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노래한다

김연수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08년 9월 30일 | ISBN 9788932019000

사양 · 348쪽 | 가격 11,000원

분야 장편소설

책소개

바람의 땅, 북간도… 그리고
역사에 묻힌 청춘의 노래가 시작된다

“도저히 쓸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자꾸 쓰고 싶다.
이 소설 역시 마찬가지였다.” _김연수

2003년 가을 한국, 도서관―2004년 연변 벌판 모래바람―2008년 가을 다시, 한국

2003년 가을 어느 날, 작가 김연수는 1930년대 초반 북간도의 항일유격근거지(한인 소비에트) 내부에서 있었던 피비린내 나는 사건, 이른바 ‘반민생단 투쟁’에 착안한 소설을 쓰기 위해 일산의 한 도서관을 찾는다. 조선인으로 중국공산당에 입당해 조선혁명을 위해 먼저 중국혁명을 외쳐야 했던 시작부터 모순을 껴안았던 전사들, 국제주의자로서의 이중임무를 띤 채로 일제가 아닌 동지의 손에 의해 봄날 꽃잎처럼 죽어간 수천의 젊은 목숨들, 자신이 누구인지는 결국 죽고 나서야 시체로서만 말할 수 있었던 그 기막힌 사연의 인물들을 찾아 김연수는 사전과 사료들을 뒤적이고 복사하고 칼로 오려 노트에 붙여갔다. 그러나 이내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때-그곳’이 아닌 ‘현재-이곳’에 앉아 그들의 삶과 내면을 짐작하기란 말 그대로 ‘상상불가’의 영역이었으니. 작가가 내린 결론은 적어도 그들이 죽어간 연변 땅에 가서 소설을 쓰는 일이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도저히 쓸 수 없는 소설이었기에 그 갈증과 열망은 더했다.
소문난 아키비스트 김연수가 학부시절부터 섬광처럼 붙들린 이 뒤틀린 역사의 한 페이지는 결국 그를 국경 밖으로, 경계 너머로 이끈다. 2003년 12월에 연길 공항에 첫발을 디딘 후 꼬박 9개월여를 그곳 연변대학교 기숙사와 도서관에 붙박였다. 그리하여 소설 『밤은 노래한다』는 2004년 봄부터 겨울까지 계간 『파라21』에 연재되며 ‘첫’ 선을 보인다. 하지만 단행본으로의 출간까지는 아직 먼 여정이 남아 있었다. 그러는 사이 작가의 발길은 중국과 일본, 연변과 러시아, 미국과 독일을 분주히 오갔다. 그러는 짬짬이 소설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를 묶었고 장편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과 올봄 산문집 『여행할 권리』까지 선보였다. 더군다나 이 책들의 곳곳에서 발견되는 『밤은 노래한다』와 관련한 정보와 사유의 흔적은 독자들의 원망 섞인 궁금증을 더욱 부추겼다. 그리고 2008년 9월, 연재를 마치고 자그마치 4년의 시간을 더 보태 작가는 드디어 장편 『밤은 노래한다』의 일단락을 맺는다.

역사가 기록하지 못한 개인의 운명
―낮과 밤, 빛과 어둠, 진실과 거짓이 뒤섞인 역사 속으로 명멸해간 이름 없는 영혼들

언젠가부터 작가 김연수의 관심사는 “바깥에 있는 사람들, 국경을 넘어가서 존재하는 사람들, 체제에 있지 않은 사람들”을 향해 있었다. 전통적 소설 문법의 자장 안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소설적 상상력을 실험하고 허구와 진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가운데서도 그의 오롯한 관심사는 글쓰기를 통한 ‘나의 정체성 찾기=나란 누구인가’였다. 전작들에서 이번 소설에 이르기까지, 익숙한 역사의 기록에서 누락된 수많은 개인의 아픔과 내면을 응시하는 작가의 눈이 그만큼 깊고 집요했던 이유다.

