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계

문화연구와 문화기호학

유리 로트만 지음 | 김수환 옮김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08년 4월 4일 | ISBN 9788932018416

사양 양장 · 신국판 152x225mm · 392쪽 | 가격 23,000원

책소개

“문화연구란 본질적으로 이미 기호학이 될 수밖에 없으며, 반대로 기호학은 근본적으로 이미 문화-중심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스크바-타르투 학파를 만든 러시아 기호학의 대가 유리 로트만의 『기호계: 문화연구와 문화기호학』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로트만은 미하일 바흐친과 더불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현대 러시아 지성계의 대표적 학자이자, 문화를 본격적인 기호학적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 문화기호학이라는 학제의 가능성과 자리를 예견하고 예비했던 최초의 이론가로 잘 알려져 있다.

레닌그라드 국립대학을 졸업한 뒤 에스투니아의 타르투 대학에 자리를 잡은 로트만은 이후 우스펜스키, 퍄티고르스키, 이바노프, 졸콥스키 등의 동료들과 함께 러시아 형식주의와 프라하학파의 유산을 구조주의 언어학과 결합시킨 독특한 구조-기호학적 문화론을 주창한다. 1964년 이들은 ‘타르투 여름학교’를 개최하는데, 이 학술 대회는 러시아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관심사와 전공 분야가 전혀 다른 각양각색의 연구자들이 로트만의 초대장과 ‘2차 모델링 체계’라는 하나의 공통 개념만을 갖고 몰려들면서 큰 성황을 이루면서, 이후 1970년까지 2년마다 개최되었다. 여름학교는, 1966년 2회 대회 때는 미국에서 로만 야콥슨이 찾아오고, 1968년에는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그 성과물을 모은 논문집 『기호체계 문집』을 번역하여 서방에 소개함으로써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등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런 성과로 로트만은 당시 출국 금지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69년 창립된 세계기호학협회의 초대 부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하지만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학파의 핵심 멤버들 대부분이 미국과 영국 등으로 망명하면서 학파의 공동 작업이 사실상 종결된다. 또한 질서와 코드, 구조와 대립을 강조하던 구조주의가 거부되고, 새롭게 등장한 포스트구조주의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서 유럽의 지적 담론의 전개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끝내 망명을 거부하고 홀로 타르투에 남은 로트만은 포스트구조주의의 영향 아래서도 문화연구의 이론적 기초가 되는 ‘기호학적 체계’의 관념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채 문화기호학을 정련해나갔다. 로트만에게 1970년대는 의미를 단일하게 규정하거나(구조주의) 혹은 유희적으로 비워버리는(포스트구조주의) 대신에 의미를 담는 갖가지 ‘다른 방식들’을 찾아내는 방법을 모색한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모색은 철저하게 문화 속에서, 문화를 통해 추구되었다. 문화의 공시적·통시적 평면을 넓고 깊게 아우르는 로트만의 이 모색은 1980년대를 거쳐 199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다. 이 짧지 않은 여정이 바로 ‘문화기호학’이라는 이름 아래 수행되었다. 그 길은 물론 문화를 끝없이 살아 숨 쉬는 정보로 만들기 위한 길이었지만, 동시에 기호학을 여전히 ‘기능하는’ 담론으로 유지하기 위한 힘겹고 지난한 여정이기도 했을 것이다.

1993년 10월 로트만이 사망한 뒤, 이듬해 발행된 『PMLA(Publications of the Modern Language Association of America)』지 로트만 추모 특집호 서문에서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이렇게 썼다. “1960년대라는 특별했던 그 시절, 로트만의 신중한 연구에서 미래의 전조를 보았던 사람들이 있었다.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세대의 ‘사무라이들’은 끈기와 열정으로 주변 문화들이 발신하는 새로운 기호들과 씨름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타르투 학파, 그중에서도 로트만의 작업은 우리의 선례, 최소한 동류로 여겨졌다.”

