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어루만져 사물을 빚는
몸의 언어, 돌의 말
한 시인이 여름 내내 자전거를 타고 연못으로 달려가 수련을 쳐다보다가 돌아온다. 그러자 언젠가부터 시인의 몸 안에 하얀 멍처럼 수련이 피었다. 그 멍을 지우기 위해 시인은 시를 썼다. 그리고 2002년, 시집 『수련』이 출간되었다. 연못의 어둠에서 꽃잎을 닫고 있던 수련이 그 시집에서 빛을 받아 활짝, 꽃잎을 열었다. “어둠이 빚은 개화”(송상일)였다.
그리고 몇 년 후, 시인은 무료하던 토요일 오후에 산을 찾는다. 예전에 찾은 적 있던 산이었지만 시인은 익숙한 길을 버리고 새로운 길로 접어든다. 금방 깊어진 산길을 따라 오르던 시인은 그곳에서 앞을 가로막은 큰 돌 하나를 만난다. 그리고 돌의 말을 듣는다. 그 돌의 말은 시인으로 하여금 언어에 대해 골똘하게 생각하게 한 계기가 되었고, 『수련』 이후 7년 만에 시인은 새로운 시집을 펴낸다.
『손가락이 뜨겁다』는 올해로 등단 21년을 맞은 채호기 시인이 전작 『수련』 이후 7년 만에 펴낸 다섯번째 시집이다. 몸과 언어에 대한 관심을 줄곧 시로 표현해온 시인은 뿌리와 줄기를 물속에 감추고 꽃만 물 밖으로 내민 ‘수련’을 언어가 몸이 되고 느낌과 생각을 그 언어로 표현하는 시와 동류로 받아들이고, 시와 수련이 겹쳐지는 접점을 시로 포착해내었다. 그것은 몸과 정신이 겹쳐지는 접점을 시로 표현하고자 했던 시인의 열망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나 “돌의 말”을 듣고 난 후, 시인은 하나의 깨달음을 얻는다. 그것은 바로 몸은 단순히 피와 살과 장기로 이루어진 신체가 아니라 언어를 중요한 부분으로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인은 자신의 외부에 있는 언어를 빌려다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에 들어 있으며 자신의 일부인 언어를 끄집어냄으로써 시를 쓴다는 것. 그럴 때 몸을 떠난 시의 언어가 바로 돌의 언어라는 것이다. 그래서 채호기 시인은 다시, “침묵의 의미로서의 돌의 말, 언어의 몸으로서의 돌”에 대해 쓴다.
이번 시집의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조강석의 말을 빌리면, “시가 사물과 새로운 계약을 맺었다.” 채호기의 시는 이제 “스스로를 어루만져 사물을 빚는다.” “저 부동을 어루만지는 손은 오래된 재현의 규약을 해지하고 자신을 돌본다.”
이번 시집에서 드러나는 채호기의 시적 언어는 사물의 재현을 통해 그 의미를 드러내는 것을 수행하는 것에서 더 나아간다. 재현을 뚫고 실재에 이르고자 하는 모험을 언어로 감행하고 있는 것이다. 조강석은 이것이 구체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언어로 재현의 막을 치고 다시 그것을 뚫어야 하는 모순된 운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채호기는 이 불가능한 작업을, 부재하는 ‘당신’과 수면 아래 놓인 ‘돌’과 뜨거운 ‘손가락’을 통해 보여준다. 이것은 몸이 빚어내는 것들이다. 그의 시가 감각적이고 관능적이면서 아름다운 이유다.
채호기 시인이 2007년 현대시작품상을 수상할 당시, 문학평론가 오형엽은 “채호기의 시는 차가운 이미지, 즉 유물론적 감각의 정확한 구사를 근간으로, 이것들을 퍼즐처럼 복합적이고 입체적으로 조합함으로써 뜨거운 상징, 즉 정신현상학적 아우라를 발휘하는 시적 연금술을 보여준다. ‘몸의 말’이 발산하는 이 차가운 물질성과 황홀한 관능성이 채호기 시의 방법론 첫 장을 이룬다”라고 평한 바 있다.