“국경에서는 누구나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다.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묻고 싶었다. 과연 나는 누구인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는 어떤 곳인가? 우리는 왜 여기에 있는가? 이제 우리는 어디로 돌아가야만 하는가?” ―산문집 『여행할 권리』 中

일찍부터 타인의 배제, 확고부동한 이분법의 세계―조국, 민족, 이념보다는 ‘인간의 조건’에 매료되었던 그에게, 일제 강점기하, 중국과 일본, 조선의 점이지대(漸移地帶)였던 북간도의 지리적, 역사적 배경과 조차지 ‘영국더기’를 둘러싸고 전해지는 가슴 저릿한 사연들은 소설가로서 저버릴 수 없는 이야기였다. 더구나 엄혹한 세계에서 조선의 해방과 사회적 평등이라는 고상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일신의 안위를 버리고 혁명에 투신했던 동지들이 서로를 일제의 간첩으로 몰아 마치 마녀사냥을 하듯 무차별 처형을 감행하고 급기야 3,4년 만에 완전히 자취를 감춰버린 기막힌 사연은 더 말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운명에 대해 알고 싶다면 지금 자신이 누구인지 말할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자신이 무엇을 간절히 소망하고 무엇을 그토록 두려워하는지 알게 되면 자신이 누구인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들 앞에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 몰랐다는 점에서, 1927년 낡은 세계를 부숴버리겠다며 밤마다 영국더기 동산교회에 모여 열에 들뜬 목소리로 혁명을 떠들어대던 네 명의 중학생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말할 수 없는 자들이었다. 뒤질세라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서둘러 선언했지만, 그들은 정작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그건 당신도, 나도, 식민지에서 살아가는 그 누구도 마찬가지다.” ―본문 247

“지금 어디에 있나요? 제 말은 들리나요? 어쩌면 이건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겠어요.”

죽음 직전의 연인이 써 보낸, 한 남자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꿔버린 한 장의 편지

