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틋함의 로마

복거일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08년 8월 29일 | ISBN 9788932018898

사양 · 304쪽 | 가격 10,000원

책소개

기억하라, 기억하라
젊은 날의 풋풋한 사랑을
어쩌다 찾은 철 지난 사랑을

인간이 없는 미래사회에서 ‘애틋함’을 발견하다!
복거일 작가, 첫 소설집 출간

소설가, 시인, 사회 평론가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작가 복거일의 첫 소설집 『애틋함의 로마』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대체역사소설인 『비명을 찾아서』를 통해 색다른 장르들을 한국에 본격 소개하며 문학적 지평을 넓혀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첫 소설집 『애틋함의 로마』는 10편의 수록작 중에서 7편이 미래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가깝게는 2029년으로부터 멀게는 2998년에 이르기까지 그의 상상력은 10세기 간의 시간을 종횡무진 펼쳐 보인다. 또한 전작인 『벗어남으로서의 과학』을 통해 이미 입증되었듯이 그의 탁월한 과학적 지식과 과학소설에 대한 센스는 작품들의 진가를 높여준다. 인공수정을 통한 출산과 가족 구성을 배경으로 한 「서울, 2029년 겨울」로부터, 지놈Genome의 합성 문제를 다룬 「꿈꾸는 지놈의 노래」, 그리고 생명공학 기술의 발전을 기반으로 영생의 꿈을 실현한다는 「기적의 해」가 비교적 가까운 미래를 다루고 있다면, 목성계 위성인 개니미드Ganymede를 배경으로 한 소설들은 무려 10세기 뒤의 로봇을 주인공으로 하거나(「대통령의 이틀」 「내 몸의 파편들이 흩어진 길 따라」 「내 얼굴에 어린 꽃」) 스캔 인간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애틋함의 로마」).

복거일 작가의 과학소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이미 정평이 나 있고, 또한 그의 작업이 한국 과학소설에 반석을 제공했음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일 터이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죽지 않고 살아남아 문화정치를 펼침으로써 아직 조선이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다는 가정하에 씌어진 『비명을 찾아서―경성, 쇼우와 62년』가 발표된 1987년의 센세이션을 기억하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이러한 그의 혼성 장르적 관심은 과학소설에 대한 호기심으로 더욱 증폭되어 통일된 조선공화국의 젊은이가 16세기 임진왜란의 현장으로 날아가 시간여행을 한다는 내용의 『역사 속의 나그네』와 2030년대 달에 세계 각국의 월면기지들이 세워져 있다는 가정 아래 전개되는 『파란 달 아래』, 그리고 목성계 위성 개니미드에서 발생하는 핵전쟁의 양상을 다룬 『그라운드 제로』 등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이어져왔다.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복거일 작가가 과학소설에 관심을 두는 이유일 텐데, 과학소설은 당대의 첨예한 문제들을 시공을 초월한 배경으로 옮겨놓음으로써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고, 동시에 이러한 문제들이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으리라는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던져줄 수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은 『벗어남으로서의 과학』에 별도의 부를 마련해 과학소설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가능성의 영역」을 통해서도 알 수 있을 듯하다.

과학적 지식은 사람으로 하여금 새로운 물음들에 대한 답을 찾고 앞날을 예측할 수 있도록 한다. 그래서 과학적 지식이 발전할수록 우리는 자신과 세상을 보다 잘 보고 이해할 수 있다.
근년에 문학은 과학적 지식에 비우호적 태도를 드러냈다. 그리고 그런 태도를 정당화하는 미학을 만들어냈다. 그런 상황은 당연히 사회에 해롭다. 본질적으로 문학은 그것을 누리는 사람들에게 큰 혜택을 주지만, 반(反)과학적 문학은 그런 혜택을 크게 줄인다.
과학을 주제로 다루는 터라, 과학소설은 과학에 우호적인 문학이다. 자연히, 낙관적인 문학이다. 그런 낙관적 태도는 사회에 혜택을 줄 뿐 아니라 반과학적 문학의 나쁜 영향과 효과를 씻어낸다.
과학소설은 일상적 차원에서는 더욱 중요하다. 그것이 우리 삶의 모든 부면들에 깊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벗어남으로서의 과학』, 261쪽)

