아. 세계의 양면을 집요하게 들어다보는 작가의 시선은 전혀 다른 두 삶이 만나 조화를 이루는 슬프지만 아름다운 기적을 독자에게 선물한다.

작품의 줄거리

「두 생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다룬 특별 프로그램을 제작하던 화자는 한 구성작가의 소개로 소년을 만나게 된다. 아버지의 차에 여동생이 치어 죽는 사고가 난 이후 그 충격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던 아버지로부터 폭력에 시달리다가, 아버지가 자살하고 그 후 병으로 죽은 어머니와 4개월간 한방에서 생활했던 그 소년의 삶과 교황의 생애를 화자는 함께 다루고 싶었지만, 교황의 취재를 하던 중에 소년은 자살을 한다. 교황의 생애와 그 소년의 짧은 삶, 그리고 자신이 어린 시절 겪은 아픔 사이에서 많은 생각을 하던 화자는 교황이 서거하는 날까지 그의 생애를 추적하며 그 세 삶이 맞닿아 있는 지점을 깨닫게 된다.

나는 생각했다. 의미가 없는 고통과 의미로 충만한 고통에 대해. 소년의 고통은 소년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의미 없는 고통은 악이며, 악은 소년을 마침내 죽음 속으로 밀어 넣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소년의 고통이 전혀 의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소년의 고통은 나에게 의미가 있었다. 내가 소년을 느낀 것은 소년의 고통을 통해서였다. 소년의 몸에서 흘러나온 고통이 내 몸속으로 스며듦으로써 분리된 두 존재가 연결되었다. 소년의 죽음을 알았을 때 나는 고통스러웠다. 나의 일부가 상실된 듯한 고통이었다. 나는 당황했다. 내가 소년을 사랑하고 있었음을 까마득히 몰랐다. 그것은 돌연한 사랑이었다. 전혀 예기치 않은, 도적처럼 찾아온 사랑이었다. 사랑을 불러일으킨 것은 고통이었다. 소년의 고통 속에서 나의 고통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사랑의 감정이 생길 수 있었을까. (pp. 37~38)

「그 남자는 왜 거기에 서 있었을까」
외삼촌의 장례식이 있던 날, 화자는 바쁜 일정을 마치고 장례식장으로 향한다. 외삼촌은 화자의 어머니와 배다른 남매이다. 한국전쟁을 지나면서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외삼촌은 서커스단을 따라 집을 나갔다가 무슨 일이 있을 때면 돌아오곤 했다. 그 후에도 외삼촌은 자주 집을 나갔고, 외숙모는 그런 외삼촌을 그때마다 잘 찾아냈다. 부고를 듣기 전, 외삼촌은 화자를 찾아와 사연이 있는 시계를 팔고는 강가에 비닐 집을 짓고 살았는데, 홍수가 난 이후에도 환한 표정으로 비닐 집을 지키고 있던 그가 그로부터 며칠 뒤 강에서 죽은 채 발견된 것이다. 상갓집에서 외숙모와 외삼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화자는 강에서 외삼촌을 떠올리며 그에게서 산 시계를 강물에 띄운다.

가느다란 줄 위를 그는 걷고 있었어. 어딘가를 행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조심스럽게. 내 눈에 눈물이 고이고 있었어. 처음엔 몰랐어.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자 비로소 내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 왜 눈물이 나왔을까? 무엇이 열네 살 아일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했을까? 그가 위태롭게 보였기 때문이었어. 가느다란 줄 위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이 위태로웠어. 걸을 때도 위태로웠어. 두 팔을 펼칠 때도 위태로웠고, 고개를 뒤로 돌릴 때도 위태로웠어. 하지만 그는 아름다웠어. 위태롭기 때문에 아름다웠던 거야. 나의 삶도 위태로웠어. 죽은 엄마의 젖을 빨고 있는 아이처럼 느껴지는 삶이었으니. 열네 살 아이는 재빨리 깨달았지. 자신의 삶이 아름다워질 수가 있음을. 눈물은 거기에서 흘러나온 거야.(p. 61)