『밤은 노래한다』는 일제강점기의 1930년대 초, 저마다의 사연과 핏빛 서러움을 간직한 이들이 몰려든 북간도 땅을 배경으로, 박도만, 최도식, 안세훈, 박길룡 등 혁명과 새로운 시대를 꿈꿨던 네 명의 젊은이들과 그들의 친구인 이정희라는 신여성, 그리고 만철(滿鐵)의 조선인 측량기수로 그녀 이정희를 사랑했던 김해연에게 찾아온 잔혹한 운명, 가혹한 세계에 관한 이야기이다. 시인을 꿈꾸었지만 내지인마냥 일본인과 함께 일하고 술을 마시며 그저 운명적인 단 하나의 사랑을 맘에 품었다가 어느 순간, 조국과 이념, 혁명과 죽음에 직면하면서 세계의 복잡한 이면에 눈떠가는 한 남자의 성장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연인의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손을 저주하며 삶을 저버리고자 했지만 다시 그 손을 따뜻하게 잡아준 또 한 하나의 순정에 가슴 치는 애틋한 연애기이기도 하다. “북간도 고난한 삶의 흔적이 몸으로 스며든 사람들의 얼굴이 인화지 위에 검은 꽃처럼 피어나”듯 이번 소설의 긴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만철(滿鐵)의 직원으로 대련에서 일하다가 용정으로 파견된 김해연은 측량작업을 하면서 간도임시파견대의 중대장인 나카지마 타츠키 중위와 친해지게 되고, 박길룡(박타이=양도생)의 소개로 이정희를 알게 된 뒤, 그들과 종종 술자리를 가졌다. 혁명조직의 일원이었던 이정희는 이 모임을 통해 토벌대의 정보를 수집하여 조직에 보내다가 발각되자 김해연에게 어서 피하라는 메시지를 내포한 편지 한 장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김해연은 일본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으면서 과거 공산주의운동을 하다 전향하여 영사관 경찰보조원으로 있던 최도식을 만나게 된다. 조사를 받고 풀려난 김해연은 대련으로 돌아갔으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대련 봉판정의 아편굴에 빠져들게 되고, 직장에서 쫓겨난 뒤에는 다시 용정으로 돌아와 이정희가 목을 맨 나무에 자신도 목을 매어 자살을 시도한다.
김해연은 죽지 않고 살아났으나 그 심리적 후유증으로 말문이 막히고 만다. 그는 용정의 한 사진관에서 일하게 되는데 하필 그 사진관 역시 혁명조직과 연결된 곳이었다. 그곳에서 심부름하던 여옥이라는 아이는 “처음으로 자신을 사람으로 대해준” 야학 선생님을 통해 “혁명의 도리”를 깨친 뒤 이슬을 맞으며 조직의 연락원으로 일해온 순수하면서도 열정을 지닌 여자다. “엉겅퀴나 산국(山菊) 날카로운 이파리들이 종아리에다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적어놓았습지”라고 당당히 말하는 여옥과 김해연은 서로 누구랄 것도 없이 사랑에 빠진다. 김해연은 고등공업학교 시절의 은사인 나카무라 선생의 권유로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여옥과 함께 경성으로 떠나기로 한다.
경성행을 얼마 앞둔 어느 날, 김해연과 여옥, 그리고 사진관 식구들은 여옥의 언니 결혼식에 참석하러 유정촌에 가다가 운명처럼 토벌대의 습격을 받는다. 그 일로 여옥은 오른쪽 다리를 잃고, 다른 사람들은 다 죽고, 김해연만 홀로 살아남게 된다. 다리를 잃은 여옥은 혁명조직의 재봉대에서 일하게 되고 김해연 역시 유격근거지에 남아 혁명의 격랑에 휩쓸리게 된다. 중국공산당은 만철 직원 출신인 지식분자 김해연의 입당을 승인하고, 그를 대련으로 다시 보내 사업을 시키려 한다. 대련으로 떠나기 전, 여옥에게 인사를 하려 유격대장 박도만과 함께 약수동으로 향하던 김해연은 중간에 토벌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방향을 바꿔 어랑촌 소비에트에 이 사실을 알리러 갔다가 민생단 혐의자로 체포된다. 만주에서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조선혁명을 위해 싸우려면 먼저 중국혁명부터 해야 한다는 현실적 입장의 ‘국제주의자’ 박도만과 동만에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모두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면서 죽어가고” 있는 현실을 견딜 수 없었던 민족적 성향이 강한 중국공산당 순시원 박길룡(=박타이)은 민생단 문제로 격돌하게 되고, 결국 박길룡이 박도만을 사살하고 만다. 학생 시절부터 얽힌 이들의 관계가 이렇게 파국으로 치달은 것은 비극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살아남은 김해연은 혼미한 정신으로 권총을 품고 “잔인한 세계”에 맞서서 “결코 무너지지 않을 세계를 저격”하려고 용정의 총영사관으로 찾아가 최도식을 죽이려 한다. 누구라도 죽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총영사관 앞에서 조직의 일원인 서일남에게 발견된 김해연은 최도식을 죽일 수 없었다. 대신 그는 간도임시파견대의 중대장 나카지마를 찾아가 그의 머리에 총구를 겨눈다. 김해연은 나카지마를 납치하여 어랑촌 근거지에 고립된 주민들을 빠져나가게 하는 것을 나카지마의 석방 조건으로 내건다. 지팡이를 짚은 여옥도, 중국공산당과 결별하여 오직 조선 사람만으로 조선혁명군을 조직하겠다던 박길룡도 이때 포위를 빠져나온다. 그러나 한 발 총성이 울리고, 박길룡은 죽음을 맞는다. 몇 년의 세월이 흐른 후, 김해연은 다시 용정으로 가, 총영사관 경찰을 그만두고 만주중앙은행 용정사무처에서 일하고 있는 최도식을 찾아가 그 모든 혼돈의 진원지가 된 정희의 마지막 모습과 정희의 편지가 전해진 사연을 듣는다.