또한 김혜순 시인은 심사평에서, “우리 시단에 그만큼 시류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하는 시인도 드물지 않나 싶다”고 서두에 밝히고, “시는 모름지기 언어 예술이다. 그러기에 그 질료이며 모티프인 ‘시적 언어’ 자체를 집요하게 천착하여 해석의 진경을 펼치는 이 시인의 작업은 매우 귀중한 일이라 하겠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채호기 시인의 언어를 향한 집요한 탐구의 결실이 『손가락이 뜨겁다』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언어의 내부, 몸의 내부에서 반짝이는 돌의 말이 초여름, 독자의 마음을 두드린다.
시란 언어적 구성물이다. 동시에 시란 언제나 언어 그 너머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알다시피 시의 이러한 특성은 언어의 본질적 성격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초점은 언어와 실재 사이에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고, ‘언어의 질서’와 ‘언어로 표현될 세계의 질서’는 항상 서로 어긋난다는 점이다. 바로 이러한 문제에서 시의 힘과 아름다움이 발생하지만 모든 시창작의 난제 또한 이곳에서 생겨난다.
시를 쓸 때 시인은 언어의 질서를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그러지 않고는 언어의 작동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의 질서를 버리고도 시에 도달하는 일, 그 지난한 실현은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몸의 질서, 즉 의식이나 가슴이 아닌 몸의 반사 운동과 맞닿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에서 언어의 질서를 넘어서는 언어의 완성은 전면적이지 않고, 돌 틈을 파고드는 나무 쐐기처럼 부분적으로 이루어지며, 언어의 바깥인 실재에서 오지 않고 언어 내부에서 이루어진다.
_『시인세계』에 발표한 채호기 시인의 글 중에서
작품 속으로
너는 갇혀 있다.
너만 바라볼 수 있는 너의 거울 안에, 너는 갇혀 있다.
네가 잠드는 집과 출근하는 회사, 네가 말하는 언어의 벽들이 너를 감금하고 있다.
무엇보다 그 감옥 안에서 너는 안락함을 느끼기 때문에 도저히 탈출할 수 없다.
아무도 너를 갇혀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너조차도 네가 자유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너는 거의 포박되어 있다. ─자기 자신의 감옥, 모국어의 감옥, 자각할 수조차 없는 거울의 감옥!
새 봄이 오면 새 풀들이 자란다. 너의 머리에도 머리카락이 자라고 새로운 언어들이 거품처럼 일어난다. 날아갈 듯 파닥거리는 거품은 희망인가? 비눗방울들은 터지고 사라진다.
새파란 목장에는 소들이 풀을 뜯어먹지 못해 야윈다. 풀들이 말한다. 군데군데 흰 꽃들, 손 흔드는 언어들. 소들은 먹는다. 말하거나 침묵하지 않고 되새긴다. 네 통화 방식으로는 소들이 더 이상 파릇파릇한 초록 귀에 속삭일 수 없다.
언어로부터 추방된 사람들의, 부랑자들의, 불쌍한 사람들의, 포기하는 사람들의 언어. 네게서 자라나는 언어들은 얼기설기 얽힌 가시철조망, 강철프레스 같은 세계가 골통을 압박하듯 너의 생활 반경을 옥죈다. 태풍과 어울리는 기차.
네 주위에는 너를 발견하는 눈이 없고, 너 또한 너를 바라보는 시선의 독방에 잠겨 근심과 피로를 녹여 없앤다. ─좁고 깊은 한없이 꺼져드는 목구멍이여! 시야에서 아득해지는 길고긴 기찻길이여!
너는 더 이상 너를 알아보지 못한다. 거울에 비친 너는 목줄에 묶인 원숭이인데, 거울에 비친 너를 보는 너의 눈동자는 사라져버릴 허망한, 그러나 물리적인 빛의 환영을, 너라는 하나의 오브제를 탐색한다.
