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의 책

한유주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09년 6월 5일 | ISBN 9788932019604

사양 양장 · · 372쪽 | 가격 10,000원

수상/추천: 한국일보 문학상

책소개

모래 위에 곧 사라질 글자들…
서서히 녹아 내려 흔적 없이 지워져갈 나, 너, 당신, 당신들……

한국 현대소설의 언어를 독창적인 글쓰기로 변주해가는
한유주의 두번째 소설집

“지상에는 여전히 그의 이름 붙은 책이 펄럭이고,
누군가 얼음의 책을 읽으며
그의 눈매 그의 미소 그의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들을 기억한다.

사라짐

사라짐으로 저자는 영원히 글 쓰는 자가 된다.
사라지지 않는 문자에 육체를 절여넣고
그는 낡은 외투처럼 사라지는 것이다”
―최승호, 「얼음의 책」에서

저절로 녹아 사라지는 차갑고 허망한 ‘얼음의 책,’ 이 불가능한 텍스트

2000년대 이후 한국 문단에 새롭게 등장한 20대 젊은 작가들 가운데, 소설의 전통적 문법에서 벗어나 단연 독창적인 글쓰기로 주목받아온 한유주가 자신의 두번째 소설집 『얼음의 책』(문학과지성사, 2009)을 펴냈다. 황순원문학상후보작(2008)이자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소설(2009)에 오른 「재의 수요일」을 포함한, 총 9편의 단편이 이번 작품집에 실렸다. 첫 창작집 『달로』(문학과지성사, 2006)를 펴낸 지 꼬박 3년 만이다.
2003년 당시 스물두 살의 재학생 신분으로 제3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단편 「달로」)하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한 한유주는, 이후 발표하는 소설마다 지금껏 우리가 익숙하게 여겨왔던 사물과 대상의 또 다른 세계를 열어젖혀 보여준다. 대상을 관찰하는 익숙한 눈(/시선)의 배반, 일상적 언어로부터의 일탈에서 촉발되는 새로운 감각과 사유, 하나로 고정되지 않는 텍스트의 다성성은 한유주의 소설을 감상하기 위한 기본 전제에 해당한다. 단어와 문장이 반복, 나열, 부정, 역전을 거듭하면서 직조돼가는, 낯설기 이를 데 없는 그의 소설(/언어) 속에서 화자의 행동과 목소리, 장면의 전환과 배치, 사물의 양태와 변형은 ‘응축’과 ‘폭발’의 과정을 오가며 소멸 직전의 서늘한 미적 감동으로 이어진다. 때문에 그의 소설은 완성된 형태보다는 글쓰기의 과정 그 자체를 중시하고 ‘사물의 편’에 서서 글을 쓰고 또 이미 씌어진 자신의 글을 끊임없이 고쳐 썼던 퐁주Francis Ponge(1899~1988)의 시들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흔히 말하는 ‘경계를 넘어서는 글쓰기의 열망’에 가장 충실하고도 열정적인 작가. 그가 바로 한유주다.

“지난 2003년, 2000년대 문학의 수상한 에너지가 한 시대에 새로운 공기를 주입하기 시작하던 무렵, 한국문학은 상상할 수 없었던 한 명의 작가를 발견한다. 그의 소설은 매혹적이고, 모호했으며, 돌연변이적이었다. 그의 소설은 어떤 언어로도 요약될 수 없었으며, ‘원 소스 멀티 유즈’가 될 수 없는 호환 불가능의 문장들을 뿜어내었다. 작가는 지나치게 젊었으며, 그의 놀라운 등단작이 첫 습작에 해당한다는 사실 등은, 하나의 신화가 만들어지는 극적인 조건들을 만족시켰다. 사람들은 오래고 상투적인 불면 속에서 얼핏 이상한 나라의 그림자를 본 것처럼, 그 존재의 이질성에 놀랐다. 6년이 지난 후, 이 작가가 신화가 된 것은 아니었다. 90년대 이후 한국문학의 모든 신화는 문학시장과 무관하지 않았으며, 이 작가의 소설이 대중적 열광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작가는 한국소설에서 독창적인 어떤 언어를 상징한다. 그 이질성은 물론 현대소설의 장르적 관습으로부터의 배반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 배반의 내용에 대해서는 ‘독백의 다성성’(우찬제), ‘서사시적 성격과 현대적 영성’(허윤진), ‘시적인 것의 현현’(강계숙)이라는 분석이 내려졌다. 2006년 첫번째 소설집 출간 이후, 이 작가는 소설 언어 자체의 자기 분석을 극한으로 밀고 나가면서, ‘부정문의 글쓰기’를 구축한다. 이 작가는 예민하고 미학적 자의식이 강한 예술가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소설 언어 자체가 소설적 탐구의 대상이 되는, 또 다른 변이의 공간을 생성한다. 한국 소설의 유전자 구조로부터 이탈하는 그녀의 소설적 실험은 진행 중이다. 그녀의 이름은 한유주다.”
(이광호, 「이야기의 무덤 속에서 글쓰기―한유주의 소설 언어」, 『문학과사회』 2009년 여름호)

