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담

문학과지성 시인선 354

김경주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08년 10월 31일 | ISBN 9788932019017

사양 · 168쪽 | 가격 12,000원

책소개

“숨이 찬 인어(人語)들의 멀미로 울렁이는” 이상한 이야기

그는 2003년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시인의 길로 들어섰다. 그로부터 2년 뒤인 2005년, 대산창작기금을 받으며 “걱정스러울 정도로 뛰어난 시적 재능”이라는 심사평을 들었던 그는 다음 해인 2006년 첫 시집을 냈다. “한국어로 씌어진 가장 중요한 시집 가운데 한 권이 될 것이다”라는 극찬을 받았던 그 시집은 현재까지 만 부가 훌쩍 넘는 판매고를 올리면서 많은 독자에게 그를 알렸다. 그리고 2년이 흘렀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354 김경주 시집 『기담』이 출간되었다. 그의 두번째 시집이다.
첫번째 시집을 향해 쏟아진 무수한 감탄과 탄식만 미루어보더라도, 그의 두번째 시집에 대한 문단과 독자들의 기대가 얼마나 클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김경주 시인의 두번째 시집 『기담』에 대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기대는 어쩌면 보기 좋게 빗나갈지도 모른다. 2006년, 그의 첫 시집이 아무도 짐작할 수 없었던 강력한 흡입력을 가지고 우리 앞에 나타났던 것처럼. 김경주 시의 힘은 바로 거기에 있다.
“타고난 직관으로 자기 앞에 놓인 새로움이 미지의 것이며, 자신이 온몸으로 그것을 향해 나아갈 때 그 정체가 비로소 눈앞에 펼쳐질 것임을 본능적으로 간파하며 움직이는” 시인. ‘이 세상에 없는 계절’에서 온 심미적 모험가가 펼쳐놓는 ‘이상야릇 재미있는 이야기[奇談]’가 이 가을, 독자들을 낯선 시간과 공간 속으로 안내한다.