그러나 복거일 작가의 진가를 더욱 확연히 드러내는 것은 그의 작품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서정성들일 터이다. 인간들보다 더 인간적인 로봇들의 면모라든가 옛 연인을 잊지 못하면서도 가혹한 운명의 굴레를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화자들의 모습은 불행의 단면을 보여주기보다 차라리 행복한 추억으로서의 에너지를 발산한다. 특히 혜성의 잔해와 부딪히는 대참사 후 인간이 전멸한 목성의 위성 개니미드를 배경으로 하는 「내 얼굴에 어린 꽃」과 「애틋함의 로마」는 과학소설의 기발한 착상을 한 편의 아름다운 서정시로 승화시킨다. 개니미드의 인간은 전멸했고, 춥고 세균이 번식할 수 없어 그들의 시신은 썩지도 않는다. 로봇들은 인간의 시신을 수습해 비료로 만든 뒤 꽃을 피우고 가꾸는데, 음유시인이자 관상가이고 역시 로봇인 줄리어스 박사는 화자의 얼굴에서 “환한 꽃 한 송이”를 읽어낸다(「내 얼굴에 어린 꽃」). 또 육신화 부서의 실수로 자신의 스캔이 탄생하는 내용은 어떤가. 마이크는 연인과의 이별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용병부대에 지원하는데, 전투 직전에 스캔 받았던 신체 정보를 토대로 훗날 자신의 스캔이 탄생하고, 어쩔 수 없는 끌림에 따라 그가 자신의 옛 연인의 스캔을 사랑하게 되지만, 운명의 비껴감은 그들조차 피해갈 수 없었던지, 그들마저 결국 이별하고 마는 것을 쓸쓸히 지켜봐야 한다(「애틋함의 로마」).

우리는 구성지게 불렀다. 이곳에 살았다가 죽은 인간들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서, 몇은 이제 꽃으로 되살아났지만 아직은 시신으로 기다리는 이들이 훨씬 더 많은 그 사람들에 대한 시리도록 그리운 마음을 목청에 담아, 우리는 불렀다. 우리 모두가, 인간들이든 로봇들이든, 애초에 살았던 구지구까지 들리기를 기대하는 것처럼,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거기 사는 인간들에게 알리려는 것처럼, 한껏 목청 높여 불렀다. (「내 얼굴에 어린 꽃」)

내 젊은 날의 사랑은 두 번의 이별로 끝났다. 결국 마이키는 소니아와 헤어졌다. 내가 나의 소니아를 작별하고 떠났던 그녀 고향 화성의 작은 도시에서. 그리고 소니아는 그녀 남편의 스캔과 결혼했다. 이제 나는 알았다, 내 젊은 날이 다시 육신화된다 해도, 소니아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젊은 날의 나로서는 어찌 해볼 도리가 없는 무슨 힘이, 무슨 운명의 손길이, 해독할 수 없는 신탁처럼 그녀와 나를 갈라놓는 것이었다. 나의 간절한 응원에도 불구하고, 마이키는 결국 나와 같은 길을 걸어 사랑하는 여인과 헤어진 것이었다. (「애틋함의 로마」)

그 외에도 로봇의 정체성과 자아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탐구하는 「내 몸의 파편들이 흩어진 길 따라」, 로봇에 의해 통치되는 10년의 첫날과 마지막 날을 다룬 「대통령의 이틀」, 보다 나은 유전자를 선택하도록 부림 받는 유전자의 운명적 끌림과 이를 희생정신으로 받아들이는 화자의 모습들을 다룬 「꿈꾸는 지놈의 노래」와 「우리가 걷지 않은 길」 등, 그리고 우리 시대 실종된 정의의 문제를 날카롭게 짚어내는 「정의의 문제」와 예수 처형 과정을 통해 구세주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 ‘도구로서의 몫’이라 여기는 유다의 모습을 그린 「거부한 자」에 이르기까지…… 복거일 작가는 어느 한쪽의 시선만으로는 해석해낼 수 없는 독특한 기법과 문체를 이번 소설집에서 선보이고 있다.

