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발산의 사유, 꿈꾸는 기호, 변모하는 일상
회귀하는 주제들에 대한 낯선 방식의 감각화를 꿈꾸다
첫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문학과지성사, 2003)을 내놓고 익숙한 일상을 새롭게 하는 새로운 감각의 발견, 피 흘리는 고단한 현실과 예술가와 철학자의 밤과 별들로 가득한 초현실을 오가며 신열을 앓는 언어의 파문 등으로 평단과 독자 모두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던 시인 진은영이 5년 만에 두번째 시집 『우리는 매일매일』(문학과지성사, 2008)을 펴냈다.
과작의 시인이지만 이렇다 할 태작이 없는 시인으로도 익숙한 진은영이다. 총 49편의 시를 3부로 나누어 싣고 있는 두번째 시집 역시, 깊이 앓고 오랜 시간 사유하고서야 비로소 얻어지는, 우리의 가슴과 머리를 동시에 치고 가는 낯선 은유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 은유들은 지극히 단정하고 또 아름답기까지 하다. 하여 많은 이들이 진은영 시에서 시인 최승자의 그늘을 읽으면서도, 치열한 의식과 환하게 빛나는 시어의 간극, 차가움과 달콤함의 이율배반적 공존에서 재조합된 진은영 특유의 청신한 시적 세계에 눈을 밝히고 입을 모은다.
단정하다는 형용사는, 대학에서 니체를 전공해서 박사 학위를 받고 현재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는 시인의 이력을 한번쯤 환기하게 만든다. 니체와 들뢰즈, 칸트의 철학, 노동과 자본론 등 대학 입학 후 지금껏 그녀의 사유를 붙들고 있는 그 묵직한 이름들은 그녀의 눈과 기다란 손가락의 감각을 얇은 감상에서 되도록 멀리, 수다스럽지 않게 그리고 차갑게 재련했을 만도 하다. 하지만 그녀는 단호하게 말한다. 그러니 염두에 두자:
불타는 지느러미
나는 시인입니다
다른 이름으로 부르지 마세요
듣기 싫어요 ―「Summer Snow」 부분
동시에 아름답다는 형용사는 어둡고 불안하고 소외되고 억눌린 현실의 풍경을 흰 종이나 빈 유리창에 옮겨와서 가만히 응시하다가, 습관과 통념이란 보통명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낯선 풍경을 그려 보이는 시인의 깊이 있는 시선에 화답하는 독자의 정직한 탄성이다.
메시지의 전달에 급급하지 않고, 최소의 어휘와 간명한 표현으로 커다랗게 증폭하는 감각의 사유, 감각/육체의 연동/떨림이 시인이 지향하는 지점이라면 이번 시집은 그 목표를 초과 달성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간 여러 평자들이 그녀의 시를 곱씹어 읽고 애정을 기울여 분석해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령,
“(진은영의 시는) 90년대 시의 서정적 동일성을 거부하면서, 아직 제도화되지 않은 시적 발화의 숨죽인 목소리와 분열된 육성을 드러낸다.”(이광호) 여기서 ‘분열된 육성’에 밑줄 그어본다. 이것이 분열된 의식의 다른 호명이자, 세상의 분열을 엿본 자의 목소리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동년배 다른 시인―김행숙, 이장욱, 장석원―들과 함께 묶일 수도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진은영의 시에는 분열이란 단어가 환기하는 것 이상의 무엇이 있다. 습관화된, 타성에 젖은 눈과 귀, 후각과 미각 그리고 촉각을 보기 좋게 배반하는 구절들이 곳곳에서 반짝이고 있어서다. 이번 시집의 맨 마지막에 실린 다음의 시는 진은영의 시세계를 처음 대하는 독자들이 가질 법한 낯선 감각의 모음집과도 같다:
너는 추위를 주었다
나의 언 손가락은 네 연둣빛 목폴라 속에
버들강아지처럼
너는 어둠을 주었다
나의 눈은 처음 불 켜진 지하실의 눈부심 속에
입술이 나에게로 열렸다
향나무 불타는 난로의 숨결에 이어진
연통의 어리둥절한 뜨거움
[……]
그리고 야릇한 것이 시작되었다 ―「어떤 노래의 시작」 부분
시인의 관심은 이 ‘야릇한 것’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일보다 야릇한 감흥을 느끼는 공감각적 찰나의 경험에 기울어 있다. 고착화된 사전적 의미와 낡은 비유, 정답을 요구하는 질문지로 나와 타인, 세계를 바라보고 계몽하는 일은 이미 세계의 중심(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평론가 권혁웅은 “언어와 대상이 일치하는, 대상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자 대상 자체인 그런 은유는 없다. 그런 일치는 지배 이데올로기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시인이 제시하는 은유는 그 모든 모순들, 그 모든 간격들을 수용하는 은유”라고 말한다.