“흰 페이지들 사이의 적막, 검은 글자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어봐

‘세계에 대한 묵시록적 관념, 말과 이야기 문화에 대한 혐오, 존재의 야만성에 대한 암울한 성찰, 운문적 특성을 지닌 수사의 원리’ 등으로 요약되는 창작집 『달로』를 통해 소설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송두리째 흔들어놨던 작가는, 이번 소설집 『얼음의 책』에서, 글쓰기의 과정을 그대로 현전하는 이야기, 소설가가 소설을 쓰는 행위를 재현한 글들의 형태에 집중하고 있다. 일상에서 파악되는 부분과 파악되지 않는 부분들의 틈, ‘현대적 운명’이라 말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과제 앞에 선 존재, 이해할 수 없는 음악이나 추상화를 접했을 때 느끼는 감동과는 사뭇 다른 ‘쾌(快),’ 딱히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이 ‘어떤 것’들에 주목하는 한유주의 문장과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우리의 감각이 열리고 새로운 언어의 그림을 그려보는 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 필요하다면 암송과 음독을 통해서라도 그의 소설을 읽고자 하는 마니아 독자들과 평자들의 궁금증과 기대, 그리고 상상력을 늘 기대 이상으로 충족시켜가며 오늘의 한국 소설을 새롭게 쓰고 있는 작가 한유주. 그의 내일이 더욱 궁금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두번째 창작집 『얼음의 책』에서 한유주는 소설 언어에 대한 보다 투철한 자기 분석에 집중한다. 이야기의 선조적 인과성을 버리고, 화자의 정서적 개입을 철저하게 제거하고, 이야기를 통한 인식론적 발견을 완전히 포기한 다음에도 ‘서사’는 남아 있는가? 이 질문 속에서 이야기의 존재론은 글쓰기의 존재론으로 전환된다.
이야기의 인과성이란 시간과 시간 사이의 매듭과 논리적 연결에 의해 구성된다. 하지만 물리적인 시간 자체는 무의미하며, 그 안에는 ‘문법’과 ‘문장’과 ‘단어’가 없다. 장면을 구성하지 않는 것은, 이런 시간 자체의 ‘자연성’ 그 본래적인 무의미성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그것은 사건의 ‘배후’ ‘내막’ ‘전말’을 탐구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사건의 맥락과 인과성을 밝히지 않을 때, 사건의 인물과 주어들은 지워진다. 유령의 화자, 유령의 글쓰기란 무엇인가? 그것은 움직임으로 가지고 있지만, 내용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흔적을 가지고 있지만, 형태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이다.
한유주의 소설적 모험은 이야기의 주체화를 끊임없이 저지하는 것이다. 이야기를 구성하지 않고, 이야기의 주체를 비인칭화한다.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지껄이는 사람처럼, 감정의 개입과 의미의 맥락과 장면의 구성을 지워나가는 글쓰기를 밀고 나간다. 궁극적으로는 말하는 자뿐만이 아니라, 보는 자의 시선의 프레임마저 지우려 한다. 이야기를 구성하는 주체, 혹은 시선의 주체는 모두 ‘교활한’ 권력을 소유한다. 기차 속의 시간과 공간을 묘사하는 「막」이라는 소설에서, 묘사의 주체화를 거부하는 글쓰기를 시험하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이다. 보는 자와 보이는 자의 경계, 보는 자가 구성하는 이야기와 보이는 자가 겪는 사건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시간과 공간의 궤적을 지워버리면, 그 안에 거주하는 인간들 역시 지워진다. 이야기를 지워버리면, 인간의 얼굴도 지워진다.”
(이광호, 「이야기의 무덤 속에서 글쓰기―한유주의 소설 언어」, 『문학과사회』 2009년 여름호)

씌어졌으나 종래엔 아무것도 쓰지 않은 소설, 끝없이 말하면서도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이야기, 그것을 쓰(지 않)겠다는 것이 한유주의 욕망이다. 음악으로의 도주를 포기하고, 오염된 문자들의 수사에 맞서서, 바로 그 오염된 문자를 통해, 그것들을 돌파해내고야 마는, 순백의 소설 쓰기. 김형중(문학평론가)

