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에 대한 물활론적 상상력으로 꽃피우는 ‘만유(萬有)’와의 대화
“사랑하는 나그네 당신,
세모시처럼 희어진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고
전설이 되고 신화가 되십시오.”
한과 샤머니즘, 그리고 불교가 융합된 원초적 생명력의 세계를 그려냄으로써 인간의 욕망으로 얼룩지고 자연과 불화하는 모순으로 가득한 현실 세계를 비판, 조명하는 데 주력해온 소설가 한승원이 자신의 네번째 시집 『달 긷는 집』(문학과지성사, 2008)을 발표했다. 물리적으로 고희를 바라보고 있고, 문단에서 보낸 세월이 40년을 훌쩍 넘어섰지만 그의 문학적 열정은 주된 장르인 소설을 쓰는 틈틈이 시 창작의 욕망을 부추겨 이번 시집에 이르고 있다. ‘꽃, 무위사에서 만난 구름, 토굴 다담, 사랑하는 나의 허방, 고향의 달’이란 제목 아래 「서시」를 포함 총 71편의 시를 실었다. 소설가로, 대하장편을 붙들고 긴 호흡의 다작의 작가로 더 많은 생을 살아온 그는 이번 시집 『달 긷는 집』을 통해, 자신의 시적 세계의 출발점을 밝히고 있다. 이를테면 그가 지금껏 한 편 한 편 써온 “작은 손거울”에 비견되는 작품들이 모든 사물을 되비치는 역할을 담당해왔다는 것, 사물들이, 꽃들이,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아름다움을 스스로 감상할 수 있게 한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문학이고 시라는 생각 말이다.
일찍이 한승원의 첫 시집 『열애일기』(1991)에서 문학평론가 김주연은 “한승원의 문학은 어떤 의미에서 근본적으로 시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바다를 중심으로 해서 떠도는 저 귀기 어린 공간은 서사 문학이 흔히 보여주는 행동과 논리의 세계라기보다, 한 맺힌 영혼들의 울음과 노래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리기 때문”이라고 비평한 바 있다. 그래서 한승원의 시집은 그의 문학의 본질을 속살 오롯이 드러내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직전 시집 『노을 아래서 파도를 줍다』(1999)를 펴낸 지 근 10년 만에 묶게 된 이번 시집에도 역시 한승원 문학에서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바다와 꽃, 불교적 색채가 주요하게 역할하고 있다. 흔히, 한승원의 무의식이 숨 쉬는 거대한 상징이 ‘바다’라면, “모든 샤먼들의 중심 표상이자 환생의 꿈”(김주연)의 상징이 ‘꽃’이기에 그러할 것이다. <꽃>편에 맨 처음 이름을 올린 시편에는 대지와 공중에 얼굴 디미는 꽃이 그저 꽃일 수 없는 이유를, 꽃의 고유한 생명력과 개성과 함께 쉽게 읽을 수 있게 한다. 더불어 몸에 큰 병을 앓고 나서 이제 마음 한 자락 누구에게라도 허허롭게 내어주고도 아쉬울 것 없는 듯한 시인의 고백으로 하얗게 샌 슬픔이 느껴지기도 한다.
우주를 화려하게 색칠하는 것이 꿈인 나는
피어나는 것이 아니고
혈서처럼 세상 굽이굽이에 시를 쓰는 것입니다, 나는
향기를 뿜는 것이 아니고
사랑의 배앓이 하고 나서 달거리를 터뜨리는 것입니다, 나는
칠보 장식한 비천녀의 공후인
시나위 가락으로 출렁거리는 혼령입니다.
[……]
이상(李霜)처럼 객혈하는 것입니다. ─「꽃」 부분
나무숲이나 하늘이나 바다나 해나 달이나 별이나 구름이나 안개나
꽃송이나 천강의 물결이나 새들의 눈빛 속에 스며들어
저를 지켜보시는 당신
[……]
이것만은 반드시 완성하고 가야 하는데
책상에 앉으면 무력증이 일어나고 머리가
물 머금은 솜덩이들 가득 찬 듯 멍해지곤 합니다,
제 영혼을 맑게 헹구어주십시오,
[……]
제 어둠을 밝히고 나서 아쉬움 없이 바람처럼 날아가도록 도와주십시오.
─「열꽃 피는 날의 기도-토굴 다담 20」 부분
평론가 김춘수의 지적처럼, 이번 시집에서 한승원은 유난히 살아온 시절의 기억들을 구체적 사물들과 꽃에 하나하나 투영하며 대화와 회고로 되새기고 있다. 그리하여 사물의 존재성 혹은 고유성을 자각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아름다움에 눈 뜨는 것이라는 자신의 깨달음을 스스로 확인해간다. 살면서 찾아드는 번민과 고통 어린 기억은 그렇게 시인을 위로하고 또 가볍게 한다.
홍합들처럼 다닥다닥 붙어 비비적대는 번뇌에
엎치락뒤치락하고 난 이튿날 아침
물 자국을 밟습니다, 간밤의 꿈인 듯 꿈 아닌 듯한 사념들을
[……]
지지난밤의 밀물 흔적
지난밤의 썰물 흔적
그 틈바구니에 새겨진
은색 방게 걸어간 발자국
물떼새가 그린 상형문자들 위에
이뚤비뚤 씌어 있는
‘사랑은 새털보다 가볍고 삶은 산보다 무겁다’
읽으며 울음을 삼켰습니다. ─「모래밭에서」 부분
이어 시 「무위사에서 만난 구름」에서는 불교적 구도의 세계에서 아련한 그리움과 환각, 그리고 무위의 마음 한 자락을 다시 지상으로 가져와 “바람 경전 구름 경전” 등으로 슬며시 내려놓는다. 그리고 때로는 개인과 역사의 아픔을 ‘상처’와 ‘슬픔’ 대신 드문 ‘웃음’의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화하게 한다.