원하고 또 원했던 바로 그 소설!
20년간 쓰고자 했던 작가의 열망, 동만주 벌판의 아픈 역사가 되살아난다

1989년 갓 대학 신입생 신고를 마치자마자 선배들을 통해 접하게 된 마르크시즘, 1994년 학교 도서관에서 발견한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속의 낯선 북한 지명들, 1995년에 접한 일본 학자 와다 하루키의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1999년 신주백 박사의 『만주 지역 한인의 민족운동사』, 연변대 김성호 박사의 『1930년 연변 민생단 사건 연구』, 한홍구 교수의 박사논문 「상처받은 민족주의―1930년대 간도에서의 민생단 사건과 김일성』, 그리고 2008년 여름 촛불시위 현장에서 맞닥뜨린 어린 학생들의 풋풋하고 진정 어린 눈빛들, 가장 최근에 다녀온 몽골 평원에서 바라봤던 끝없이 펼쳐지는 하늘과 모래바람, 그리고 수많은 별빛까지. 그간 작가의 열망이 간절했던 만큼 이 작품에 쏟은 시간과 귀한 자료와 벅찬 독려에 함께했던 기억들이다. 물론 2003년 말부터 2004년까지 작가가 직접 연변 땅을 배회하며 판 발품으로 거둬들인, 몸에 새긴 북간도의 이야기들을 빠뜨리면 안 될 것이다.

『밤은 노래한다』의 책장 갈피마다 불멸의 사랑을 노래한 하이네의 시구처럼 밤과 낮의 빛을 오가는 듯한 김연수의 시적 이고 밀도 높은 문장 속에 자신의 삶 앞에 정직하고 진실해서 아름다웠던 사람들의 숨결, 가슴 아픈 역사가 녹아들어 있다. 인생을 뒤바꿔버린 단 하나의 사랑, 단 한 명의 여인, 그리고 그녀의 죽음과 동시에 남자가 건네받은 단 한 장의 편지에서 얽히고설킨 운명의 실타래가 풀려나듯이 작가 김연수는 자신이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이 원고를 고치고 또 고쳤다. 마치 주인공 김해연이 “어둠이 내릴 때까지 정희의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보이지 않는 부분이, 읽을 수 없는 부분이, 마침내 보이고 또 읽히게 될 때까지” 반복해서 읽고 질문하고 회의했던 것처럼 작가 역시 『밤은 노래한다』에 등장하는 비극 속에 새로운 희망을 심어놓고 죽어간 작중 인물들을 이해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거듭 질문하고 또 회의했다.

“우리는 타인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그게 우리의 윤리다. 내가 끝내 소설을 탈고하는 이유는 바로 그 윤리 때문이다. 나는 영원히 타인의 삶을 알아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소설가로서 끝내 실패할지 모르지만, 다시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나는 죽을 때까지 소설가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타인의 삶 앞에서 윤리적이고자 한다. 그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무나 슬픈 운명을 지닌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까닭이다.” ―김연수 산문 「타인의 삶」에서

1990년대 초반에 등단하여 그보다 더 오래고 튼실한 문학적 내공으로 오로지 글쓰기로만 승부해온 김연수의 그간 행보는 동세대 작가들 가운데 가장 뚜렷하고 화려했다. 5권의 장편소설과 3권의 소설집에 한국을 대표하는 크고 작은 문학상들의 잇단 수상. 새로운 작품이 소개될 때마다 열혈 팬심은 물론이요, 문단 안팎의 신망은 그만큼 두터워진 게 사실이다. 어느 시인의 단언처럼 ‘21세기 한국문학의 블루칩’ 소설가로서 이미 일가를 이룬 작가 김연수다. 충분히 지적이고 충분히 진지하고 충분히 낭만적인 작가 김연수, 그의 역사와 사랑을 노래한 여섯번째 장편 『밤은 노래한다』 역시 그 오랜 기대에 충분히 값하는 ‘김연수 대표작’이 될 것이다.