없는 것이 있는 것을 대체한다. 긍정으로 가능한 세계의 불완전함이 부정의 불가능성으로 대체된다. 매혹적인 현장이다. 한유주는 이 매혹에 치열하였다. 기록/발화됨으로써 스스로 간극(불가능성)을 내포하는 언어의 분열적 운명에 직핍하였다. 백지은(문학평론가)

작가의 말

얼음을 얼리려면 기다려야 한다, 고 이 글의 첫 문장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다음의 문장을 쓸 수가 없다. 2009년 5월 16일이다. 비가 단정하게 내리고 있다. (비가 단정하게 내리고 있다, 는 문장을 나는 이미 어디선가 쓴 적이 있다.) 여전히 다음의 문장을 쓸 수가 없다. 그러나 써야 할 것이다.
나는 당신의 입을 빌려 말하고, 당신의 입을 벌려 말한다. 내가 쓴 문장들은 모두 당신에게서 비롯되었다. 그것이 부끄러워서, 한때는, 이 책의 모든 문장들을 부정문으로 고쳐 쓰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고, 그러지 못했다. 부정의 소여를 부정하기란 불가능했다.
W로 시작하는 성을 지닌 한 오스트리아인이 말하길, 나는 그를 남몰래 질투해왔는데, 의심은 믿음 이후에 온다고 했다. 이 책의 모든 문장들은 의심과 믿음 사이에서, 혹은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기록되었다. 이것이 내가 이 책에 대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변명이다.
내가 이 짧은 글을 좀처럼 쓰지 못했던 까닭은, 감히 당신들의 이름을 부를 수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여백이 모자란 탓에 명제의 증명 과정을 적지 못했다는 어느 수학자의 말을 빌려, 나 역시도, 내가 소유한 페이지들이 지나치게 많거나, 지나치게 적은 탓으로, 당신들의 이름을 적지 못했다고 말하고 싶다. 내게는 단 한 명의 독자가 복수로 존재한다. 당신, 당신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얼음을 녹이려면 기다려야 한다, 고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을 쓰고 싶었다.
나는 기다린다.

수록 작품 발표 지면

허구 0 『자음과모음』 2008년 가을호
K에게 『문학과사회』 2006년 겨울호
흑백 사진사 『작가세계』 2007년 여름호
육식 식물 『현대문학』 2007년 12월호
재의 수요일 『세계의 문학 2008년 여름호
되살아나다 『문장 웹진』 2008년 11월
장면의 단면 『문학들』 2008년 겨울호
서늘한 여름 사냥 『문학수첩』 2009년 봄호
막 『문학과사회』 2009년 봄호

본문 속으로

[허구 0]
모든 문장의 주어에서 나를 삭제하고, 그 자리에 당신을 넣고 싶다.
이 글을 읽지 않기를 바라는 단 한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는 복수로 존재한다.
내게는 음악과 시간이 더 필요하다. 그리고 아직 쓰이지 않은 문장들이, 더 많이, 많이, 라는 부사에 대해 생각한다. 더 많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내게는, 시간이 지나치게 많이, 남아 있으므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야기들은 이야기되어지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지금 쓰고 있는 문장들은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하지 않는다. 그저 글자들의 총합인 것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일기도 아니다. 여행기도 아니다. 원예서적은 더더욱 아니다. 상품 카탈로그도 아니다. 소설로는 가능할까?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확신할 수는 없다. 잉크가 흐려지고 있다.

[K에게]
그렇게 당시의 나는 발음이 유사한 단어들을 늘어놓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언뜻 비슷하게 들리는 단어들을 반복해서 중얼거리다 보면 본래의 의미들이 서로 뒤섞이고 갈라지고, 달라지고, 사라지고, 멀어지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말들의 무덤을 보고 있는 것 같았죠.

단지 내가 지금 쓰고 있다는 사실, 그것만이 중요해요. 덧없이 사라지는 의미들, 활자로 수렴되지 않는 소리들, 백과사전의 여백에만 겨우 존재하는 단어들.

어떤 사람들은 무심코 흘린 말 속에 진심이 들어 있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나는 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요. 그래서 오늘, 나는 농담조차 하지 못해요. 쓰는 것, 쓰고 있는 것, 그것만이 중요하죠. 나를 봐요. 이게 나예요. 내가 나를 바라보지 않는다면 누가 나를 볼 수 있을까요?

[흑백사진사]
끝나지 않는 경기란 없고 기승전결이 없는 경기도 없는 법이다. 나는 불안하다. 어쩌면 내 삶은 여기서 끝날 것이다. 나는 애써 미래 시제를 사용한다. 소용없는 짓이다.