「희생」
어느 날 화자에게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된다. 그 편지는 첫사랑 희우에게서 온 편지였다. 화자가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교도소에 갇혔을 때, 그녀는 작별을 고하는 편지를 보내고 홀연히 사라졌었다. 그런데 20년 만의 편지에서 그녀는 여전히 화자를 그리워하고 있었고, 자신의 집으로 찾아와달라고 했다. 희우의 집에 찾아간 화자는 그곳에서 그녀의 딸을 만났고, 희우는 이미 병으로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희우가 남긴 또 다른 편지에서 자신이 몰랐던 희우의 고통스러운 과거를 알게 된다. 당시, 화자를 쫓던 경찰은 희우를 잡아 화자가 있는 곳을 추궁했고, 그 무시무시한 폭력 속에서 희우는 결국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겁탈까지 당했으며, 그 일로 지금의 딸을 임신하게 된 것이다. 폭력으로 인해 생겨난 아이를 통해 그녀는 희생의 삶을 살아가게 되었는데, 프랑스에서 산부인과 의사를, 아프리카에서 긴급 구호 단체 일을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화자는 희우의 딸이 차려준 밥을 먹고 그 딸의 사진을 찍어준다.

저는 여성의 본질을 슬픔이라고 생각해요. 희생자의 본질은 슬픔이에요. 슬픔은 고통과, 고통이 불러일으키는 원한을 정화해요. 그렇다고 해서 슬픔이 폭력에 대한 분노를 지운다고 생각하시면 안 돼요. 분노와 원한은 달라요. 폭력에는 분노해야 해요. 폭력에 분노하지 않는다는 것은 폭력을 인정하는 행위나 마찬가지예요. 그 분노를 껴안으면서, 분노를 넘어서는 감정이 슬픔이에요. 분노가 또 다른 폭력으로 치닫지 않게 하는 고귀한 감정이지요. 세상을 폭력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럼에도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슬픔에 감싸여 있기 때문이에요.(p. 119~20)

「바비 인형」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원룸. 냉장고 안에서 그녀는 초코 케이크를 발견하고는 그것을 누가 가져왔을지 궁금해한다. 음식을 전혀 입에 대지 않는 그녀의 집에 이것을 갖다 놓을 만한 사람은 그녀를 통해 최고의 요리를 만들고자 하는 요리사 K와 거대한 몸집을 가진 G뿐이다.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G는 초등학교에서 남자아이처럼 행동을 하다가 중학교에 들어와서 그런 행동이 고쳐지는 듯하더니 폭식을 하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점점 불어난 살 때문에 대학교에 들어와서는 좋아하던 이성에게 상처를 받는다. 그 후 먹고 토하기를 반복하며 그녀는 자신이 바비 인형이 되는 것을 꿈꾸기 시작한다. 그런 G를 그녀는 매우 혐오하지만, G는 그녀에게 그녀 또한 G를 꿈꾸고 있으며 G처럼 바비 인형을 꿈꾸고 있다고 말한다. 결국 G와의 대화 끝에 그녀는 초코 케이크를 먹고 결핍과 허기와 두려움을 잊는다.

넌 내가 되고 싶은 적은 없어?
내가 미쳤니? 그런 생각을 하게.
난 말이야……
G가 그녀의 눈을 들여다본다.
간혼 너이고 싶을 때가 있어. 너의 눈으로 보고, 너의 코로 냄새 맡고, 너의 손으로 음식을 먹고, 너의 다리로 사람 사이를 걷고 싶어.
꿈도 꾸지 마.
그녀가 쏘아붙인다.(p. 155)
「강의 저쪽」

