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인문학적 지식과 날카로운 안목
‘맥락의 비평’을 통해 한국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연다
역사적이고 통시적인 폭넓은 시각을 가지면서도, 작품에 대한 정밀한 이해와 분석을 동시에 해내며 놀라운 비평적 균형 감각을 선보여온 중견 평론가 홍정선의 신작 비평집 『인문학으로서의 문학』(문학과지성사, 2008년)이 출간되었다. 양립하기 어려워 보이는 두 작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것은 그 저변에 치밀하고 정확한 독서와 도저한 인문학적 지식을 배경으로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인문학으로서의 문학』은 이러한 균형감각뿐만 아니라, 더욱 깊어진 사유와 이해 그리고 절제된 문장으로 독자들을 찾아갈 것이다.
『인문학으로서의 문학』은 저자가 다년간에 걸쳐 발표했던 열여덟 편의 글들을 묶은 비평집이다. 각 글들은 서로 다른 텍스트에 대한 각기 다른 비평문이지만, 모두 ‘맥락의 비평’이라는 테제를 그 근간으로 두고 있다. 작품을 치밀하게 읽는 눈과 “상식과 교양의 힘”으로 작품의 풍요로운 의미를 다각적이며 독창적인 해석으로 접근하는 이러한 비평적 방법론을 저자는 ‘맥락의 비평’이라고 명명한다. ‘맥락의 비평’은 단순히 텍스트에 대한 해석으로서 비평의 지위를 거부하며, 한 작가/작품을 읽어내면서 “다른 작가들 사이에서의 작품의 관계, 작품과 작품과의 관계, 작품과 작가와 사회의 관계”를 짚어가 작품의 저 깊은 곳까지 독자를 안내한다. 이러한 비평적 접근 방법은 텍스트가 함의하고 있는 다층적 의미를 올바르게 분석하고 이해하는 것뿐 아니라, 오독과 오판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임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실제로 저자는 각각의 소설론과 시론 속에서 이를 실천하고 증명한다. 예를 들어 김원일의 『노을』을 읽으며 김만중의 『구운몽』을 떠올리고, 김영현의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와 임철우의 소설들을 비교하여 유사점과 차이점을 통해 작품의 사회적·역사적 맥락을 찾아 작품의 의의를 해석해낸다. 작품과 다른 작품 사이의 영향과 차이, 한 작품의 사회적 의미와 역사적 맥락을 짚어내는 이러한 능력은 방대한 독서량, 인문학적 배경 그리고 체계적인 논리분석과 더불어 ‘대상’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을 담보로 한다. 진정으로 작품을 이해하고 그 작품의 가지고 있는 결을 더듬어가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작품에 대한 애정은 비평의 기본적인 요건으로 보이지만, 실상 어느 한 쪽으로 편향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저자는 비평가로서 객관적이고 냉철한 시각을 유지하면서도 이와 동시에 ‘독자’의 자리 혹은 ‘인간적인 측면’으로 돌아서서 작품을 보듬어 안는 균형감을 보여준다. 거시적인 안목과 미시적인 분석 사이의 균형 뿐 아니라 객관적인 시선과 주관적인 감상 사이 절묘하게 균형을 유지하는 이 놀라운 능력에 대해 비평가 오생근은 “(홍정선은) 비평가이기 전에, 현실의 굴레 속에서 ‘약속과 시간’ ‘의무와 책임’ ‘돈과 일’에 얽매어 따분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개인의 모습을 드러낸다”고 정의하면서 “그러나 문학을 통해서 일탈의 꿈을 꾸고, 자신의 메마른 삶을 반성할 수 있다면, 그의 삶이 행복한 삶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도, 그것이 의미 있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홍정선이 문학을 통해서 혹은 자신의 비평을 통해서 말하고 싶은 핵심적인 주제는 바로 문학의 의미가 삶을 반성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비평이 문학과 삶에서 모두 의미 있는 작업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한다. 끝없는 지식의 폭과 깊은 사유 그리고 체계를 가진 냉철한 비평가이자, 누구보다 깊은 애정으로 한 작가, 한 작품을 대하는 ‘훌륭한 독자’인 홍정선의 새로운 비평집 『인문학으로서의 문학』이 다른 비평집들과 차별을 가지고 독창적인 미학을 뿜어내는 것은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인문학으로서의 문학』은 총 3부로 나뉘어져 있으며 1부는 자신의 비평론과 한국 문학의 역사적 맥락에 대해 2부는 소설에 대해 3부는 시에 대해 쓴 각각 여섯 편씩 총 열여덟 편의 글을 수록하고 있다.
