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안데르탈인의 귀향

내가 사랑한 시인들

정과리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08년 2월 29일 | ISBN 9788932018478

사양 · 296쪽 | 가격 13,000원

책소개

경계를 알 수 없는 도저한 지식과 성찰, 텍스트에 밀착한 정치한 분석과 문장으로 우리 문단의 이론 비평과 현장 비평 모두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중견 평론가 정과리(연세대 국문과 교수)가 소설작품론과 시작품론을 각각 묶은 문학평론집 두 권을 동시에 출간했다(문학과지성사, 2008). 1979년에 재학생 신분으로 일간지 신춘문예에 「조세희론」으로 입선하며 문단에 나온 저자는 이후 30여 년간 고전과 근현대문학, 문학사, 서양철학과 정신분석학, 여기에 인문학자로서는 보기 드물게 뛰어난 컴퓨터 운용자로서 현대문명산업과 정보화 사회의 망까지 탐문하는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작가와 작품, 대상과 현상을 줄기차게 읽고 그 비평적 감식안에 구두점을 찍어온 우리 시대의 대표적 문사에 해당한다.

이번에 동시 출간된 정과리 비평집 『네안데르탈인의 귀환-소설의 문법』(이하 『귀환』)과 『네안데르탈인의 귀향-내가 사랑한 시인들·처음』(이하 『귀향』)의 시간적 연대기는 멀게는 1988년에서 가까이는 2006년 자락까지 근 20여 년에 걸쳐 있다. 그간 저자가 여기저기 문예지와 논문집, 학회지, 그리고 작품집의 해설로 써낸 작가론·시인론·작품론 가운데, 한국 현대소설사에 중추적인 역할 혹은 뚜렷한 족적을 남겨온 작가 그리고 그들의 소설 내적 문법에 초점을 맞춘 글들을 다시 정리하여 『귀환』에, 한국 현대시사의 별들로 일컬어지는 시인들의 주요시와 시집에 대한 고른 분석을 꼼꼼히 다듬어 『귀향』에 따로 묶은 것이다. 1999년에 발간한 『무덤 속의 마젤란』 이후 본격 작품론만을 묶은 비평집으로는 거의 십 년 터울을 둔 셈이다. 물론 2005년에 발표한 『문학이라는 것의 욕망』과 『문신공방 하나』가 그의 저서 목록 말미에 있으나 이 책들은 문학사회적 지형과 문학비평의 지위, 한국 문단의 안팎을 넘나드는 거시적 조망을 담는 데 주력하고 있어, 저자 특유의 유려한 문체, 정치한 작품 분석을 대하고픈 독자들의 조갈증을 잠재우는 데는 이번에 동시 출간된 이 두 권의 저서가 적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세간의 조악한 댓글성 발언과 간신히 책장만 두드리고 지나가는 성근 분석 들과는 좀체 타협을 모르는 저자의 정치한 분석과 날카로운 묘파, 끈질기게 문맥을 틀어쥐고 변증적 ‘원환’의 관계를 모색해가는 필력은 이번 책들에서도 여전하다. 20년을 ‘산’ 글들이라고 하기엔 시인과 작가를 읽어내고 또 ‘공감’하고 ‘우정’ 혹은 ‘애정’을 쏟아붓는 그의 열정이 있어, 작품의 외연과 내연을 확장하고 깊이를 만들어내는 품이 두드러지고, 그리하여 다시 시와 시인, 소설과 작가에게 생명을 불어넣고 다양한 현재적 분석을 새로 낳는 정과리 특유의 글맛을 체득하게 한다.