구경꾼 가득한 서커스 천막이 네 거울 속에는 고독의 깊은 복도이다. ─아아, 어떤 언어도 한숨으로 번역되는 물결도 깊이도 없는 거울 표면이여! 얕은 미궁의 착란이여! _「자화상」
돌은
시
눈으로
읽을 수 없는
당신
가슴에 빠트린
시
돌에 새긴
점자를 더듬어 읽어도
내용을 알 수 없는
시
손바닥에 감싸인
당신의
심장
읽지 않아도
두근거리는
시 _「당신의 심장」
하늘의 별은 뜨겁다. 밤은 차갑다. 벌거벗은 네 등은 차갑다. 내 손은 뜨겁다. 비가 오고 들판에서 피어오르는 뿌연 수증기. 내 손가락들이 수증기에 갇힌다. 물렁물렁해진 진흙에 발이 빠지듯 네 등을 산책하는 손가락들이 빠져든다. 네 등에 손톱 끝으로 고랑을 내며 글씨를 쓴다. 씨앗을 뿌린다.
흙이 글자를 끌어당긴다. 네 등에 묻힌 글자에서 싹이 돋고, 들꽃들이 피어났다. 밤은 뜨겁다. 꽃은 뜨겁다. 꽃의 향기는 시가 되어 손가락 끝에 만져진다. 네 등에 보이지 않는 무엇이 영원히 새겨졌다. 별은 뜨겁다. 손가락도 뜨겁다. _「손가락이 뜨겁다」
그녀는 각지고 둥그스름한 돌
앞에 선다. 그녀가 비치지 않는 돌
입 다물고 돌아서서 대화를 거부하는 돌
을 그녀는 바라본다, 돌
이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도록.
까맣고 노랗고 희고 푸른 모래들은 얼마나
긴 세월과 수많은 비바람을 압축하여
저 거대한 말의 덩어리가 되었나.
반짝이다 사라지고 흐려지다 나타나는
먼지들, 입김들은 허공중에 떠도는 얼마나
강한 사랑의 접착력과 서로 교배하는 음절들의 악력으로
하나의 우뚝 선 음악이 되었나.
구름처럼 시시각각 모이고 흩어지는 우연의 형상,
거무튀튀하고 단단한 쪼개질 수 없는 차갑게 식은
별이면서 그 속에 한숨과 동굴과 오솔길과 생각과
미로와 감촉과 계곡과 우주의 감정을 감추고 있는
결빙된 태양의 재, 그녀 앞에 그녀가 비치지 않는 돌.
돌 앞에 서기 전에 그녀는 숲의
오솔길에서 벗어나 나뭇가지와
가시덤불의 액자에 담긴 물에
도착했다. 파르스름한 영상들로 말을
건네는 물. 소리를 침몰시킨 풍경은,
고요가 수정으로 굳은, 거울에 비쳤다.
투영된 영상들의 긴장이 부드러운 물을
순식간에 투명한 금강석으로 만드는,
단어들을 고정시키는 문장 속 의미의 근육들
처럼 숲 속의 그 거울을 장식하는 낙엽들을
밟고 그녀가 물가에 섰을 때, 갑자기 물에
낯선 것이 솟아나고, 문장에 파문을 일으킨
말은 벌써 그녀 안에 어룽거렸다. 거울에 비친 건
그녀가 아닌 말의 영상이어서 매혹적으로 울렸다.
말을 끄집어내기 위해 그녀의 하얀 손이
거울을 깨뜨리며 물속으로 들어갔다.
물에 젖은 하얀 손이 돌
을 깎았다, 손이 물을
잡을 때까지. 돌부스러기들
이 하얀 손에 얼룩졌다, 돌을
읽을 수 있는 문장이 묻어날.
물에 젖은 하얀 손이 돌의 문장을
닦았다, 그녀가 비칠 때까지 문질
렀다, 돌이 그녀를 읽고, 그녀가 돌
에 비칠 수 있도록.
그러나 하얀 손이 물에 닿을 때 거울은 깨지고
영상은 흩어지고, 그림이 사라졌듯이, 불투명한
돌은 얇아져 반들반들한 거울이 되지 않고,
흐물흐물해져 수평의 물이 되지 않고
흩어져버렸다, 바람의 거대한 공허를 남기고.