다채롭게 몸을 갈아입는 기호들은, “손쉽게 자신의 목소리를 절대화하거나 그것과 타협하지 않는”(허윤진) 시인에게만 허락된 것이다. 이를 두고 평자와 독자들은 아이의 장난기 가득한 천진함, 경계 없는 상상력, 물렁물렁 유연한 사고의 힘 같은 것들을 불러다 그녀의 시 앞에 놓아본다. 시를 짓는다,가 아니라 시를 쓴다,라고 해야 더 어울릴 법한 진은영 시가 갖고 있는 매혹의 요소들이다:
가만히 어둠 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
내가 모르는 일이 흘러와서 내가 아는 일들로 흘러갈 때까지
잠시 떨고 있는 일
나는 잠시 떨고 있을 뿐
물살의 흐름은 바뀌지 않는 일
물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
푸르던 것이 흘러와서 다시 푸르른 것으로 흘러갈 때까지
잠시 투명해져 나를 비출 뿐
물의 색은 바뀌지 않는 일
(그런 일이 너무 춥고 지루할 때
내 몸에 구멍이 났다고 상상해볼까?)
모르는 일들이 흘러와서 조금씩 젖어드는 일
내 안의 딱딱한 활자들이 젖어가며 점점 부드러워지게
점점 부풀어오르게
잠이 잠처럼 풀리고
집이 집만큼 커지고 바다가 바다처럼 깊어지는 일
내가 모르는 일들이 흘러와서
내 안의 붉은 물감 풀어놓고 흘러가는 일
그 물빛에 나도 잠시 따스해지는
그런 상상 속에서 물속에 있는 걸 잠시 잊어버리는 일 ―「물속에서」 전문
목소리에 밴 여운과 여백이 언뜻 보기에 “무질서한 이야기들”로 비치는 사물과 감각과 사유에 마술 같은 ‘한 몸’을 허락하기 때문에 ‘한 편의 가능한 시’가 탄생한다. 그리고 그러한 정리되지 않은 낯선 은유는 때로 상처와 고통으로 일그러진 역사의 시간, 시대의 풍경을 오히려 더욱 명징한 아픔과 무거운 진실로 우리에게 환기시키곤 한다:
지금은 5월
너는 쓴다 검은 비닐봉지 날아오르고
빨간 꽃잎 찢어지는 소리 ―「5월의 첫 시집」 부분
우리는 목숨을 걸고 쓴다지만
우리에게
아무도 총을 겨누지 않는다
그것이 비극이다
세상을 허리 위 분홍 훌라후프처럼 돌리면서
밥 먹고
술 마시고
내내 기다리다
결국
서로 쏘았다 ―「70년대산(産)」 부분
젊은이를 비탄으로 몰아갈
실업의 총알을, 죽음에 못 이른다면
비정규직의 주황색 망토에 뚫릴 동그란 구멍이라도
[……]
잠든 이웃에게는 아름다운 나라의 산업폐기물이
트로이의 목마처럼 입성하는 도시들과
햄릿에서처럼
독극물이 고요한 한낮의 귓속으로 흘러드는 이야기를 선물하라. ―「문학적인 삶」 부분
“진은영은 서정적 자아를 파괴하고 부정하려는 의지가 누구보다 강한 시인이다. 시적 창조의 고통스럽지만 의미 있는 체험을 시로 형상화하면서 시의 존재론적 가치를 긍정하고 시적 진실을 촉구하는 치열한 의식을 보여준다.”(오생근) 이미 첫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에서 시인은 시(쓰는 일)에 대한 충분한 자의식을 더없는 미적 감동과 함께 우리에게 고백한 바 있다:
시를 쓰는 건
내 손가락을 쓰는 일이 머리를 쓰는 일보다 중요하기 때문. 내 손가락, 내 몸에서 가장 멀리 뻗어 나와 있다. 나무를 봐. 몸통에서 가장 멀리 있는 가지처럼, 나는 건드린다, 고요한 밤의 숨결, 흘러가는 물소리를, 불타는 다른 나무의 뜨거움을. //[……] 빗방울 떨어진다. 그래도 나는 쓴다. 내게서 제일 멀리 나와 있다. 손가락 끝에서 시간의 잎들이 피어난다. ―「긴 손가락의 詩」 부분