정희가 내게 보낸 처음이자 마지막 서신. 그 한 장의 편지로 인해서 그때까지 아무런 문제도 없이 움직이던 내 삶은 큰 소리를 내면서 부서졌다. 그때까지 내가 살고 있었고, 그게 진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세계가 그처럼 간단하게 무너져 내릴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건 이 세계가 낮과 밤, 빛과 어둠, 진실과 거짓, 고귀함과 하찮음 등으로 나뉘어 있다는 사실을 그때까지 나는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게 부끄러워서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본문에서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는 1930년대 초반 동만주의 항일유격근거지에서 벌어진 ‘민생단 사건’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민생단 사건은 내 박사논문의 주제이기도 한데, 이게 어디 가서 쉽게 꺼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500여 명의 혁명가가 적이 아니라 동지의 손에 의해 죽어간 사건이라면 얼마나 기막힌 사연이 많았을까? 박사논문을 쓰는 내내, 이건 논문이 아니라 소설로 써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논문으로는 다 담을 길 없는 그 깊이를 모를 혼돈과 암흑의 심연 속에서 벌어진 민생단 사건에 빠져든 인간들의 이야기를 김연수는 처음으로 끌어안았다. ―한홍구(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본문 들여다보기
먼저 사랑이 오고, 행복이 오고, 질투심과 분노가 오고, 그리고 뒤늦게 부끄러움은 찾아온다. 나카지마와 정희를 향해 까닭 모를 분노를 느꼈던 그때의 일이, 편지를 펼쳐 그 안에 씌어진 글을 읽고 나서도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몰라 크게 놀라지도 않았던 일이 지금은 너무나 부끄럽다. <김해연> 48

아무런 모순도 없이 완벽한 세계였다. 정희와 내가 기댔던 참나무 등걸의 딱딱함이며 석양 무렵 바늘처럼 우리 시선을 찌르던 해란강 잔물결이며 내 발목을 휘감으며 날리던 아카시아 꽃잎의 일들이 고스란히 다시 살아났다. 내가 얼마나 정희를 사랑했는지, 내가 얼마나 정희를 그리워했는지, 내가 얼마나 정희의 몸을 만지고 싶어 했는지, 모두 떠올랐다. <김해연> 61
지금 어디에 있나요? 제 말은 들리나요? 어쩌면 이건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겠어요.
이젠 그걸 알겠어요. 이미 너무 늦었지만. 그러기에 말했잖아요. 지금까지 내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지금까지. 그러니까 당신과 그렇게 앉아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까지. 그때, 이 세상은 막 태어났고, 송어들처럼 힘이 넘치는 평안 속으로 나는 막 들어가고 있다고. 사랑이라는 게 우리가 함께 봄의 언덕에 나란히 앉아 있을 수 있는 것이라면, 죽음이라는 건 이제 더 이상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뜻이겠네요. 그런 뜻일 뿐이겠네요. <이정희> 324-325

암실과 사무실의 등을 다 끄고 더듬거리며 밖으로 나와 문을 잠갔더니 자물쇠 안쪽에서 딸깍하고 소리가 났다. 낮고 묵직한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나는 오후부터 밤늦도록 내가 한 일이 인화 작업이 아니라 상처에 들러붙은 피딱지를 떼내는 일이었음을 알게 됐다. 훈풍에 대지는 다시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으니 그 시절의 일들로부터 이제 겨우 1년이 지났을까? 그때 나는 불현듯 내게 닥친 그 행복이 왜 그다지도 고통스러운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건 내 몸이 말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를 지도로 그려본다고 치자. 땅에서 측량해서 그리는 지도가 있고 하늘에서 사진으로 판독하는 지도가 있다. 그 두 개의 지도는 서로 같은 것이면서도 전혀 다르게 경험된다. 그런데도 나는 애써 하나의 지도만을 바라봤을 뿐이다. 고통은 바로 거기서 시작됐다. <김해연> 107