그녀가 읽는 단어들이 나무로 우뚝하고
그녀가 읽는 문장들이 이끼로 미끄러운
그녀를 유혹하는 숲의 오솔길을 걷다가
그녀는 길을 가로막고 선 돌을 만났다.
각지고 둥그스름한 돌, 그녀는 돌을
펼쳤다, 문장 안에 그녀가 어룽거리며
비쳤다, 그녀 안에서 돌이 매혹적인 목소리로
울렸다.
숲 속의 밝은 햇빛이 눈동자에 머물렀다.
그녀가 물가에 섰을 때, 물에 비친 건
돌의 메아리, 검은 글자들이었다. _「돌의 메아리-마이산」
시집 소개
이제 그의 시는 수련이 아니라 산이다. 구체적으로 말로 빚어진 산 하나가 시 외부에 우뚝 서 있다. 그것은 사물이 스스로를 생성하고 구축한다는 사실의 고지이다. 시가 사물과 새로운 계약을 맺었다. 시는 이제 스스로를 어루만져 사물을 빚는다. 저 부동을 어루만지는 손은 오래된 재현의 규약을 해지하고 자신을 돌본다. 채호기의 손은 물에 빠진 돌들을 일으켜 마이산을 우뚝 세웠다. 거리가 사라진 것이 아니다. 거리를 고스란히 일으켜 세움으로써 이제 저 손은 어루만짐을 어루만진다.
시인이 쓰는 산문(뒤표지 글)
어느 늦가을의 토요일, 답답하기도 하고 무료하기도 해서 읽던 책을 덮고 파주에 있는 감악산을 찾아갔다. 예전에 갔을 때 올랐던 능선 반대편 쪽에 햇빛을 받아 거울처럼 반짝이던 저수지가 고적하고 황홀해 보였던 생각이 나서, 이번에는 늘 가던 길을 버리고 그 저수지 편으로 난 길을 찾아보기로 했다. 어렵게 찾은 그 길은 산자락에 있는 고요하고 아름답고 정겨운 마을 뒤편에 있었다.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산길은 금방 깊어졌는데, 산으로 들어서면서 마을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아 희미하게 지워져가는 길 때문이기도 했다. 자꾸만 자신을 은폐하는 잊혀져버린 길답게 낙엽은 발목까지 뒤덮였으며 늦가을의 꽤 쌀쌀한 바람이 정신을 번쩍 들게 하기도 했다. 그렇게 자연의 한 부분이 되어 한참을 올라가던 중에 갑자기 큰 돌 하나가 앞을 가로막으면서 길은 거기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때 나는 한순간 어떤 놀랍고 신비로운 느낌에 휩싸였다. 그것은 길이 사라져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어서가 아니라 유난히 검은 그 돌이 내게 말을 건넸기 때문이었다. 그 말은 내가 즉각적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그런 말이 아니어서 그 말의 의미를 해독해야만 했다. 나는 머리로는 그 말의 의미를 분석하면서, 몸으로는 그 돌을 타고 넘어갈 수 있는 길을 계속 찾았다. 나중에 그 돌을 우회하는 길을 찾기는 했지만, 나는 그 돌 주위에서 한참을 서성거리다가 결국 산행을 포기하고 말았다. 내가 산에 가는 이유는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서인데, 줄곧 그 돌이 한 말의 의미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날의 산행은 망쳐버리고 만 셈이었다.
그러나 그 사건은 내가 언어에 대해 골똘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나는 지금까지 몸에 대한 문제를 늘 염두에 두고 시를 써왔는데, 몸은 단순히 피와 살과 장기로 이루어진 신체가 아니라 언어를 중요한 부분으로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시인은 자신의 외부에 있는 언어를 빌려다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에 들어 있으며 자신의 일부인 언어를 끄집어냄으로써 시를 쓴다. 그럴 때 몸을 떠난 시의 언어는 돌의 언어가 아닐까? 누구의 말도 아닌, 발화되지 않고도 거기 있는 침묵의 의미로서의 돌의 말, 언어의 몸으로서의 돌. 아무튼 여기까지 흘러온 내 시의 정거장에서 나는 다시 출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