『귀환』은 소설의 내적 문법을 편의상 ‘간단 형식-대위법-중첩법- 혼종법’ 등으로 가르고, 여기에 황순원, 이청준, 김주영, 복거일, 윤흥길, 이인성, 성석제, 백민석의 대표작 혹은 문제작들을 그야말로 “삶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작품 속으로 진입하고 작품을 더욱 깊이 느끼기 위해 이론을 쓰다듬는” 자세로 분석을 시도한 것들이다. 그의 자세는 곧, “대상의 ‘술부’에 개의치 않는 육체적 만남의 그것, 즉 기본적으로 성애적인 자세”라고 재해석된다.‘조념(造念) 비평’을 마뜩잖아하는 저자의 진정은 다시 이런 고백으로 이어진다. 이른바 “저 진정한 취미인의 정신적 근원이 공감의 비평에 있다고 주장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다시 달려보고 싶다’는 느닷없는 발심은 지금 낡아빠진 꼴을 하고 무심히 버려져 있는 저 옛날의 비평을 되살려보고 싶다는 욕망에 다름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낙오병의 욕망은, 저도 모르는 자아도취 속에서, 자신의 물증들로서 이 소설론들을 제출하려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뜬금없는 각성의 계기가 되었던 찬물 세수를 다시 하고 정색을 하고 들여다보면 이 ‘자랑처럼 무성한’ 글들은, 과도하게 주관적인, 다시 말해 느끼는 애정보다 퍼붓는 애정이 지나치게 많은 욕구불만자의 독후감처럼 보이고, 원래 그 비평을 세웠던 나의 오랜 스승들의 위대한 교감적 행동들에 비추어 보면, 세간의 언어로 ‘조족지혈’에 불과”하다는 특유의 수사적 겸손으로 날렵하게 갈무리한다. 비평집 말미의 <보유>에 ‘기록’한 2003년 말에서 2004년까지 한국 문학 시장에 나온 수십의 작가들과 그 이상의 작품들을 읽고 분류하고 다시 묶어낸 작업은 어느 누구보다 많이 찾아 읽는 현장비평가로서의 저자의 면모를 잘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귀향』은 저자 자신이 시의 ‘풍경’이라고 밝힌 ‘발목-바람-숨결-어느새/다시-빈 들’이라는 소제목 아래 김수영, 황동규, 정현종, 오규원, 고은, 박이문의 시세계를 분석해놓은 글들을 한데 모으고 있다. 소제목만으로도 각 시인의 시적 풍경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1988년과 1998년에 씌어진 황동규론, 1990년, 1997년, 2005년에 각각 씌어진 정현종론, 1993년과 2005년에 씌어진 고은론이 나란히 실린 것을 보면서 각 시인들의 시적 경향의 변이와 변형을 캐내고, 혹은 시에 밀착해 함께 공명하는 비평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른바 ‘언어 탄생 이전의 음향’을 일찌감치 간파했었던 저자는 현대인의 언어와 몹시 밀접한 관계를 지녔다고 보고되는 네안데르탈인의 그 ‘허밍’에 가까운 언어를 캐묻듯이 이들 시인들의 목소리를 탐문하여 인간의 내적 기원에 대해 다시 한 번 묻고 있는 듯하다.

이번에 발간된 두 책의 제목으로 나란히 쓰인 ‘네안데르탈인’에 대한 독자들의 궁금증에 저자는 각각의 책 서두에 놓은 제사와 프롤로그를 빌려 이렇게 답한다.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는 25만 년 전에 유럽에서 진화하였다. 빙하시대의 후반기를 통째로 살아냈으며 3만 년 전에 멸종하였다. [……] 호모 사피엔스는 4만 년 전에 유럽으로 퍼져나갔으며, 아마도 네안데르탈인의 멸종에 일정한 원인 제공을 하였다. [……] 네안데르탈인들은 오늘날의 인간의 솜씨와 다를 바 없는 정교한 인공물들을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들이 복잡한 사회적 관계체계를 갖추고 지속적으로 검토하고 정비하면서 유지시켜 나갔다는 것도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기술을 이용해 사회관계를 매개하는 인공물을 만들 줄을 몰랐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가 늘상 하는 바와 같이 의상과 장신구를 고르고 보석과 귀걸이를 수집하는 행동은 할 줄 몰랐던 것이다.
-스티븐 미튼, 『노래하는 네안데르탈인 – 음악, 언어, 마음 그리고 육체의 기원』, pp. 222, 232~332