복거일 작가는 1987년 『비명을 찾아서』 발표 이후 21년 동안 10여 종의 장편소설과 2권의 시집, 그리고 다수의 사회 평론집과 산문집을 내는 동안 단 한 권의 소설집도 엮은 바 없었다. 그런 만큼 이번에 출간한 소설집 『애틋함의 로마』는 그의 문학이 디딘 족적과 세계관, 그리고 미학적 측면으로서의 문학관을 가늠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기도 할 것이다. 더불어 첫 소설집 발간 후, 더욱 확장될 작가의 단편소설 세계가 벌써부터 기대를 모으게 한다.

작품 줄거리

얼굴에 어린 꽃
2998년, 혜성 라쉬드가 소행성과 부딪친 후 그 잔해가 목성의 위성인 개니미드에 부딪치는 ‘대참사’가 있었다. 그 참사로 인간들은 모두 죽었고, 이제 개니미드에는 로봇들만이 살아남아 인간들을 그리워하며 살고 있다. 지미 찬 역시 그 참사로 얼음 속에 갇혀 있다가 구조된 로봇이다. 어느 날 지미는 카페에서 음유시인이자 관상가인 줄리어스 박사를 만나게 되지만, 로봇끼리 관상을 봐주는 현실에 대해 납득하기 어렵다. 아무려나 며칠 뒤 지미는 폐허를 어슬렁거리다가 죽은 채 얼어붙은 인간의 가족을 발견하고, 또 그 인간들의 시체를 비료로 해서 꽃을 가꾸며 살아가는 아주머니를 만나 쓸쓸한 감정을 느낀다. 그리고 다시 찾은 카페에서 만난 줄리어스 박사에게서 지미는 “얼굴에서 꽃이 보인다”는 말을 듣는다. 그는 자신의 심상을 멋들어지게 표현한 그의 말에 감격하고, 일행은 「이롱고스 광장 가까이」라는 노래를 목청껏 부른다.

운이 다한 건달이 마지막으로 찾는 곳
이 악명 높은 개니미드를 처음 찾았을 때,
고물 우주선에서 내려 어찔한 마음으로
뉴휴스턴 우주공항을 나섰을 때,

이롱고스 광장 뒤쪽 좁은 골목
채송화 핀 화단에 물을 주던 소녀가
나를 올려다보더니 조용히 물었네,
“어디서 오셨어요?”

“햇살이 오는 곳에서 왔어요.
우리는 모두 거기서 왔죠.”
고개를 끄덕이더니, 소녀는 다시 물었네,
“어디로 가세요?”

“햇살이 가는 곳으로 가요.
우리는 모두 그곳으로 가죠.”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소녀는 다시 물었네, “거기도 꽃이 있나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가슴을 가리켰네.
그녀 가슴과 내 가슴을.
“사람이 가는 곳엔 늘 꽃이 피죠.
우리는 가슴에 꽃씨를 품고 다니죠.”

내 몸의 파편들이 흩어진 길 따라
그리즐리와 님로드는 구지구 출신이지만 몇백 년 전 탐사선을 타고 목성계 위성으로 온 예술가 로봇들이다. 그중 그리즐리가 토성으로 떠나기 전 그를 기념하고 가장 유명한 로봇 예술가 중 하나인 비에니즈의 탄생 3백주년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신작 전시회를 열게 된다. 신참인 스위니는 님로드와 함께 이 전시회를 찾았다가 지금까지 비에니즈가 교체한 구형 부품들을 차례대로 전시해놓은 작품들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부품들을 재조립해놓은 작품을 보고 탄성을 지르게 되는데…… 그 작품의 제목은 ‘자아의 탄생.’ 실시간으로 인터뷰 방송이 나오는 장면을 보면서 예술가 로봇들은 실제로 인간들 역시 끊임없이 세포들을 교환하면서 생존한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자아’나 ‘영혼’이라는 개념들에 대해 생각한다.