요즈음 ‘문화기호학’이라고 하면 흔히 ‘기호학’이라는 방법론을 통해 예술․종교․광고․신화․이데올로기 등 문화의 하부 체계에 접근하는 것을 일컫지만, 로트만의 ‘문화기호학’은 기호학적 체계로서의 문화 자체, 즉 총체로서 작동하는 문화 자체의 기호학적 메커니즘을 탐구하는 학문 분야라 할 수 있다. 문화사 기술, 문화의 유형학 연구에서 출발해 신화, 인공지능, 문화들의 상호 작용 문제로 이어지는 로트만의 폭넓은 사유는, ‘원 소스 멀티 유즈’라는 말로 대변되는 문화콘텐츠의 다양한 몸 바꾸기 현상부터 문화(문명) 간 대화(충돌)론이나 (탈)식민주의 담론에서 논의되는 핵심적인 영역까지 문화와 관련된 현대의 이론적 논의의 가장 첨예한 지점을 포괄하고 있다.

이 책은 지난 2000년 러시아의 ‘이스쿠스트보-에스페베’ 출판사에서 출간된 로트만 선집 『기호계Семиосфера』에 실린 논문 중에서 문화기호학과 관련된 논문 12편을 번역한 것이다. 첫 논문이 1968년에, 마지막 논문이 1992년에 발표된 것으로, 이 논문들에는 ‘공간적 모델링’을 비롯해 ‘비문화/반문화’ ‘경계’ ‘문화적 기억’ ‘복수 언어주의’ ‘대화’ 등 로트만 문화기호학의 대표적인 이론적 개념들이 빠짐없이 논의되고 있다.

옮긴이 김수환은 국내 유일한 로트만 전공자로, 2003년 모스크바에서 단행본 연구서인 『유리 로트만의 이론적 진화의 근본 문제들』을 출간하는 등 활발한 연구·저술·번역 활동을 벌이고 있는 학자이다. 옮긴이는 이 책이 로트만을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최초의 책인 만큼, 무엇보다 가독성에 신경을 써서 번역 작업을 했다고 밝히고 있다. 특히 러시아 역사와 문화에 익숙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일일이 상세한 설명을 곁들인 옮긴이 주를 달아 독자들의 이해를 도왔다.

■ 한국어판 출간에 부쳐

한국의 독자들에게 내 아버지인 유리 미하일로비치 로트만(1922~1993)의 문화기호학 관련 논문 선집을 소개할 수 있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이 선집의 출간은 러시아 문화 및 기호학의 전문가인 김수환 박사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지난 2003년에 모스크바에서 단행본 연구서인『유리 로트만의 이론적 진화의 근본 문제들』을 출간했으며, 20세기 러시아 문화에 대한 기호학적 분석을 담은 여러 논문을 한국어와 러시아어로 발표한 저명한 학자입니다.
유리 로트만은 196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사실상 연방 해체 전까지) 소비에트 인문학 사상의 주역이었던 타르투-모스크바 기호학파의 창시자입니다. 타르투-모스크바 학파는 아직까지도 여전히 문화기호학의 주역으로 남아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호학 연구 분야에는 문화기호학에 대한 두 가지의 근본적인 접근이 존재합니다. 그 중 하나는 현대 기호학의 창시자인 미국 철학자 찰스 샌더스 퍼스(1839~1914)의 전통, 그리고 이를 계승한 현대 미국 기호학파와 관련됩니다. 한편 유럽적 전통을 특징으로 하는 두 번째 접근은 스위스의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1857~1913)가 기초를 놓은 구조주의 사상의 발전과 관련됩니다. 퍼스의 기호학은 원자적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명백한 것에서 모호한 것으로 나아갑니다. 퍼스의 출발점은 개별적인 기호의 개념, 더 정확하게는 기호가 아니라 그것의 발생을 위한 조건입니다. 따라서 텍스트, 언어, 각종 커뮤니케이션적 ․ 기호적 체계들은 다양한 유형의 기호로부터 만들어지는 이차적인 것이 됩니다. 반면에 소쉬르에게 근본적인 것은 모든 기호는 특정한 기호 체계의 부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무런 기호 체계에도 속하지 않는, 고립된 개별 기호는 원칙상 불가능합니다. 소쉬르의 기호학은 전체론적입니다. 즉 출발점이 되는 것은 기호 체계로서의 언어의 개념인바, 그것의 모든 부분 및 발현은 이차적인 것입니다.