아이를 사산한 딸을 재첩국을 파는 식당으로 불러, 화자는 어린 나이에 죽은 자신의 여동생 이야기를 들려준다. 딸의 이름과 같이 정희였던 화자의 여동생은 태어날 때부터 몸이 좋지 않았는데, 그의 집에서 유일하게 정희에게 약으로 먹일 수 있었던 것이 재첩국이었다. 그것은 화자에게 정희의 생명과 연결된 비밀스러운 것으로 느껴졌다. 그런데 어머니의 일감이 줄어들면서 재첩국을 살 수 없는 날이 많아졌고, 정희는 몸이 점점 안 좋아졌다. 그래서 화자는 재첩을 직접 잡아오기 위해 먼 길을 걸어 낙동강에 갔으나, 거기서 재첩을 잡으며 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재첩국에 대한 의혹과 노는 아이들에 대한 모독감을 느꼈다. 그 모독감이 수치심과 노여움으로 변해하고 있을 때, 놀던 아이 중 하나가 물에 빠져 죽은 모습을 보게 된 화자는 충격에 사로잡혔다. 정희가 죽던 날, 화자는 그 일을 정희에게 고백했고 정희는 오빠 탓이 아니라며 위로를 하면서, 사람이 죽는 것은 다른 생명이 태어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후 화자는 고통이 찾아올 때마다 정희의 말을 떠올리며 멀리서 새 생명이 다가오는 상상을 한다고 딸에게 말해주었다. 딸과 헤어진 화자는 정희의 기일에 어머니와 함께 갔었던 종묘를 혼자 걸으며, 정희와 아내가 유산했던 아이들과 딸이 사산한 아이들을 떠올린다.

“정흰 구덕산에 묻혔다. 어머니는 화장을 하고 싶어 하셨지만 돈이 없었어. 땅을 파고 묻는 데는 돈이 아 들지. 임자 없는 땅인 데다 아무것도 세우지 않았으니. 그 작은 죽음 앞에서, 조등 하나 없었던 쓸쓸한 죽음 앞에서 나는 괴로워하지 않았다. 눈물을 흘리는 일은 괴로운 일이 아니더라. 진짜 괴로움은 정희를 땅에 묻은 후에 찾아오더군. 학교에서 돌아와 적막한 집 안으로 들어설 때, 정희가 늘 누워 있던 방을 들여다볼 때, 한밤중 잠에서 깨어나 칠흑 같은 어둠과 마주칠 때 무서운 고통이 가슴을 후볐어. 그럴 때마다 정희의 죽음으로 태어날 생명체를 생각했어. 고통을 견디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거든. 생각이라기보다는 상상이었지.”
“어떤 상상을 하셨나요?”
“작은 생명체를 떠올렸어. 먼 곳에서 세상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때때로 그림을 그리곤 했어.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희미한 영상을 그렸지. 그렇게 하다 보면 통증이 점차 가라앉았어. 상상에 빠져 통증을 까맣게 잊어버린 경우도 간혹 있었어.” (p. 188~89)

「그는 누구인가」
연극제로 인해 홀스테브로에 간 화자는 그곳에서 햄릿을 연기했다. 단지 연기가 아닌 진정으로 햄릿이 되고자 했던 그는 햄릿을 대면하는 이상한 경험을 한다. 한편, 그의 연극을 인상 깊게 본 헝가리 출신의 늙은 배우는 꿈을 잊지 못하고 있는 자신 안의 어린아이 이야기를 하며, 그가 햄릿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햄릿이 그를 선택했다고 말한다.