새로운 예술적 경지를 향한 언어들의 향연
‘2007년 문인들이 뽑은 가장 좋은 시’에 선정된 「무릎의 문양」을 포함하여 총 42편이 묶인 이번 시집은 3개의 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가 아닌 ‘막’으로 이루어졌다는 데에서 이 시집이 희곡의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실제로 김경주 시인은 ‘혜화동 1번지’에서 자신의 시 제목이기도 한 「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라는 작품을 올리며 극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그러나 시집이 희곡으로 이루어지진 않았을 터. 그곳엔 우리가 생각하는 시도, 우리가 알고 있던 희곡도 없다.
‘제1막 인형(人形)의 미로’는 희곡의 지시문과 같이 시작된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이 시집 안은 “어둠 속에서 언어들만이, 지면 속에서 떠올라, 우리가 알 수 없는 자연을 떠돌아다니듯이 부유하고” “극의 시작부터 끝까지 암전”뿐이다. 또한 시인은 이것이 “들리지 않는 음악으로만 만들어진 음악극”이면서 “언어들이 지면에서 빚어내는” 언어극이라고 밝히고 있다. “미로와 멀미 속에서 활공하”던 언어들이 “지면 속에서 빠져나”와 “천천히 지면을 걸어 다”니다가 허공에 입을 벌려 대사를 읊는다. 이어서 반대편에서 등장한 다른 언어들이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리고 잠시 긴 사이를 두고 “우리가 모르는 수면으로부터” 시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그것이 기담이다.
“시도 극도 아닌, 하지만 시도 극도 아직 실현해보지 못한 장르 미상의 어떤 새로운 예술적 경지를” 향한 욕망을 시집 『기담』은 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시인 김경주가 사용하는 단 하나의 강력한 무기는 바로 언어이다.
자신의 태몽을 꾸는 그 잠을 화술로 이식하여 만든 무덤(「기담」), 기어이 새가 되고 마는 떠내려가는 빛을 문장으로 이장하여 치르는 장례(「풍선의 장례」), 공포로 세계를 견디는 제물이 되어 그 참혹 속에서 미혹에 붙들린 채 자신의 형신(形神)이 어디로 바쳐지는지 모르고 추는 가장 연연한 춤(「프리지어를 안고 있는 프랑켄슈타인」)이 지면이라는 무대 위에서 언어들이 펼치는 연극이자 시다.
제2막에서 그것은 ‘멀미’로 나타난다. 인어(人語)가 일으키는 멀미. 내부에서부터 우루룩 밀려 올라오는. 한편으로 멀미는 “몸의 파문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살을 맴도는 자리 같은” 무릎의 이미지와도 연결된다. 김경주 시인이 들려주는 기담은 “무릎이 멀미를 하며 말을 걸어오는 시간”에 펼쳐지는 “시간의 관절에 대한 이야기”(「무릎의 문양」)인지도 모른다. 시집 전반에 걸쳐 ‘틈’ ‘사이’ ‘구멍’이 자주 언급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제3막에 이르러 ‘구멍’은 활공한다. “구멍을 갖고 싶어 책을 몇 권”(「구멍」) 낸 시인이 도착한 곳은 ‘기록’이다. 그곳은 “흔들리고 살기에 참 좋은 무덤”(「우리들의 변성기」), ‘시’다. 결국 ‘구멍’과 ‘기록’은 ‘시’의 다른 이름일는지 모른다. 이 한 편의 극이 끝을 맺을 때에 이르러서 그의 시는 정지된 듯 보이지만 가장 자유로운 활공을 시작하는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이 꾸는 꿈
이번 시집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강계숙은 이오네스코의 ‘부조리 언어’를 언급하며, 거기서부터 시작되어 “존재 자체가 이미 페르소나이기에 발설되자마자 극(劇)의 몸을 갖는 말,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불가능한 시가 되려는 말, 그러한 말의 꿈”으로서 탄생된 “프랑켄슈타인-어(語)”로 김경주 시를 이야기한다. 김경주 시인의 이 프랑켄슈타인어는 “언어의 부조리성을 극대화시킴으로써 언어 스스로가 완전한 자율체로 거듭나는 지점을 찾으려는 시적 꿈의 소산”으로서 “꿈의 언어이며, 언어의 꿈,” “그리고 지금까지 없었지만 앞으로 있을 시, 이 세상에 없었으나 이제 곧 생겨날 미래태(態)”라는 것이 그의 설명. 그리하여 그는 “프랑켄슈타인어는 미래의 시를 지칭하는 다른 표현이”라고 단언한다.
강계숙은 여기에 덧붙여 “인조 인간을 만들어낸 박사의 이름이자 동시에 그가 만들어낸 기괴한 괴물의 이름이기도” 한 “‘프랑켄슈타인’은 인간의 형상을 띤 인형”이지만 ‘인형’으로서의 정체를 자유롭게 누리려 하는데, 그것은 다시 말해 “언어와 언어 사용자가 분리되지 않은 상태, 즉 지금껏 존재하지 않았던 언어 너머의 언어로 존재하려 한다는 점에서 아직 없었던 미지의 시를 계시한다”고 설파한다. “그것은 일종의 초(超)-언어이며, 언어가 자의식적 존재로 화(化)하는 것에 가깝다”는 것이다. 따라서 “‘프랑켄슈타인’은 새로운 언어이자 그 언어의 주체”라고 할 수 있다.

그 프랑켄슈타인이 독자에게 프리지아 꽃을 바친다.

“이 꽃을 받아주시겠습니까?”(「프리지아를 안고 있는 프랑켄슈타인」)

■ 작품 속으로

지도를 태운다
묻혀 있던 지진은
모두,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태어나고 나서야
다시 꾸게 되는 태몽이 있다
그 잠을 이식한 화술은
내 무덤이 될까?

