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식민지적 현실의 위기의식을 첨단의 기법으로 표현,
폭발적으로 분출한 도발의 텍스트!
최인훈의 연작 단편소설 「총독의 소리」1~4와 「주석의 소리」는 최인훈의 소설 가운데에서도 매우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작품에 속한다. 환상 속에 존재하는 총독과 주석의 목소리가 오로지 라디오 방송으로 전달되는 특이한 형식을 통해, 해방 후 요동치는 정치적 격변기의 혼란과 고뇌와 문제의식을 폭발적으로 분출하여 그 돌파구를 찾고자 한다.
“충용한 제국 신민 여러분. 제국이 재기하여 반도에 다시 영광을 누릴 그날을 기다리면서 은인자중 맡은 바 고난의 항쟁을 이어가고 있는 모든 제국 군인과 경찰과 밀정과 낭인 여러분……”
「총독의 소리」 연작은 이렇게 프랑스 알제리전선의 자매단체이며 한국의 지하비밀단체인 ‘조선총독부 지하부 소속 유령해적방송’의 목소리로 시작한다. 즉, 한국 역사에 실존했다가 사라져버린 두 가지의 타자, 상해임시정부와 일제 총독부를 소설 속으로 불러들여 그 역사적 타자들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것이다. 「주석의 소리」에서 상해임시정부의 주석은 한국에서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의 건강한 발전을 이룩하기 위한 방책을 웅변적인 목소리로 설파한다면, 「총독의 소리」에서 일본 총독부의 총독은 한반도에서 재식민화를 획책하고 분단 상황을 영속화하기 위한 전략을 치밀하게 제시한다.
그렇다면, 왜 작가는 이 역사적인 타자들을 필요로 했고 그들이 소설의 공간 속에서 말하게 하는 방식을 택했을까.
나는 문학의 형식을 파괴하면서라도 온몸으로 부딪쳐야 할 위기의식을 느껴 이 작품 「총독의 소리」에 착수했다. 한일협정이라는 해방 후 정치사회사의 새 장을 여는 사건에 대한 한 지식인의 충격과 혼란과 위기의식을 폭발적으로 내놓기 위해서 소설의 통념적인 형식을 벗어나보려고 했던 것이다. 적의 입을 빌려 우리를 깨우치는 형식, 빙적이아(憑敵利我)이다. (최인훈)
식민지 시기의 문제의식이 나라 찾기에 있었고 해방공간의 문제의식이 나라 만들기에 있었다면, 「총독의 소리」가 씌어진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의 문제의식은 어떻게 하면 다시 식민지의 나락에 떨어지지 않고 민족국가를 유지․발전시킬 것인가에 있었을 터이다. 「총독의 소리」의 총독은, 한반도의 해방은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한반도 내부의 식민 지배 조건은 해방 이후에도 고스란히 유지·보존되고 있다, 따라서 한반도의 재식민화를 위한 그들의 비밀 지하활동은 여전히 기지를 갖고 있고, 분단 대치상황으로 인한 군사비 과도 지출, 남북간에 적대적 무한경쟁 체제로 인해 통일은 요원한 문제일 것이라고 방송을 통해 진단한다. 빙적이아(憑敵利我), 최인훈은 「총독의 소리」 연작(「주석의 소리」 포함)에서 적의 적나라한 육성을 통해 우리가 처한 현실을 냉철하게 진단하고 온몸으로 부딪쳐 그 답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21세기에도 여전히 준열한 문제의식을 던지는, 최인훈 문학의 현재성
「총독의 소리」의 내용과 형식에서의 파격은 작품 발표 당시는 물론 40여 년 가까이 세월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유효하게 통용되고 있다. 해방 이후 이 땅 곳곳에 숨어 있는 일제 잔재 세력의 총집결을 요구하는 이 작품은, 우리 역사가 걸어온 길에 대한 맹렬한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주목할 만하다. 식민지에서 벗어난 땅이 언제든 신식민지적 현실에 처할 위기에 있다는 것을 직시하게 만들면서, 현실의 모순을 매섭게 질타하는 것이다.
요컨대 「총독의 소리」에서 최인훈의 언어는 한국 민족을 둘러싼 위험요소에 대한 경고의 텍스트이면서, 동시에 한국을 둘러싼 국제질서에 대한 냉철한 인식을 촉발하는 풍자적인 텍스트이며, 더 나아가 이 모든 상황을 초극할 수 있는 그 어떤 힘을 불러내고자 하는 도발의 텍스트이다(김동식/ 문학평론가).
그 밖에도, 이 책에는 작가 스스로 “소설로 쓴 소설론”이라 밝힌 중편소설
「서유기」와, 현실과 유리된 화자의 자의식의 흐름을 좇는 단편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3ㆍ4 등, 실존적 주제들을 깊이 있게 다루면서 폭넓은 서사형식을 실험하는 주옥같은 단편들이 함께 실려 있다.
살아 있는 지식인의 표상이자, 삶과 소설이 쉽게 분리되지 않는 운명을 지닌 작가의 상에 가장 적확한 최인훈. 그의 문학적 진면모를 오늘에 되살려 독자들이 한층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도록, 문학과지성사는 2008년 11월부터 새로운 판형, 정교한 편집으로 독자들에게 ‘최인훈 전집’을 새로이 선보이고 있다. ‘최인훈 전집’ 9권에 해당하는 『총독의 소리』 역시 최인훈 작가의 놀라운 상상력과 예술적 깊이를 확인시켜주는 중요한 텍스트로써 독자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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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정치라는 소설의 기본 단위의 회귀(回歸). 남과 북의 이데올로기를 광장과 밀실이라는 신선한 관념으로 치환한 최인훈적 방법론의 휘황함이 「총독의 소리」에 와서는 식민지적 상황을 오늘날의 신식민지적 현실에 대치시킴으로써 새삼 확인되고 있다. 말하자면 최인훈 문학의 전반부를 표현한 방법론적 민첩함이 후반부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셈이다. 그렇기에 관념의 새로움과 이를 가능케 하는 환상을 낳을 수 있었다. _김윤식(문학평론가)
표지 그림 / 서용선, 선거, 116.5×91cm, acrylic on canvas, 1994
표지 컷 / 김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