짧지 않은 세월 동안 비평의 경향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변해서 한국인의 의식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던 1970년대 비평의 최고의 성과라고 내가 생각하며 또한 나 자신이 기꺼이 따르려 했던 ‘공감의 비평’은 거의 멸실되고 아이디어와 이론으로 작품을 포장하는 ‘조념(造念) 비평’(잠정적으로 이 말을 만들어 보거니와)이 전국적인 유행이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또한 비평이 급격하게 국가 제도 안으로 편입되어간 세간의 사정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데, 그 연관도 참으로 가지가지인 듯하다. 나는 최근 한 스무 편 되는, 임자가 다른 평론들을 검토할 기회가 있었는데, 대부분의 글들이 프랑스의 한 정신분석학자를 원용하고 있어서 매우 놀랐다. 나의 놀람에는 이중적인 까닭이 있었는데 하나는 세계에 널려 있는 수많은 이론들을 마다하고 오로지 한 먹잇감에만 집중하는 이 거대한 편식증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사람의 글이 번역되지 않은 채 해설서들이 난무하는 상황이니, 짐작컨대 ‘그가 말했다고 한다’라고 써야 할 것 같은 대목에서 한결같이 ‘그는 말했다’라고 쓰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태는 원전을 정말 읽었는지 의심스럽기 짝이 없는 데도 모든 글들이 ‘마르크스가 말하길’을 앵무새처럼 되뇌던 저 옛날을 떠올리게 해 입 안이 씁쓸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물론 그 당시를 지배하던 계도 비평과 오늘의 조념 비평 사이에 무슨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는 건 아니어서, 당시의 계도 비평이 제도권 바깥에서 세계 전복을 꿈꾸는 자들이 제도권 안에서 안식을 구하고자 한 사람들을 통렬히 매도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분출되던 낭만적 혁명주의의 열기를 띠고 있었다면, 오늘의 조념 비평에는, 국가 이데올로기 관리기구가, ‘세계 몇 위’라는 말로 때마다 실감시키는, 나라의 학문과 문화를 장식하고자 하는 의지의 전방위적, 대규모적 실행에 맞춤하게, 다양한 이유로 선별한 대상을 예쁘게 가공하여 세계 문화와 학문의 맥락 속에 위치시키는 데, 즉 세계적 규모라고 가정된 모모한 진열장들에 ‘디스플레이’하는 데 능란한 기능주의의 산술이 작동하고 있다는 게 분명히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어느 것이든 이런 ‘쏠림’은 결국은 일시적인 유행에 불과해서, 사르트르, 루카치, 마르크스, 포스트모더니즘, 푸코가 차례로 그랬듯이, 일정한 때가 지나면 그 많던 마니아들이, “그 많던 싱아”처럼 빠져나가고, 소수의 진정한 취미인들만이 남아 그들을 읽는 일을 계속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론의 유행으로 보자면, 조만간에 정신분석을 진화심리학이 대체할 가능성이 무척 높거니와, 첨단 이론에 유달리 관심을 갖는 이들이라면 차라리 신다윈주의와 인지이론의 결합을 통해 괴물처럼 성장하고 있는 후자 쪽에 재빨리 눈길을 돌리는 게 나을 것이라고 충고하고 싶다. 그러나 나의 진짜 관심은, 내가 읽은 스무 편의 임자들 중에도 분명히 있으리라고 추측하고픈 진정한 취미인들에게 있는데, 그들은 세계의 잘 나가는 이론들을 추종자들과 마찬가지로 즐겨 읽으면서도 그것을 효율적인 생산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대화상대자로서 대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다른 독서를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독서 취향은 편식이 아니라 잡식이고, 독서 방법은 추출과 조합이 아니라 토론과 공감이며, 독서 태도는 장님 코끼리 더듬기 식이 아니라 통째로 눈 맞추고 몸 부딪는 식이다. 그리고 이렇다는 것은 그들이 이론을 읽을 때도 작품을 읽을 때와 똑같은 자세로 임한다는 것을 가리키는데, 삶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작품 속으로 진입하고 작품을 더욱 깊이 느끼기 위해 이론을 쓰다듬는 그 자세는, 대상의 ‘술부’에 개의치 않는 육체적 만남의 그것, 즉 기본적으로 성애적인 자세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야말로 조념 비평이 취하지 못할 자세인데, 왜냐하면, 후자의 관심은 옷을 벗기는 데 있지 않고 옷을 입히는 데 있으며, 따라서 기본적으로 장식적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와 보니 나는 저 진정한 취미인의 정신적 근원이 공감의 비평에 있다고 주장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다시 달려보고 싶다’는 느닷없는 발심은 지금 낡아빠진 꼴을 하고 무심히 버려져 있는 저 옛날의 비평을 되살려보고 싶다는 욕망에 다름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낙오병의 욕망은, 저도 모르는 자아도취 속에서, 자신의 물증들로서 이 소설론들을 제출하려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뜬금없는 각성의 계기가 되었던 찬물 세수를 다시 하고 정색을 하고 들여다보면 이 “자랑처럼 무성한” 글들은, 과도하게 주관적인, 다시 말해 느끼는 애정보다 퍼붓는 애정이 지나치게 많은 욕구불만자의 독후감처럼 보이고, 원래 그 비평을 세웠던 나의 오랜 스승들의 위대한 교감적 행동들에 비추어 보면, 세간의 언어로 ‘조족지혈’에 불과한 것이어서, 점직함만이 마음을 가득 채운다.
-『네안데르탈인의 귀환-소설의 문법』 제사와 서문 중에서