퍼스 기호학의 관점에서라면 문화기호학은 다양한 문화에서 발견되는 기호적 조직체들을 연구하는 기호학의 한 분야가 됩니다. 즉 문화기호학이라는 조어에서 ‘기호학’은 방법론을, ‘문화’는 연구의 대상을 뜻하게 됩니다. 이때 문화는 기호학과 관련해 아무런 특권도 지니지 않습니다(문화는 민족지학에서 문화철학에 이르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다양한 학제에서 연구될 수 있으며, 기호학은 그들 중 어느 한 영역을 점하고 있을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기호학도 문화와 관련해 특권을 갖지 않습니다(기호학 내부에 폭넓고 다양한 계열이 존재하며, 문화기호학은 단지 그들 중 하나일 뿐입니다).

문화의 각종 영역에 관한 연구에서 소쉬르의 사상을 발전시킨 것은 프라하 구조주의 학파 참여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1930~40년대 유럽 구조주의 사상의 주역이었으나, 문화기호학의 총체적인 프로그램을 구축하지는 못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타르투-모스크바 학파, 무엇보다 유리 로트만의 저작들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 기본적인 전제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문화와 기호학은 서로 독립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문화의 근본에는 다양한 기호학적 메커니즘이 놓여 있는 바, 이 메커니즘 외부에서 문화는 논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요컨대, 문화는 기호학적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기호학 역시 문화로부터 동떨어져 고찰될 수 없습니다. 문화는 기호학의 일차적이고 근본적인 대상일 뿐만 아니라 기호학이 발생하고 기능하는 바로 그 환경이기도 합니다(요컨대, 기호학은 문화적인 것입니다).

둘째로, 언어 외부에서 개별 기호가 존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고립된 개별 언어라는 관념 자체가 지적 추상물에 불과합니다. 실제의 문화적 맥락에는 다양한 유형의 복수의 기호적 체계들이 상호작용하고 있습니다. 로트만에 따르면, 최소 두 가지의 상이한 언어로 된 체계가 필수적인 바, 이때 둘 중 하나는 (자연언어와 같은) 상징적 유형의 기호가 지배적인 반면, 다른 하나는 (조형예술과 같은) 도상적 유형의 기호가 지배적입니다. 이 언어들은 상호 번역이 불가능한 (혹은 대단히 어려운)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는 로만 야콥슨이 말한 상호 기호학적 번역에 해당하는 것으로, 가령 언어 텍스트를 그림으로 묘사 (즉, 상징적 기호를 도상적 기호로 번역)하는 경우나 혹은 조형 예술 작품을 언어로 묘사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합니다.

마지막으로, 총체로서의 문화 또한 자족적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기호와 언어의 존재 조건이 (그와 연관된) 또 다른 기호와 언어들의 존재인 것과 마찬가지로, 현저하게 고립을 지향하는 문화조차도 다른 문화들과의 상호관계를 필요로 합니다. 이렇듯 모든 기호, 텍스트, 언어, 그리고 문화들을 서로 관련짓는 체계를 로트만은 기호계라고 부릅니다.