그때 내가 한 말을 기억하오? 당신이 햄릿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햄릿이 당신을 선택했다고 말이오. 여기에서 나는 배우의 선조가 샤먼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고 싶소. 샤먼은 변신의 달인이오. 그의 육신은 다른 존재의 혼을 받아들이기 위한 그릇이오. 샤먼이 되기 위해서는 고통이라는 통과제의를 저쳐야 하오. 살을 저미고 발라내며, 뼈를 깎는 참혹한 고통이오. 나는 당신의 연기를 보면서 당신의 고통을 느꼈소. 노인처럼 얼굴이 쭈글쭈글한 아이의 고통을 말이오. 당신은 샤먼이었소. 그래서 당신의 육신을 비울 수 있었고, 텅 빈 육신 안으로 햄릿이 들어온 것이오. 당신이 아무리 햄릿을 원했어도, 햄릿이 당신을 원하지 않았다면 당신의 육신은 결코 채워지지 않았을 것이오. (p. 229~30)
「폭력의 형식」
다리 붕괴 사고로 부모를 잃은 광호와 영희 남매는 큰아버지 집에 맡겨졌다가 IMF로 어려워져 고아원에 들어가게 된다. 얼마 후 이모가 영희를 데려갔고, 광호는 누명을 쓰고 고아원 원장에게 잊지 못할 폭력을 당한 뒤, 같은 폭력으로 복수를 하고 고아원을 도망 나온다. 큰아버지의 소개로 중국집 배달원으로 취직을 한 광호는 주방장에게 성적 폭력을 겪고, 그 후 큰아버지 장례식에서 만난 이모를 따라 이모의 집에 들어가게 된다. 이모부의 도움으로 검정고시를 준비하며 희망을 가졌던 광호는 영희가 그동안 이모부에게 겁탈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의 희망이 무너질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동생 영희를 겁탈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모부의 폭력에 광호는 이모부의 목을 조르는 무서운 모습을 보이고, 다음 날 집을 나와 큰어머니의 소개로 퀵서비스 일을 하게 된다. 광호의 겁탈로 출산을 한 영희는, 이모와 이모부가 아이를 데리고 이민을 가고 혼자 남겨진 후 자살을 시도한다. 이 소식을 들은 광호는 그날 오전에 자신에게 모욕을 준 고객의 집으로 찾아가 골프채를 그에게 휘두른다.

집 안에서 광호는 없는 존재였다. 없는 존재가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증오였다. 광호에게는 그랬다. 광호가 증오한 대상은 이모부가 아니었다. 영희였다. 이모부는 자신에게 희망을 준 사람이었다. 희망을 준 사람을 증오한다는 것은 희망을 버리는 행위였다. 희망을 버리기에는 악몽이 너무 끔찍했다. 이모부와 가까이 있을 때 두 손을 꽉 쥐었던 것은, 흉기가 될 수 있는 물건을 보면 흠칫 놀란 것은, 자신의 손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모든 증오를 영희에게 쏟았다. 그것은 황폐한 증오였다. 황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증오의 원천이 절망과 공포였기 때문이었다. (p. 252)

작가의 말

인간은 유랑하는 존재다. 태어나고, 자라고, 늙고, 마침내 죽음에 이르는 인간의 생애 자체가 유랑이다. 시간은 유랑의 근원이자 바퀴다.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물결은 인간의 몸을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시간의 물결에 휩쓸린 인간의 몸은 여기에서 저기로, 저기에서 그 너머로 끊임없이 움직인다. 그러다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린다. 흔적도 없이. 이 책에 실린 소설들은 내 유랑의 작은 흔적이다. 내 몸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것이나, 유랑의 흔적들은 홀로 남아 여전히 세상을 떠돌 것이다.

2009년 8월
정찬

목차

두 생애
그 남자는 왜 거기에 서 있었을까
희생
바비 인형
강의 저쪽
그는 누구인가
폭력의 형식

해설_폭력을 해체하는 인문학적 소설 쓰기·홍정선
작가의 말

작가 소개

정찬 지음

1983년 무크지 『언어의 세계』에 중편소설 「말의 탑」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소설집 『기억의 강』 『완전한 영혼』 『아늑한 길』 『베니스에서 죽다』 『희고 둥근 달』 『두 생애』 『정결한 집』, 장편소설 『세상의 저녁』 『황금사다리』 『로뎀나무 아래서』 『그림자 영혼』 『광야』 『빌라도의 예수』 『유랑자』 『길, 저쪽』 등이 있다. 동인문학상, 동서문학상, 요산김정한문학상, 오영수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전자책 정보

발행일 2012년 8월 28일 | 최종 업데이트 2012년 8월 28일

ISBN 978-89-320-1983-3 | 가격 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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