1부에서는 거시적이며 역사적인 시각으로 바라본 한국 문학과 한국 문학 비평에 대한 섬세하고 날카로운 포착과 담론으로 꾸려져 있다. 그의 비평론과 문학사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는 이 장에서는 저자의 비평론과 더불어 지난 30년간의 한국 문학사를 요약/분석하는 그의 놀라운 지적 체계와 지식 그리고 인문학자로서의 면모를 읽을 수 있다.
2부는 소설론으로 꾸려진다. 김원일 장편소설 『노을』 이문열 소설집 『금시조』 양귀자 소설집 『원미동 사람들』 정찬 소설집 『완전한 영혼』 김영현 소설집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 이순원의 「은비령」까지 불후의 명작들을 다루며 각각의 소설들을 한국 문학의 맥락 속에서 그 의미를 찾고 해석한다.
3부는 시집과 시인에 대한 비평으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의 시적 감수성과 예리하면서 동시에 아름다운 문장들로 시의 구조와 그 안의 시인들의 세계를 탐구한다. 김광규, 김명인, 김혜순, 임동확, 김윤배, 김연신의 시와 시집들을 시인과 시와 사회 간의 관계를 통해 분석하고 이를 준거로 새로운 해석의 장을 열어 보인다.
■■ 책머리에서
나는 내가 쓴 글들을 오랫동안 돌보지 않았다. 90년대 중반경부터 내가 쓴 글이 보기 싫어진 때문이었다. 발표한 글은 다시 보기가 싫었고 덩달아 새로 글을 쓰는 일은 힘들어졌다. 글을 쓸 때마다 글의 정직성에 대한 질문이 나를 괴롭혔다. 내가 쓴 글이 나를 향한 칼날로 돌아오는 느낌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 결과 써놓은 글은 방치되었으며 글을 쓰는 일은 점점 줄어들었다.
그래서 나는 이 시기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에 대해서는 거의 글을 쓰지 않았다. 아니 쓸 수가 없었다. 힘 있는 주장은 뒷받침할 용기가 없어서 죽이고, 과격한 형용사는 감정이 노출된 것 같아서 빼버리는, 일견 사소한 일들이 끊임없이 글의 진도를 방해했다. 지나치게 비판적인 언급은 문학의 본질에 어긋난 증오의 길을 걷는 것 같아서 피하고, 애매하게 얼버무리는 언급은 비겁하게 사는 내 모습 같아서 피하다보면 글을 쓸 수가 없었다. 내가 보기에 나는 언제나 정직하지 않았다. 글쓰기는 바로 괴로움이었다.
내가 문학책보다 다시 역사책을 더 열심히 읽기 시작한 것은 이 때부터였다. 인간들의 일상생활에 대한 역사를 열심히 읽은 것은 역사 자체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인간의 품위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어서였다. 나의 한심함과 나약함, 인간과 세상에 대한 호오의 감정을 어떻게 다스리며 글을 쓸 것인지에 대해 시사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일상의 역사에 대한 이 책 저 책을 읽었다.
내가 이 책의 제목을 ‘인문학으로서의 문학’이라고 붙인 것은 이런 사정과 관계가 있다. 인문학의 정신이 우리의 영혼을 편견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어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넓히는 데 있다면, 나는 인문학의 정신에 충실한 글을 쓰고 싶고 나아가 충실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희망을 담아 제목을 그렇게 붙인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글이 제목에 합당한 내용이어서 정한 것이 아니라 제목에 미달하는 까닭에 붙여본 것이다. 글쓰기가 즐거워질 것이라는 희망으로라도 지금보다 더 열심히 글을 써야겠다.
■■ 차례
책머리에
제1부
맥락의 독서와 비평
공허한 언어와 의미 있는 언어
문사(文士)적 전통의 소멸과 90년대 문학의 위기
한국문학 속에 나타난 ‘가장상(家長像)’의 변화
최근 30년간의 한국 문학─저항과 이념의 문학에서 대중문화의 한 부분으로
친일 문제에 대한 고착 현상을 벗어나기 위하여
제2부
기억의 굴레를 벗어나는 통과 제의─김원일의 『노을』
소설로 가는, 기억의 길─이문열의 『금시조』
원미동 – 그 작고도 큰 세계─양귀자의 『원미동 사람들』
권력과 인간에 대한 집요한 탐구─정찬의 『완전한 영혼』
역사의 안과 밖으로 열린 소설─김영현의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
삶을 넘어서는 말의 아름다움─이순원의 「은비령」
제3부
평범함과 비범함─김광규의 시 세계
낡아서 편안해진, 삐걱거리는 인생 앞에서─김명인의 『따뜻한 적막』
‘당신’을 찾는 ‘나’의 여로─김윤배의 『강 깊은 당신 편지』
죽음 같은 삶에 대한 한 반항─김혜순의 『어느 별의 지옥』
아벨의 표지─임동확의 『벽을 문으로』
시인이 되기 위하여─김연신의 『시인의 바깥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