애틋함의 로마
2832년, 웨스트 개니미드와의 이롱고스 전투에 마이크는 용병으로 참전했었다. 이 전투는 마이크의 중대원 92명 가운데 23명만이 살아남았을 정도로 치열했는데, 이스트 개니미드의 전열을 정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던 만큼 전사에 남는 유명한 전투가 되었다. 당시 전투에 참여했던 용병들은 모두 육신을 스캔했는데, 이후 육신화 부서의 실수로 그만 생존해 있는 마이크조차 육신화한 사건이 발생한다. 그러나 마이크는 그 전투 이전의 기억만을 공유하는 젊은 육신의 스캔을 마이키라 부르며 친근하게 맞아준다. 한편 마이키의 학비까지 대주며 그를 성원했던 마이크는 대학 졸업을 앞둔 시점에 그가 연인을 데리고 나타나자 가슴이 멎는 충격을 받고 만다. 그 연인은 바로 젊은 시절 서로 사랑했으나 결국 이루지 못했던 소니아의 젊은 모습이었던 것. 실제로 토성계 유람선의 추락 사고에서 소니아는 남편과 함께 죽었는데, 그 이전에 부모의 권유에 따라 스캔을 받았던 것이다. 비록 스캔들끼리지만, 마이크는 두 사람이 자신들이 못다 이룬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되기를 빌어주는데…… 결국 마이크는 소니아의 스캔 역시 실제 남편의 스캔을 만나 결혼한 사실을 추억하며 운명의 덧없음을 되새긴다. 그는 이제 이곳저곳을 방랑하며 음유시인으로 살아가고, 청중들을 향해 「애틋함의 로마」라는 노래를 부른다.

사랑스러운 이와 함께 건넌
그 흐린 시간의 강물
지금은 어디쯤 흐르나.

우리가 안은 운명의 발길이야
가볍게 만나고
더 가볍게 갈리지만,

아, 이제 우리는 아네
모든 사랑의 발길은
애틋함의 로마로 통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기억하라,
젊은 날의 풋풋한 사랑을.
어쩌다 찾은 철 지난 사랑을.

……

대통령의 이틀
2978년 3월 1일, 대통령 취임식을 마친 자말 베이커는 집무실에서 누군가를 기다린다. 즉 로봇인 자신을 해체하기 위해 들이닥칠 오리지널 자말 베이커와 그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데…… 2988년 3월 1일, 자말 베이커는 대통령의 임기를 마치고 정권을 넘겨주기 전날 밤을 맞는다. 즉 그는 로봇임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쳤던 것. 그는 정적들의 암살 음모를 방지하기 위해 자신이 탄생할 수 있었고, 오리지널 자말 베이커를 대신해 선거운동을 했던 10년 전의 일들과, 이후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자들을 제거했던 사실 들, 그리고 임기 중 단행했던 여러 치적들에 대해 추억하며 밤을 맞는다.
기적의 해
그는 가정부 로봇이 차려준 아침 식사를 먹으며, 이제 자신이 죽고 나면 가정부 로봇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건가, 근심한다. 해체를 하는 것은 안쓰럽고, 다른 사람에게 넘겨 새로운 기억을 이식받게 된다면 그 역시 덧없는 일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날 기적 같은 일이 발생한다. 세계보건기구가 발표하기를, 팸텔 즉 ‘건강한 노년을 위한 의료 기술 패키지’가 개발되어 사람의 수명이 150에서 200세까지 살 수 있게 되었으며, 이후 노화를 완전히 막는 의료 기술이 나올 때까지 생존하면 그야말로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는 것. 정부에서는 이 기술을 무상으로 제공하겠다고 발 빠른 담화를 발표하는데…… 그러나 그는 이미 치매가 발병하여 모든 기억을 잃은 아내는 이 기적의 혜택을 받을 수 없으리라는 사실 앞에 가슴 시린 슬픔이 고인다.