내가 갑자기 옆으로 쓰러지자, 여옥이가 내 몸 위로 기대고 괜찮느냐고 물었다. 여옥이의 입김이 내 귓바퀴를 하얗게 뒤덮었다.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있는 힘껏 눈을 찡그려 감고 고통을 견디고 있는데, 여옥이가 슬며시 내 오른손을 잡아당기더니 자신의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입김을 불었다. 마바리가 덜컹거릴 때마다 입김을 부느라 말라버린 여옥이의 입술이 내 손에 와 부딪혔다. 그렇게 손이 잡힌 채,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누운 내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이러지 마. 그 손을 동정하지 마.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가는 그 순간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손이니까. 그런 말이 입가를 맴돌았지만, 역시 음절로 흘러나오지는 않았다. <김해연> 111

그거 알아사 씁네. 내사 동무한테 애당초 맘도 없었는데 이 손일랑 그만 정이 붙어버렸소. 동무 처음 왔을 때, 송 영감이 희대의 영웅이 나왔다며 떠들었습지. 마작하다가, 혁명하다가, 특무질하다가 목 매달리는 사내는 많아도 여자 때문에 자기 목을 매는 사내가 간도 땅에 흔치는 않습지. 그런데 용정 나가는 길에 마바리에서 손 아프다고 우는 걸 옆에서 보니 그 맘은 또 얼마나 아프겠는가 그런 생각이 듭데. 마음이야 어디 붙었는지 내사 모릅지. 하지만 손이야 눈에 보이니 만져주고 싶었습지. 그러다 그만 정 깊이 들어버렸소. <여옥이> 273

1933년 여름, 유격구에 있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누구인가? 하지만 이 물음의 정답은 없다. 그들은 조선혁명을 이루기 위해 중국혁명에 나선 이중 임무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들은 중국 구국군이 일본군에 패퇴한 뒤에도 끝까지 투쟁한 가장 견결하고 용맹스런 공산주의자이자 국제주의자였던 동시에, 한편으로 일단 민생단으로 몰리게 되면 제아무리 고문해도 절대로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던 일제의 앞잡이들이었다. 누구도, 심지어는 그들 자신도 자신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날, 박도만이 유격구에서 빠져나갈 작정이었다고 해도, 혹은 유격구를 생명으로 보위할 마음이었다고 해도, 나는 그 두 가지 모두를, 혹은 그 어느 쪽도 믿거나 믿지 않을 도리밖에 없었다. 1933년 간도의 유격구에서 죽어간 조선인 공산주의자들, 그리고 간도의 조선인들은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객관주의란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주관으로 결정되는 가혹한 세계뿐이었다. <김해연> 213
나무는 가만히 서 있는 것 같지만, 그 내부에서는 세계와 끊임없이 투쟁하니까 저렇게 곧추 서 있을 수 있는 것이오. 인간 역시 모순에 가득 찬 세계 속에서 항상 변화하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는 것이오. 도덕이란 그렇게 변화하는 인간만이 알 수 있는 것이오. 일단 그렇게 변화하는 인간의 도덕을 알게 되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 모든 잔혹한 일들을 혐오하게 될 수밖에 없소. 변화를 멈춘 죽은 자들만이 변화하는 인간을 잔혹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 그건 정말 구역질이 나는 일이오. 하지만 인간은 그보다 힘이 더 센 존재요. 나는 잔인한 세계에 맞서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잔인한 세계 속에서도 늘 변화하고 성장하는 인간의 힘을 믿었기 때문에 공산주의자가 됐소. 인간이 성장하는 한, 세계도 조금씩 변하게 마련이오. 그런 인간의 힘을 나는 믿었소.
목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변화하는 인간의 힘을 믿겠지만, 잔혹함마저도 진리의 한 부분이라는 것만은 톨스토이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오. 나는 오늘 죽을 수도 있었고 살 수도 있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소. 내가 민생단 간첩으로 오해받아 죽든, 일본군과 싸우다가 죽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소. 중요한 것은 인도주의가 진리라면 인도주의 역시 개개인에게는 잔혹함을 요구할 수 있다는 점이오.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원한도, 분노도 없소. 나는 오직 진리를 위해서만 분노할 뿐이오. 인간은 진리 속에 있을 때만이 인간일 뿐이오. 그리고 진리 속에 있을 때, 인간은 끝없이 변화할 뿐이오. 인간이 변화하는 한, 세계는 바뀌게 되오. 죽는다는 건 더 이상 변화하지 못하는 고정의 존재가 된다는 것. 다만 이 역사 단계에서 더 이상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을 하지 못한다는 것. 죽음은 그 정도로만 아쉬울 뿐이오. <박도만> 232-235

