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서 생명을 발견하는 빛의 희망
올해로 등단 19년을 맞은 박라연 시인의 여섯번째 시집 『빛의 사서함』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한 후, 같은 해에 이 등단작을 표제작으로 한 첫 시집을 펴냈던 박라연은 따뜻함과 섬세함이 배어 있는 잔잔한 시 세계를 펼쳐보인 이 시집으로 평단과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또한 그 이후에는 활발한 시작 활동을 통해, 대상에 대한 깊은 사랑에서 솟아나는 따뜻함과 그 사랑에서 생명의 율동을 찾아내는 섬세함을 바탕으로, 가난과 외로움·슬픔·아픔·헤어짐을 주조로 하면서도 밝고 아름다운 시들을 꾸준히 선보여왔다. 전작 『우주 돌아가셨다』 이후 3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 역시, 등단 이후 박라연이 줄곧 추구해온 시 세계의 연장선상에서 그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빛의 사서함』이라는 시집의 제목에서도 암시하듯이, 2008년 윤동주상 문학 부문 대상을 수상한 「상황 그릇」을 비롯한 총 60편의 시를 통해, 박라연은 삶에 어떤 고통과 시련이 오더라도 그것에 절망하기보다 빛의 희망을 찾는 일을 이번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시집에서는 13년 전에 출간된 박라연의 세번째 시집 『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의 해설을 쓴 바 있는 문학평론가 오생근이 다시 한 번 박라연 시집에 해설을 쓴 것이 눈에 띈다. 그 오랜 인연 때문일까. 이 시집에 묶인 작품뿐 아니라 박라연의 시적 변모를 찬찬히 지켜본 후, 지금에 이르러 시인이 이룬 시적 성취를 조망한 그의 해설은, 이 시집에 대한 이해의 폭을 더욱 넓혀준다. 오생근은 “그녀의 시적 원류에는 눈물과 슬픔의 풍부한 자원이 있지만, 그것은 비극적이거나 처연한 것이기는커녕, 건강하고 아름다운 생명력을 잉태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는” 점을 13년 전 박라연의 시에 대한 이해의 출발점으로 삼았다는 언급으로 해설의 서두를 열었다. 그리고 이번 여섯번째 시집은 “그 어느 때보다 풍부하고 활달한 상상력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특히 눈물을 주제로 한 새로운 해석에서 사랑의 문법에 익숙해진 시인의 깊이 있고 원숙한 시선을 지적하면서, 슬픔의 눈물이 행복의 눈물로 변화한 것이야말로 박라연 시 세계의 변모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설파한다.
감정과 생각을 과장하지 않고 소박하고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시인의 겸손한 모습은 삶에 대한 감사와 모든 존재와 생명에 대한 근원적인 사랑에서 비롯된 것일 터. 때문에 그녀의 시에 드러나는 고통은 언제나 희망으로 이어지고, 시적 자아는 상처 속에서도 늘 새로운 사랑을 찾는다. 또한 신성한 존재에 대한 소박한 믿음의 바탕 위에서 삶과 세상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시인의 태도는 세상의 모든 상처와 죽음에 생명을 부여하는 적극적 모성의 의지와 상상력의 발휘로 이어지며, “빛”과 “밥” 등의 비유로 시인의 모성적 상상력에 더욱 힘을 싣는다. 고사목에서 생명의 빛을 발견(「고사목 마을」)하는 식의 시적 상상력은 삶에서 죽음을 찾기보다 죽음에서 생명을 발견하는 일을 더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시인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준다.
이메일과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가 생활화된 요즘. 우편함에서 누군가의 마음이 담긴 우편물을 발견하기란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각종 고지서와 전단지만 뒹구는 우편함은 반가운 소식이나 따뜻한 마음을 전달 받는 역할에서 비껴난 지 이미 오래이다. 여기, 먼지 가득한 우편함을 가진 당신을 위한 아주 특별한 사서함이 마련되었다. 아니,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당신을 기다려온 낡은 사서함이다. 먼지 쌓인 당신의 우편함과 다를 바 없이 보이는 사서함. 그러나 가만히 손을 넣어보길 바란다. 그 곳에선 “빛이, 뭉클 만져”(「고사목 마을」)질 것이고, “잘 익은 근심들”이 “붉고 노란 웃음소리로”(「빛의 사서함」) 거기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작품 속으로
피를 빛으로 바꾼 듯
선 자리마다 검게 빛났다
아는 얼굴도 있다
산 채로 벼락을 몇 번쯤 맞으면
피를 빛으로 바꾸는지
온갖 새 울음 흘러넘치게 하는지
궁금한데 입이 안 열렸다
온갖 풍화를 받아들여 돌처럼
단단해진 몸을 손톱으로 파본다
빛이 뭉클, 만져졌다
산 자의 밥상에는 없는 기운으로
바꿔치기 된 듯
힘이 세져서 하산했다 ─「고사목 마을」
거주 만료된 몸을 나와
저세상으로
가던 길목에서 문득 희로애락을 끌고
평생 수고해준
제 몸을
한 번 더 보고 싶어진 영혼처럼
그녀
차를 돌려 살던 집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숟가락 소리 웃음소리 서류와 옷
가구와 상처와 추억이
집을 빠져나가니 싸늘히 식어버렸구나!