사랑하는 나그네 당신,
당신은 무위사 텅 빈 마당에서
선승처럼
구름 한 장 턱으로 가리키며
겹겹이 껴입은 옷에 갇혀 있는 나를
풀어주었습니다,
마음 가는 대로
바람처럼
훨훨 날아다니라고. ─「무위사에서 만난 구름」 전문
황혼의
비낀 빛살 아래
집 한 채 짓습니다.
전신주의 벌이줄 감으며 올라가는 하늘수박 덩굴이
타고 가는 소라고둥의 나선 같은
태극의 끝
그 시원의 숲 속
옹달샘에 빠져 있는 달
바가지로 걸어가지고 히들거리며 암자로 달려왔다가
사라져버린 그 달 때문에 슬피 울다가 죽어간
스님,
대취하여 강물 속의 달 건지려다가 익사한
이태백을
기리는
달 긷는 집. ─「서시」 전문
■ 시집 앞날개 소개글
시집 『달 긷는 집』은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정취와 여유에 대해 노래한다. 인간이 자연의 한 부분이었을 때, 인간과 자연의 구분이 없던 때의 자연스러운 삶의 향취가 시의 리듬을 이룬다.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의 존재에 인간이 겹쳐 있고, 그것들은 우열이 없는 동등한 존재로 우주를 수놓으며 신화와 역사를 겹쳐놓는다.
■ 시인 산문(시집 뒤표지글)
시장경제, 천민자본주의가 시를 천해지게 하고 길어지게 한다. 벌거벗고 성을 팔고, 수다스럽고 호들갑스런 걸개그림이 되고, 인조 명품들을 걸치고 머리처네를 쓴 채 내숭을 떤다.
꽹과리 말은 하늘 길 따라 내려오고, 북장구 말은 땅의 길 따라 올라가고, 그 두 길이 만나는 곳에 좋은 시가 꽃필 터인데.
*
경허의 술 마시는 법을 존경한다. 좋은 씨 구해다가 기름진 밭에 뿌리고 성심껏 가꾸어 수확한 밀을 갈아 누룩 빚고, 유기농 쌀로 고두밥 지어, 그것들을 알맞게 섞고 옹달샘 물 길어다가 질그릇동이에 부어 아랫목에 두고, 부글부글 괴어 향기가 진동하면 진국을 떠 코 비틀어지게 마신다. 시도 그렇게 써야 한다.
■ 시집 해설 「거울을 보는 꽃」에서_김춘식(동국대 국문과)
한승원 시인의 이번 신작 시집에는 이처럼, 꽃에 대한 미학적 심취, 꽃의 영혼과 시적 연혼의 동일시, 과거의 모든 기억을 꽃의 이미지로 변주하는 작업, 역사 속의 인간의 덧없는 열망과 아이러니에 연민 등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있는데, 이런 여러 특징을 통합하는 핵심은 ‘혼령’이라는 신비한 힘에 대한 자각과 ‘이야기로서의 시’라고 할 수 있다.
우주와의 소통, 심미적 황홀경을 ‘혼령’의 교감에서 발견하고 있는 시인의 자의식 속에는 이 세계가 모두 ‘혼령’으로 가득 찬 곳이고 이 ‘혼령’이야말로 모든 생명의 본질이자 기원이라는 생각이 존재한다. 그리고 시인의 이야기, 문학은 이 혼령을 보여주는 ‘거울’에 해당된다. 혼령을 품은 모든 존재가 자신의 ‘혼령’을 보고 자각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이 아름다움이고 궁극의 시적 경지인 것이다. “혈서처럼 세상 굽이굽이에 시를 쓰는 것”이 “우주를 아름답게 색칠하는 것”(「꽃」)이라는 생각은 이런 시인의 자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특히, 이번 시집이 이야기, 즉 대화나 독백의 양식을 취하고 있는 것은 시인의 ‘회고’가 시라는 거울에 되비춰 보여 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기억, 삶을 ‘시’라는 ‘손거울’에 비춰보고 싶었는지도 모르리라. 시라는 거울에 비추어진 시인 자신의 삶, 기억이 어떤 혼령, 어떤 꽃의 모습으로 그려질 수 있을지에 대한 참을 수 없는 궁금증이, 그래서 이 시집의 갈피 마다마다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인생에 대한 참을 수 없는 궁금증, 그 호기심이 시인으로 하여금, 가슴 속 저 깊은 곳의 기억을 지금 ‘손거울’ 앞으로 꺼내 놓은 채 자신의 모습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이 시집이 어쩌면 한승원 시인이 그려보고 싶었던 스스로에 대한 예술적 초상이자 생의 자화상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쉽게 떨쳐 버릴 수 없는 것도 이런 까닭 때문이다.
“세상 맛을 알 만큼 안 사람은/제 모습을 정원의 나무 한 그루로/가로누워 있는 바위로/만개한 꽃으로 웃으며 사랑을 맞이한다 하고/그로 하여금 자기 몸내를 짐승처럼 킁킁 맡게 하면서/야생초 같은 그의 체취를 귀로 듣는다”(「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차」 중에서)라는 시인의 표현처럼, 그는 지금 자신의 모습을 짐승처럼 냄새 맡고 그 냄새를 다시 귀로 듣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