기호계는 그러므로 체계들의 체계입니다. 그것의 부분들은 일정한 경계를 통해 구분되지만, 그 경계는 절대 통과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종의 기호학적 세포막 혹은 필터와 같습니다. 다른 문화로부터 차용된 것은 결코 기계적으로 병합되는 법이 없습니다. 그것은 수용자 문화의 영향 아래서 변형되는바, ‘낯선 것’이자 동시에 ‘자신의 것’으로서 해석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문화는 차용된 문자 체계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서구 유럽의 언어들은 현저한 언어적 다양성을 특징으로 하지만 그들 모두는 라틴어 알파벳을 사용합니다. 동슬라브의 언어들은 키릴 문자를 사용하는데, 주지하다시피 이는 고대 그리스어를 기초로 만들어진 인공적인 활자입니다. 비슷한 방식으로 중세의 한국 문학 역시 중국의 문자 체계를 사용했지요. 그러나 언제나 외래의 문자는 수용 문화의 독특한 요구에 따라 적응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중국의 기호에 기초한 ‘이두’ 문자는 대단히 한국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문’으로 쓰인 한국 문학 역시 그에 못지않게 독창적이라고 해야만 할 것입니다. ‘타자적인 것’은 반드시 ‘자기 것’의 특징을 흡수하기 마련입니다. 동시에 ‘자기 것’은 ‘낯선 것’에 투영됨으로써 더욱 풍부해지기 마련입니다.

2008년 3월, 타르투에서
미하일 로트만

* 미하일 로트만은 유리 로트만의 장남으로 현재 에스토니아의 탈린 대학 교수, 타르투 대학 기호학과 선임 연구원으로 재직중이다.

목차

한국어판 출간에 부쳐_미하일 로트만

문화를 유형학적으로 기술하기 위한 메타언어에 관하여
문화의 기호학적 메커니즘에 관하여
문화의 기호학적 연구를 위한 테제들
신화-이름-문화
기호학적 체계의 역동적 모델
집단적 지성으로서의 문화와 인공지능의 문제
문화 현상
두뇌-텍스트-문화-인공지능
문화들의 상호 작용 이론의 구축을 위하여
문화의 기억
주체이자 그 자신에게 객체인 문화
문화의 역동성에 관하여

옮긴이 해설: 유리 로트만과 기호계

작가 소개

유리 로트만 지음

모스크바-타르투 학파로 알려진 러시아 기호학파를 이끈 지도적 이론가. 러시아 형식주의와 프라하학파의 유산을 구조주의 언어학과 결합시킨 독특한 구조-기호학적 문화론을 주창, 현대 문화기호학 분야의 시조가 되었다. 페테르부르크의 레닌그라드 국립대학에서 문헌학을 전공했지만, 그의 학문적 관심사는 시학, 미학, 기호학 이론, 문화사, 신화론, 그리고 영화에까지 걸쳐 있었다. 1964년부터 에스토니아의 타르투 대학을 거점으로 ‘여름학교’를 개최하고 그 성과물을 모은 『기호체계 문집』을 발행,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70년대 중반 이후로 본격적인 문화연구에 돌입, 문화 체계의 혼종성과 역동성, 그리고 창조성을 강조하는 다양한 이론적 탐색과 함께 러시아 문화사에 관한 구체적인 문화기호학적 연구 성과들을 내놓았다.
로트만은 1993년에 사망하기까지 10여 종의 단행본과 500여 편이 넘는 연구 논문을 발표했다. 주요 저서로는 『구조 시학 강의』(1964), 『예술 텍스트의 구조』(1970), 『시 텍스트 분석』(1972), 『영화기호학과 영화미학의 제 문제』(1973), 『푸시킨』(1982), 『정신의 우주: 문화기호학 이론』(1990), 『문화와 폭발』(1992) 등이 있다. 사후에 『스크린과의 대화』(1994), 『사유하는 세계들 속에서』(1996) 등의 단행본이 출간되었고, 1996년부터 러시아에서 전집이 간행되기 시작해 총 9권이 출간된 상태다.

김수환 옮김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문학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러시아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책에 따라 살기』 『사유하는 구조』 등이, 옮긴 책으로 『모든 것은 영원했다, 사라지기 전까지는』 『코뮤니스트 후기』 『영화와 의미의 탐구』(공역) 『문화와 폭발』 『기호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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