방에 앉아 이상한 줄을 토하는 인형(人形)을 본다

지상으로 흘러와
자신의 태몽으로 천천히 떠가는

인간에겐 자신의 태내로 기어 들어가서야
다시 흘릴 수 있는 피가 있다
─『기담』

하늘에 포르말린 흩어진다

구름이 하늘에서 풍선 속을 통과한다
그건 구름이 풍선의 장례를 치르는 일

저녁은 공중이 지상으로 내려오는 일
내려온 공중에 가득 찬 수면을 바라보는 일
다른 선으로 빛이 떠내려가는 일

떠내려가는 빛이 기어이 새가 되고 마는 일이 있다
그 빛을 문장으로 이장하는 일 그건 내가 이 세상에서 바꾸어
부르기로 한 일, 문장의 일

구름이 허적허적 게워내고 있는 풍선

혁명. 다른 피를 밴 구름
연필이 마신 등고선들
떠오르는 순간 장례를 치르는 문장
음울한 한 짐승의 물방울

죽은 다음에야 풍선을 비울 수 있는 육체,
그건 내 나비의 실내에 부검이 못 들어오는 일
나는 배다른 구름의 일

표본실엔 물방울 짐승
─『풍선의 장례』

J, 밤이면 내가 쓰는 언어는 짐승의 빛깔이고 새벽이면 내 언어는 식물의 빛깔이 됩니다. 인간의 돌멩이를 피해 달아나 꽃을 안고 당신에게 달려가다가 나는 풀숲에 엎드려 있습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위해서 치러야 할 목젖의 일이 입을 벌리고 내 미라를 꺼내주는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꽃들의 붉은 똥을 마시고 뼈에 연보라색 불이 들어오도록 음악을 종일 들었습니다. J, 인간의 곁으로 가기 위해 나는 경(經)을 버렸습니다. 사물로부터 불어오는 만물의 경계를 오래 바라보며 사물과 맹목을 지나 나는 내 눈의 수액이 구름 속으로 스미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구름이 흰 뼈를 드러내는 시간은 내 얼굴이 노란 화상을 입는 시간이고 구름이 흰 손가락들을 내 얼굴에 집어넣는 시간은 당신을 향한 내 몸의 뼈들이 붉게 부어오르는 면입니다. J, 오래전 나는 헛간에 앉아 한 새장을 기르다가 죽은 새를 보았습니다. 맞아요 J, 새는 새장을 기르지 못합니다. 새장은 깃털을 모아두고 ‘날개’로 자신의 ‘혀’를 놀리다가 가는 또 다른 새일 것입니다. 구름 속에서 달이 허우적거립니다. 자기 허공에 색을 모으다 가는 달의 체내로 구름을 견디느라 지금 이 시간으로는 그대를 부르지 못합니다. 구름 속에서 달은 미천한 눈을 천둥의 수분에 맡기고 구름은 망각을 다른 수면으로 이동시키는 중입니다. 그렇지만 구름의 세계에서 보자면 달도 자신의 배색에 불과합니다. 둥둥 떠 있다가 허우적거리는 일에 불과한, 허우적거린다는 것은 의식이 생활에 더 밀착해 있다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허우적거린다는 것은 사물을 더 이상 이런 방식으로는 표현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평면 위에서 점점 착오가 되어간다는 겁니다. J, 나는 내내 이 착오를 완성하고 그 미개로 죽겠습니다. J, 제물은 언제나 같은 이유로 제단에 바쳐지곤 했습니다. 제물은 언제나 우울이 아닌 공포로 세계를 견디고 있어야 했습니다. 수많은 척후병들의 도움을 받아 그 공포는 더욱 단단해지고 모든 운동은 음표를 잃어가고 참혹해지고 있습니다. 거기서 우리의 은유는 얼마나 적대적인 것이 되어버렸습니까? 제물은 헛소리를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미혹에 붙들려 제물은 자신의 형신(形神)이 어디로 바쳐지는지 모를 때 가장 연연한 춤을 춥니다. 혼효한 나의 필체는 공포의 대상 앞에서 더욱 활기를 가졌습니다. 구름과 달은 서로의 수면에 누워 있듯 서로의 상(像)에 스미는 헛소리입니다. J, 경마용 말과 짐 끄는 말 사이에 지금 나는 숨어 있습니다. J, 사랑하는 나의 J여, 혼란의 형신을 수용할 수 있는 형식을 나는 찾고 있습니다. 나는 내 생애 가장 유사한 교란이거나, 나의 편의를 돌보는 이 (피부의) 왜곡으로 저의를 갖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우리가 모르는 생태계로부터 불어오는 이 꽃의 따귀를 때리신다고 하더라도. 내내 참혹엔 친필이 없습니다. 이 꽃을 받아주시겠습니까. 당신의 미라로만 나는 사랑입니다.
─『프리지어를 안고 있는 프랑켄슈타인』