꿈꾸는 지놈의 노래
민구는 침팬지와 사람의 지놈을 합성하는 이른바 ‘미싱 링크’를 통해 그들의 공통된 조상의 지놈을 합성하는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비록 세계 최초로 침팬지와 사람의 공통 조상 지놈을 합성하는 데는 실패하지만, 결국 그렇게 합성된 평균적 지놈의 유전자들이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는 작업을 성공적으로 검증하게 된다. 아무려나 자축 파티가 있던 날, 연구원인 신지는 자신의 사랑을 받아달라고 그에게 대시하고, 그는 나이든 자신보다는 젊고 유능한 유전자를 가진 다른 남자를 선택하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사실 그는 신지의 어머니와 이 년간 같이 살았으면서도 더 좋은 조건의 남자가 나타나자 깨끗이 포기했던 과거가 있었다. 이후 연구소는 루시, 즉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여인의 지놈과 미싱 링크의 지놈을 합성하는 데 성공하고 그 결과를 외국 제약회사에 팔게 된다. 하여 민구는 두 여자를 결혼식장으로 인도했고, 이제 루시를 성공적으로 시집보내는 것이 자신의 삶의 길임을 새삼 느낀다.

결혼식장에 들어서면서, 신지도 그의 귀에 속삭였었다, “외삼촌, 고마워요. 사랑해요. 영원히 사랑할 거예요.” ‘영원히’라는 말이 그의 가슴에 길게 울렸었다. 그리 길지 않은 목숨을 가진 생명체들에겐 영원이란 말보다 슬픈 것은 없었다.
이제 루시를 보내는 것이었다. 상상하기 힘들 만큼 아득한 옛적에 따가운 초원의 햇살 아래 땀을 흘리며 달리던 여인이 새 삶을 얻으려 떠나는 것이었다. ‘내 팔을 잡고서. 수연이처럼. 신지처럼.’

거부한 자
유다는 대사제로부터 돈을 받고 스승인 예수의 거처를 알려준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구세주가 자신의 모습을 이 세상에 드러내게 될 것이며, 거기까지 이르도록 하는 것이 구세주의 도구인 그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예수는 가야파에게 붙잡히고, 이제 자신이 할 일이 끝났다고 여긴 유다는 대사제로부터 받은 돈을 돌려준다. 한편 법정에서 총독인 빌라도는 갈릴래아 사람들에게 예수를 넘겨주며 벌을 주라 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바라빠를 풀어주고 예수는 십자가에 묶어 처형할 것을 요구한다. 결국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죽고, 유다는 스승이 세상에 다녀가신 뜻을 되새긴다.
우리가 걷지 않은 길
이인명은 젊은 시절 알았던 누님인 ‘미시즈 서’로부터 전화를 받고, 연인이던 ‘영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영주는 한때 결혼까지도 생각했으나, 때마침 그가 실직을 했을 때 집안의 강권으로 선을 보고 미국에 있는 의사와 결혼했던 연인. 그는 당시 더 조건 좋은 남자에게 연인을 보내는 자기희생이 열등감의 발로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건강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한편 그는 그때 다른 길로 갔더라면 어땠을까, 회한에 잠기는데…… 결국 회사를 옮겨 사장까지 오르고, 경영권 승계를 잘 마무리지어줌으로써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고 생각하는 그는 대통령 선거 결과를 놓고도, 그때 “우리가 다른 길을 걸었다면, 세상이 어떻게 달라졌을지”를 생각해본다.

정의의 문제
추석을 앞둔 주말에 서전 서방동 지점의 현금 자동지급기가 오작동해서 고객들이 요구하는 금액의 곱절이 지급되는 사고가 터졌다. 은행에서는 초과 지급된 백여 명의 고객에 대해 돈을 돌려달라고 요구하지만, 자진해서 반납한 한 사람을 포함해 여섯 명만이 이 사실을 인정한다. 대리인 ‘나’는 아이티 쪽 오류를 확인하고 법률적인 검토를 통해 초과 지급된 돈을 되찾으려 하지만, 막상 소송을 가기 직전에 은행은 영업 쪽의 반대로 소송을 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주민들을 적대적으로 만들 수는 없다는 것. 이에 대해 나는 그렇다면 형평의 원칙에 따라 돈을 반납한 여섯 명에게도 돈을 되돌려줘야 한다고, 이는 정의의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은행 내부 통신망에 글을 올리지만, 결국 질타를 당하고 구조 조정을 위한 감원 대상에 포함되었다는 통지만 받는다. 한편 은행이 외국계로 넘어간 후, 나는 신임 행장에게 이 사건과 관련된 편지를 보내게 되고, 신임 행장은 내게 싱가포르에서 근무해볼 생각이 없는지 묻는다.