[육식 식물]
모든 감각들은 지속하거나 지속하지 않았고 쉽게 붕괴했다. 대부분의 상품들은 정도의 차가 있을 뿐 결국에는 소모품이었고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우리가 시간을 견디는 방식이라 했다. 사물들과 사람들은 언제나 이동 중이었고 그러므로 당신, 이라는 말의 의미가 고정되지 않고 흔들리는 것이 나의 잘못은 아니었다.

[재의 수요일]
세상의 모든 이야기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혹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씌어졌다.
나는 내용의 절반 이상을 알아듣지 못했다. 나는 혼잣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이 이야기를 쓰지 않았다. 부정문은 대개 긍정문보다 길었다.

[되살아나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란 어렵지 않았지만, 쉽지도 않았다. 그 모든 저항에도 불구하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한 글자씩, 한 문장씩, 전진하는 이야기들을, 말하지 않을 수 있다면, 까다로운, 어느 정도까지는 사건의 내막, 불편한 농담, 이야기가 발생하는 지점은 혀끝인가 화자의 의식인가 청자의 귓바퀴인가, 부득불 입을 다물지 않고, 나와 여러 개의 핏줄을 나누어 가진 아이들이, 농담을 배우는 시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는다면, 나와 당신들은,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이야기를 보고 듣게 될까.

[장면의 단면]
이토록 핏기 없이 푸른 아침, 사위어가는 의식을, 촛농처럼 굳어가는 정신을, 가라앉는 시선을, 처리할 방법을 찾지 않는다. 시간이 저물고 있지 않았다. 시간의 오물을 처리할 방법을 찾지 않는다. 시간은 없다. 아니다. 시간이 없다. 아니다. 시간은 없다. 물줄기와 화살은 같지 않다. 시간에 대한 모든 비유는 적절하지 않다. 그럴듯한 비유는 없다.

단 하나의 사물이 깊고 넓은 얼룩을 만들지 않았다. 그것을 보지 않는다. 그것을 보지 않겠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그것은 불가능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능하지 않았다. 이것은 조서나 자술서가 아니다. 이것은 고백이나 독백이 아니다. 영원히 감출 수 있는 이야기는 없다. 알려지는 것, 드러나는 것, 벌어지는 것. 불가능한 이야기는 없다. 영원히 멈출 수 있는 이야기는 없다. 세상의 모든 화자들은 살해되지 않는다.

[서늘한 여름 사냥]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까. 그러니까, 이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까. 아니, 이 이야기는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떻게. 이 이야기는 이미 시작되었다. 이 이야기는 곧 끝나게 될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운명을 믿느냐고 묻기에, 믿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 이야기가 시작되고 난 지금, 여전히 운명을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개척과 개발이라는 단어에는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오히려, 어떠한 저개발 상태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이야기가 이미 시작되었으므로 이야기의 시작을 저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불가능했다면, 이야기의 끝은 아직 생각하지 않아도 좋았다. 처음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쓸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 슬펐지만, 슬픈 까닭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고, 슬프다고 쓰는 짧은 순간 동안 이유를 알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저 일어나는 사건들을 끝없이 지연시키고 싶었다.

[막]
함축적인 대화들, 암시가 깃든 눈길들, 젖은 손길들, 은밀한 몸짓들을 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없었다. 모든 사건들은 결정적이었고, 그러한 국면들은 지치지 않고 되풀이되었으며, 허구는 거짓말은 아니었으나, 모든 이야기들은 거짓말들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과거형으로 문장을 쓰는 것은 일종의 쾌감을, 지나간 모호한 일들과 지금 이 순간이, 유리되어 있다는 기쁨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를 떠올림으로써 현재가 고정된다는 강박을, 아니 나긋나긋한 즐거움을 안겨준다. 가야 할 곳은 언제나 떠나야 할 곳이었고, 그래서 사람들은, 모든 이야기의 등장인물들은 떠나야만 한다. 어떤 이야기들은 시간보다는 장소에 묶여 있었고, 바로 그곳에서, 사람들은 어미를 잃은 포유동물들처럼 불안하게 서성거렸다. 단 한 번도 떠나지 못한 사람들조차, 물리적인 시공간과는 관계없이, 어느 페이지들을 더듬었고, 종이 다리를 건너는 듯 위태하게, 당신이 꿈이라고 부르는 장소를 방문했고, 방황했다. 기대 없이.

작가 소개

한유주 지음

2003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달로』 『얼음의 책』 『나의 왼손은 왕, 오른손은 왕의 필경사』 『연대기』 『숨』, 중편소설 『우리가 세계에 기입될 때』, 장편소설 『불가능한 통화』가 있다. 한국일보문학상, 김현문학패를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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