1

저녁에 무릎, 하고
부르면 좋아진다
당신의 무릎, 나무의 무릎, 시간의 무릎,
무릎은 몸의 파문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살을 맴도는 자리 같은 것이어서
저녁에 무릎을 내려놓으면
천근의 희미한 소용돌이가 몸을 돌고 돌아온다

누군가 내 무릎 위에 잠시 누워 있다가
해골이 된 한 마리 소를 끌어안고 잠든 적도 있다
누군가의 무릎 한쪽을 잊기 위해서도
나는 저녁의 모든 무릎을 향해 눈먼 뼈처럼 바짝 엎드려 있어야 했다

“내가 당신에게서 무릎 하나를 얻어오는 동안 이 생을 가고 있습니다 무릎에 대해서 당신과 내가 하나의 문명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내 몸에서 잊혀질 뻔한 희미함을 살 밖으로 몇 번이고 떠오르게 했다가 이제 그 무릎의 이름을 당신의 무릎 속에서 흐르는 대기로 불러야 하는 것을 압니다 요컨대 무름이 닮아서 사랑을 하려는 새들은 서로의 몸을 침으로 적셔주며 헝겊 속에서 인간이 됩니다 무릎이 닮아서 안 된다면 이 시간과는 근친 아닙니다”

2

그의 무릎을 처음 보았을 때
그것은 잊혀진 문명의 반도 같았다
구절역 계단 사이,
검은 멍으로 한 마리의 무릎이 들어와 있었다
바지를 벌리고 삐져나온 무릎은 살 속에서 솟은 섬처럼 보였다
그는 자신의 무릎을 안고 잠들면서
몸이 시간 위에 펼쳐놓은 공간 중 가장 섬세한 파문의 문양을
지상에 드러내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의 무릎으로 내려오던 그 저녁들은 당신이 무릎 속에 숨긴 마을이라는 것을 압니다 혼자 앉아 모과를 주무르듯 그 마을을 주물러주는 동안 새들은 제 눈을 찌르고 당신의 몸속 무수한 적도(赤道)들을 날아다닙니다 당신의 무릎에 물이 차오르는 동안만 들려옵니다 당신의 무릎을 베고 누운 바람의 귀가 물을 흘리고 있는 소리가”

3

무릎이 멀미를 하며 말을 걸어오는 시간이 되면
사람은 시간의 관절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한다
햇빛 좋은 날
늙은 노모와 무릎을 걷어올리고 마당에 앉아 있어본다
노모는 내 무릎을 주물러주면서
전화 좀 자주하라며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한다
그 무렵 새들은 자주 가지에 앉아 무릎을 핥고 있었다
그 무릎 속으로 가라앉는 모든 연약함에 대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음절을 답사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당신과 내가 이 세상에서 나눈 무릎의 문명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생은 시간과의 혈연에 다름 아닐진대 그것은 당신이 무릎을 안고 잠들던 그 위에 내리는 눈 같은 것은 아닐는지 지금은 제 무릎 속에도 눈이 펑펑 내리고 있습니다 나는 무릎의 근친입니다” ─『무릎의 문양』

■ 소개글

시집 『기담』은 시도 극도 아닌, 하지만 시도 극도 아직 실현해보지 못한 장르 미상의 어떤 새로운 예술적 경지를 욕망한다. 시인은 타고난 직관으로 자기 앞에 놓인 새로움이 미지의 것이며, 자신이 온몸으로 그곳을 향해 나아갈 때 그 정체가 비로소 눈앞에 펼쳐질 것임을 본능적으로 간파하며 움직이는 모험가와 같다. 이 심미적 모험가의 길에 결코 포기는 없다.