나는 광주 코뮌에 참가했던 조선인 공산주의자요. 내가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잊어버린 적은 있어도 내 조국을 잊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소. 지금까지 나는 수많은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계급과 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봤소. 국민당 특무들에게, 일본 제국주의 군대들에게, 헌병들에게, 지주들의 사병들에게 그들은 처참하게 죽어갔소. 하지만 단 한 번도 그들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소. 고문당할 때 비명을 지르는 사람조차 본 일이 없었소. 하지만 여기 동만에서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모두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면서 죽어가고 있소. 이런 게 진정한 공산주의의 길이라면 나는 공산주의자가 되지 않았을 것이오. 나는 동무와 계급이 먼저냐, 민족이 먼저냐를 따질 마음이 없소. 우리에게는 필요한 건 오직 우리만의 나라, 우리만의 국가일 뿐이오. 그게 바로 모든 조선인의 꿈일 뿐이오. <박길룡> 278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시체만이 자신이 누군지 소리 내 떠들 권리를 지녔다. 시체가 되는 순간, 그들은 자신의 운명을 최종적으로 납득했으니. 유격구에서 나는 수많은 시체를 봤다. 그 시체들은 저마다 이렇게 떠들었다. 나는 민생단으로서 동지들의 골수를 적에게 팔아먹었다. 나는 혁명을 보위하기 위해 내 살과 피를 팔아먹었다. 그 아우성들을 들을 때마다 나는 간도 땅에서 살아가는 조선인들은 죽지 않는 한, 자신이 누구인지 말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경계에 서 있었다. 어디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민생단도 되고 혁명가도 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항상 살아 있었다. 살아 있다는 건 다만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라는 것이므로, 시시때때로 운명이 바뀐다는 뜻이므로. <김해연> 248

작가 소개

김연수 지음

1994년 작가세계문학상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스무 살』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 『사월의 미, 칠월의 솔』 『이토록 평범한 미래』 『너무나 많은 여름이』, 장편소설 『7번국도 Revisited』 『사랑이라니, 선영아』 『꾿빠이, 이상』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밤은 노래한다』 『원더보이』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일곱 해의 마지막』, 산문집 『청춘의 문장들』 『소설가의 일』 『시절일기』 등이 있다. 동서문학상, 동인문학상, 대산문학상, 황순원문학상,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독자 리뷰(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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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9 =

  1. 노귀연
    2014.11.29 오후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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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학과지성사
      2014.12.04 오후 5:07

      네, [밤은 노래한다]는 안타깝게도 절판되었습니다. 늦게 답변 드려 죄송합니다.

      1. 전경훈
        2015.06.22 오전 10:54

        다시 안 나오나요?

  2. cactus
    2008.12.20 오전 10:51

    지나온 날들, 경험하지 못한 역사 속 많은 사건들을 종종 문학을 통해 접하게 된다. 시나, 소설을 통해 새로운 해석과 감춰졌던 진실이 드러나게 되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누가 그랬던가, 역사는 강자의 편에서 기록된다고. 우연찮게 오늘은 새로운 정권이 구도를 잡으려 용트림한지 꼭 1년을 맞는 날이다. 작년 한 해, 조금이나마 나아질 꺼라는 기대를 품었던 수많은 이들의 가슴, 그 가슴에 지금은 분노와 냉대로 가득하다.