그리고 이번 시집에서 이 불가항력의 시적 자의식[“오늘 밤엔 어떤 병을 앓고 싶니? 어떤 시(詩)를?”(「혼자 아픈 날」)]은 더욱 자주 그리고 더욱 크게 백지 위의 활자로 터져 나온다 :
거기, 구겨진 여백 위로 얼룩을 만들며
검은 빗물 번진다
거기, 슬픔에 대한 오랜 환대
거기, 낡은 악의에 대한 새하얗게 빳빳한 환멸,
어 거기, 만지면
젖은 별과 썩어가는 멜론냄새 뒤섞이는
어두운 탑의 꼭대기로 나를 천천히 오르게 했던
어느 몸에 대한 상념
마르고 텅 빈 바닥에 닿으려고 펼친 팔 아래
창백한 손가락 흔들린다 거기,
거기에 ―「거기,」 부분
[……] 도대체 어쩌자고 내가 시를 쓰는지, 어쩌자고 종이를 태운 재들은 부드러운지 ―「어쩌자고」 부분
“시는 시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갈 때 철학의 문으로 나올 수 있고, 철학은 철학의 계단을 더 높이 올라갈 때 시의 문으로 나올 수 있다. 횔덜린의 시와 하이데거의 철학이 아마도 그러할 것이다. 단호히 제 길을 갈 때 그 둘은 궁극에서 만난다. 시인 진은영은 시만 생각한다.” (신형철) 진은영 시인은 한 책에서 “항상 위대한 마술사와 시인을 흠모해왔다”고 적고 있다. “서툰 시 한 줄을 축으로 세계가 낯선 자전을 시작”(「앤솔러지」)하게 만드는 시인은 마술사이기도 하지 않을까. 그녀가 시를 쓸 수밖에 없는 이유와 상황은 이번 시집 전편에 걸쳐 나온다. 이어 옮기는 두 편의 시. 전자는 시만 생각하는 시인에게 들러붙은 상흔이고, 후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끝없이 시로 내몰 수밖에 없는 자의 고백이다:
그는 나를 달콤하게 그려놓았다
뜨거운 아스팔트에 떨어진 아이스크림
나는 녹기 시작하지만 아직
누구의 부드러운 혀끝에도 닿지 못했다
그는 늘 나 때문에 슬퍼한다
모래사막에 나를 그려놓고 나서
자신이 그린 것이 물고기였음을 기억한다
사막을 지나는 바람을 불러다
그는 나를 지워준다
그는 정말로 낙관주의자다
내가 바다로 갔다고 믿는다 ―「멜랑콜리아」 전문
마지막 시를 달라
이 사물은 미학적으로 낡았지만 마음을 이동시킨다
저곳에서 이곳으로
흔들리는 물그릇같이 젖는 시인
늘 폐허로 돌아오는 사람
부서진 벽 너머 길게 펼쳐진 하늘 깃털을 좋아하는 사람
파란 깃털들이 천천히 내려앉는다
쟈스민 지뢰, 들장미넝쿨의 낡은 탱크 위에
여자와 아이들의 구멍난 얼굴 위에
깨진 목욕통에
가득 채울 물의 표정을 달라
실패한 시인
실패한 혁명
불꽃
분홍 플라스틱의 고약한 연기 속에서
다시 실패하라 더 잘 실패하라
물속의 불꽃들 ―「나에게」 부분
●●시인의 말
대학 시절, 성수동에서 이대입구까지
다시 이대입구에서 성수동까지
매일 전철을 타고 가며 그녀를 상상했었다.
이 많은 사람들 사이, 만약 당신이 앉아 있다면
내가 찾아낼 수 있을까?
우리들의 시인, 최승자에게
2008년 8월
진은영
●●표4-시인의 산문
당신에게 이 시들을 바친다고 나는 쓴다.
롤랑 바르트는 아무것도 줄 수 없기에 헌사를 바친다고 말했었다. “내가 노래를 부르면서 당신에게 주는 것은 (내 목소리에 의해) 나의 육체인 동시에 당신이 그 육체로 만드는 침묵…” 그리하여 그것은 어린아이가 어머니에게 내미는 실오라기만큼이나 아무 쓸모없는 것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사랑하는 이여, 줄 것이 없다. 당신을 위해 부른다고
깊이도 믿었던 이 어리석은 노래들밖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