■ 시인이 쓰는 산문(뒤표지 글)

이렇게 생각하게 된 연유는 언젠가 내가 어떤 기묘한 상황에서 중얼거렸던 말이 가끔 기억나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의 목소리도 실제로 우리의 몸처럼 살아가면서 조금씩 변해간다고 믿는 편인데 어떤 특이한 상황, 꼭 기억해야 한다고 믿는 상황 같은 것은 나는 잘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해내는 편인데, 그때 상황의 내용은 하나, 하나 정확하게 기억하는 데 반해, 그 시절 목소리들은 잘 떠올릴 수가 없다. 소리의 질감을 기억해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건 뭐랄까? 녹음된 자신의 목소리가 치욕스럽게 느껴지는, 분명 사실이었지만 지금의 진실로서 받아들이기 힘든 질감, 기억은 이미지와 달리 ‘음(音)’은 다른 식으로 매장하고 사는 것 같다. 그것은 내가 시를 쓰면서 복원해나가고 싶은 복기의 이미지 같은 것인데 가령 과거의 누군가의 이미지는 선명하게 기억하는데 그/그녀의 목소리는 전혀 떠올릴 수 없다는 거, 오래전 내가 누군가에게 고백했던 그 내용은 정확하게 기억해내는 편인데 그 목소리의 현상(現象)은 내게서 완전히 상실되었다는 거, 그런 것들을 나의/내 시의 환절기라고 부른다면 언어는 육기(肉氣)를 뱉어내는 데 확실히 무용(無用)USELESS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시간을 기묘한 형신(形神)으로 견디고 있는 그곳으로 묽게 흘러가보는 작업은 시 같은 것에 가까울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곤 하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오직 언어로 그 멀미를 감당하겠다’ 이런 말을 노트 위에 데려온 후 데꾼하게 한참 바라보았던 것이다. 아마도 내 언어는 그곳에 소리 없이 백야처럼 흘러왔다가 흘러가곤 했을 것이다(그렇게 믿는다). 이렇게 기록해놓을 수 있었던 건, 존재하는 것들은 외피뿐 아니라 울음소리가 모두 다르다고 믿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인데, 말을 바꾸어본다면 울음소리란 결국 우리 몸에 살고 있는 ‘허구로 만든 내장’ 같은 것에 다름 아니라고 두루 여겨본 것이다. 언젠가 욕조에 들어가 어둠 속에서 울고 있는 한 늙은 여자의 알몸을 밤새도록 씻겨주어본 적이 있다. 그때 나는 그 ‘이상한 시집의 자연사’ 안에서 울다가 웃다가 무슨 질감을 그토록 중얼거렸는가.
그 이역(異域)에서 ‘우리는 흐려질 때까지 서로의 입술을 만졌다’ _시작메모 중

작가 소개

김경주 지음

시인 김경주는 1976년 전남 광주에서 태어났다. 서강대 철학과를 졸업했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극 창작과(대본 및 작사전공) 전문사(MFA) 과정에 재학 중이다. 2003년『서울신문』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이후 몇 년간 야설작가와 유령작가로 지냈다. 시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로 작업을 확장해 연극실험실‘혜화동 1번지’에 작품을 올리며 극작가로도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현재 시극실험 운동을 하며 다양한 독립문화작업을 기획·연출하고 있다.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기담』 『시차의 눈을 달랜다』, 산문집 『밀어』 『패스포트』 등이 있다.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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