    정치에 대해 관심이 많지 않다. 그러나 올 해, 세상은 모두를 정치에 참여하는 자로 이끌어냈다. 촛불을 손에 든 유모차 부대, 교복을 입은 어린 학생들, 넥타이 부대, 어느 하나 자신의 이익을 염두해두고 거리로 달려나가지 않았다. 스스로의 판단하에 자발적인 동참이었다. 그들의 뜨거운 밤의 노래가, 그들의 흥겨운 춤사위의 진심을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러야 세상은 알아줄까.

    편향적인 사고로 내 앞가림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살고 있는 내게, 부끄럽지만 역사는 지나간 날들의 기록일 뿐이다. 1930년대 민생단 사건을 배경으로 한 소설, 이념은 어떤 것이며, 혁명을 위해 무참히 죽은 이들의 영혼, 그들은 진정 무엇을 위해 청춘을 바쳤는가. 그들의 무수한 밤들, 두려움에 떨던 날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불렀던 노래들.

    북간도, 1932년 9월의 용정, 내게는 윤동주의 생가로 기억되는 그곳에 모인 젊은이들은 무엇을 위해 삶을 내던졌는가. 그저 한 여자를 사랑한 남자 김해연, 그 남자를 사랑했지만, 혁명을 위해 죽는 그 순간에서야 사랑을 고백하는 여자 이정희. 중국, 일본, 조선의 젊은이 들은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스파이로 이용하여 그들은 < 민생단 사건>의 중심에 선다. 이념이 중요했던, 민족이 중요했던 그 시대는 피끓는 청춘의 죽음을 요구한 시대였다.

    사랑에 배신당했다고, 연인을 이해하기까지 김해연은 입과 귀는 닫히고, 눈은 멀고 만다. 그들의 사랑이 아름다운 봄 날의 기억임을 알기에 그의 침묵이 그의 모부림이 가슴 아프다. 그를 꼭 안아주고 잠들게 할 사랑이 빨리 오기를 바라고 있었다. 봄날 아스라한 아지랑이 같은 사랑, 그 눈과 입을 열리게 한 이, 역시 혁명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게 된 여옥이라는 청춘이었다. 새로운 사랑은 새로운 혁명으로 이어지나, 시대는 그들에게 사랑 보다 혁명을 요구한다. 그들이 바람과 맞서며 지새운 밤들, 정의라 믿고 그것을 위해 총을 겨누는 그 밤의 공포를, 포근한 침대 속에서 그들의 밤과 마주한 나는 머리 속으로도 느낄 수 없다.

    진실은 언제나 힘겹게 얻어지는 것일까. 여옥이 불러대던 노래들, 도통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으나, 그 처연함이 이 시대, 시청 앞에 모인 시민들의 노래와 같다는 것을 안다. 몇 년의 시간 동안 이 이야기를 쓰고자 고민했다는 김연수식 밤의 노래는 이제 세상의 낮과 밤에 울려 퍼진다. 길고 깊은 밤, 아침이 혹여 오지 않을까 두려운 내게 김연수의 노래는 말을 건다. 밤이 지나면 새벽이 오는 것을 알지 않느냐고.

    지금 어디에 있나요? 제 말이 들리나요? 어쩌면 이건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겠어요.(중략)우리가 영국더기 언덕에서 찍었던 그 사진이 생각나요. 그러니까 멀리서 몸을 뒤척이며 흘러가던 강물들. 눈송이들처럼 떨어져 내리던 봄의 하얀 꽃잎들. 십자가를 향해구불구불 이어지던 영국더기 언덕길. 사진 속에 찍힌 그 모든 것들은 내가 더없이 아끼던 보물들이었고, 내게 필요한 건 오직 그게 보물이라는 걸 알아보는 단 한 사람뿐이었어요. 내가 원할 때마다 지치지 않고 함께 그 보물들을 봐줄 사람이었죠. 한때는 이 세상 전부를 원했지만. 이젠, 겨우 그 정도. 이제 내가 아는 세계의, 그러니까 거의 전부. 323~ 324쪽 정희가 보낸 편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