서울, 2029년 겨울
편집 대행 회사 직원인 ‘나’는 산악 등반을 즐기는 스물일곱 살의 여자이다. 레즈비언 커플에 의해 키워졌는데, 엄마가 정자은행을 통해 자신을 임신했다는 사실을 안 뒤로는 아빠를 아빠라 부르지 않고 살아왔다. 법의학자로서 경찰청에 근무하는 옛 애인을 통해 나는 생부가 유명한 등산가인 유홍철 씨라는 사실과, 그가 빙벽 훈련을 하다가 다쳐 병원에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한편 회사에서는 신년호 특집으로 ‘서울, 2060년’으로 잡고 한 세대 뒤의 변화상을 예측하는 기사를 편집하기로 하는데, 나는 동료들의 선수에 밀려 좋은 컨셉을 놓치고 만다. 그러나 생부를 만나기 위해 병원을 찾은 나는 스물일곱 해가 쌓아놓은 벽을 단숨에 무너뜨리는 핏줄의 힘을 경험한다.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팀장에게 전화를 걸어 한 세대가 지나도 바뀌지 않을 것들에 대해서도 한 꼭지를 만들자고 제안한다.

차례

내 얼굴에 어린 꽃
내 몸의 파편들이 흩어진 길 따라
애틋함의 로마
대통령의 이틀
기적의 해
꿈꾸는 지놈의 노래
거부한 자
우리가 걷지 않은 길
정의의 문제
서울, 2029년 겨울

작가의 말

작가의 말

작품들을 한데 묶어놓으니, 사람의 정체성을 주제로 삼은 것들이 많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여기 실린 단편들이 대부분 과학소설이라는 점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새로운 과학 지식과 기술은 사람이 자신에 대해 품은 생각들을 바꾸도록 강요한다. 브라이언 올디스Brian W. Aldiss가 과학소설을 “우리의 발전된 그러나 혼란스러운 지식수준에, 즉 과학에, 비추어 나올 수 있는 사람의 정의와 우주에서의 그의 위치를 찾는 일”이라고 한 것을 음미하게 된다.
「내 얼굴에 어린 꽃」은 원래 계간지에 발표했었는데, ‘읽는 희곡’ 형태를 한 장편 『그라운드 제로』의 한 부분이 되었었다. 처음 모습을 많이 살려서, 여기 실었다.

2008년 여름
복거일

작가 소개

복거일 지음

1946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으며, 소설가이자, 시인․사회 평론가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장편소설 『비명(碑銘)을 찾아서』 『높은 땅 낮은 이야기』 『역사 속의 나그네』 『파란 달 아래』 『캠프 세네카의 기지촌』 『마법성의 수호자, 나의 끼끗한 들깨』 『목성 잠언집』 『숨은 나라의 병아리 마법사』 『보이지 않는 손』 『그라운드 제로』 등과 소설집 『애틋함의 로마』, 시집 『五丈原의 가을』 『나이 들어가는 아내를 위한 자장가』가 있다. 사회 평론집으로는 『현실과 지향』 『진단과 처방』 『쓸모없는 지식을 찾아서』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 『역사를 이끈 위대한 지혜들』 『정의로운 체제로서의 자본주의』 『경제적 자유의 회복』 『자유주의의 시련』 『한반도에 드리운 중국의 그림자』 등과 산문집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죽음 앞에서』 『소수를 위한 변명』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 『동화를 위한 계산』 『영어를 공용어로 삼자』 『벗어남으로서의 과학』 『서정적 풍경, 보나르 풍의 그림에 담긴』 등이 있으며, 그 밖에 『복거일의 세계환상소설사전』을 펴냈다.

전자책 정보

발행일 2012년 8월 28일 | 최종 업데이트 2012년 8월 28일

ISBN 978-89-320-1889-8 | 가격 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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