무릎을 꿇고 함께 견딘 시간들을 주물렀다
인공호흡까지 시켰다 입을 달싹거리며
알은체하자 그녀
노잣돈 건네듯 움트는 동녘 햇살을 혀끝으로 떼어 덮어주었다
설익은 밥
높고 외롭고 쓸쓸한 정신을
흉내만 낸
나의 밥을
오랜 세월 맛있게 먹어준
집에게 큰절하며 돌아섰다 ─「동병상련의,」
눈물도 식량인데 헐값의 눈물들을 쌓아둘 곳간 궁리할 수밖에
다운증후군을 껴입고도 배우가 된 청년 강민휘, 배우로 사는 일이 행복해서 흘리던
절체절명의 갈비뼈에서만 순 트는 육체가 행복한 눈물이라면
가장 추운 산에서만 길들여진 바위와 한솥밥 먹을 수밖에
얼다가 녹고 녹다가 얼면서 내 눈물 자라 옹달샘만큼 저를 넓혀 용암처럼 끓다가
방울방울 무사히 흘러나와 빵을 굽고 차를 끓이고 추운 가슴 골고루 덥힐 수 있다면
─「낡아빠진 농사」
빛을 열어보려고
허공을 긁어대는 손톱들
저 무수한 손가락들을 모른 척
오늘만은
온 세상의 햇빛을 수련네로
몰아주려는 듯
휘청, 물 한 채가 흔들렸다
헛것을 본 것처럼 놀라
금방 핀 제 꽃송이를 툭 건드리는데
받은 정을 갚으려고 빛으로 붐비는
다이애나 妃와 오드리 햅번까지
활짝 눈을 떴다
팔뚝만 한 쇳덩이가 바늘이
될 때까지 불덩이에 얹혀살다가
불의 그림자로 바느질한 빛의 사서함
그녀들의 사서함이 代 끊긴 수련들을
붉고 노란 웃음소리로 불러냈을까
깊은 울음만이 진창으로 흘러들어가
붉고 노랗게 웃을 수 있는 것일까
생각하는 사이에
수련이 또 수없이 피어났다
잘 익은 근심들을 붉고 노란 웃음소리로
뽑아내듯 ─「빛의 사서함」
시집 소개
시련 없이 성숙할 수 있는 사람은 없듯이, 죽음의 고통 없는 생명의 탄생도 불가능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죽음이 삶 속애 있다는 깨달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죽음의 시련을 극복해서 새로운 삶의 의지로 사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박라연은 삶에서 죽음을 찾기보다 죽음에서 생명을 발견하는 일을 더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시인이다.
『빛의 사서함』이란 제목이 암시하듯이, 삶에 어떤 고통과 시련이 오더라도 그것에 절망하기보다 빛의 희망을 찾는 일은 그녀의 모든 시를 특징짓는 요소이다.
시인이 쓰는 산문(뒤표지 글)
무슨 말로 부탁했을까. 백오십여 명의 목숨을!
기장 체슬리 B 슐렌버그는 찰나에 폭파 직전의
비행기를 허드슨 강에 무사히 올려놓았으니!
문득 내 사서함의 빛들이 사과나무 한 그루라도
살려내는 주문이 될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미안하다는 생각과 고맙다는 말을 가슴에 쟁이기
시작하면 가능할까. 온몸에 붉고 노란 수련이 봉긋
봉긋 송아 죄인처럼 숨어서 짓던
지난해의 미소를 조금씩 베어 음미하며 내일들을
견딜 생각이다. 천벌처럼 맞고 살았던 비(悲), 비(卑),
비(秘), 포도주처럼 받아 아껴 마시며
껴안을 세상과 맞서 싸울 세상에 대한 탐구 또한
발품 팔아 영혼을 팔아 사겠다고 옹알이하며
한 발 내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