[언어language를 몰랐던] 네안데르탈인들은 그들의 두뇌를 어떤 정교한 통화체계를 위해 사용하였다.
그 통화체계의 성격은 ‘Hmmmmm,’ 즉, 비분할적Holistic이면서, 조절할 수 있었고manipulative,
태가 여럿이었으며multi-modal,음악적이고musical, 그리고 모방적mimetic이었다.
– 스티븐 미튼, 『노래하는 네안데르탈인』, p.221.

존재한다는 순수한 사실에 대한 동의로서의 우정. 친구들은 무언가(출생, 법, 장소, 취향)를 나누는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언제나 우정의 체험에 의해서 이미 서로 나누고 있다. 우정 자체가 모든 다른 나눔에 앞서는 나눔partage이다. 왜냐하면 우정이 모든 나눔에 분별의 척도로서 개입시키는départage 것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대상에 아랑곳 않는 이러한 분배, 이러한 함께-느낌이 정치를 구성한다.
– 조르조 아감벤, 『우정』, p.40.
나는 내가 왔던 곳이 내가 사랑한 시인들의 목젖 아래 부근이었음을 알았다. 더불어 10년 전 젊은 시인 김태동의 시를 두고 ‘언어 탄생 이전의 음향들’이라고 명명하고자 했던 충동을 적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내 연정의 일지에 귀향기라는 이름을 붙여줄 명분을 얻게 되었다.
돌아올 곳은 여럿일 수밖에 없었다. 최초의 느낌 이후 모든 재생은 산란적이고, 그 동작의 형태는 수와 부피를 낳는다. 이 책은 그 점점이 뿌려진 동작들을 가둔 첫번째 원환이다. 소제목으로 쓰인 말들은 시의 ‘풍경’을 암시한다. 여기 수록된 어느 글에서 적었듯이 ‘풍경’은 현실로부터의 도피도, 자연으로의 귀의도 아니다. 그것은 현실을 닫고 여는 사건의 다양한 양태들의 총칭일 따름이다. 강조점은 ‘사건’ 위에 찍힌다. 그 사건은, 되풀이해 말하지만, 유한자들의 사건인 한, 언제나 점정(點睛)에서 헷갈려 버린 용그림의 훼절(毁折)된 꼴이 진면목인 사건이다.
때문에 나는 이 귀향이 혹시나 ‘마르탱 게르의 귀향’이 아닐까 의심한다. 내가 사랑하는 시인들에게 그것이 탄로날까 봐 걱정이다.
-『네안데르탈인의 귀향-내가 사랑한 시인들·처음』 제사와 서문 중에서

목차

차례
제1부 발목
‘발목까지/발밑까지’의 의미 ― 김수영의 「풀」

제2부 바람
여행/유배와 망명 ― 황동규의 시 세계
만화경 속(으로)의 하양 ― 『황동규 시 전집』에 대해

제3부 숨결
그저 미망일 뿐인, 노는 생명들 속으로 ― 정현종의 『사랑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환경을 가꾸는 시인 ― 정현종의 『세상의 나무들』
까닭 모를 은유는 “떨어지면 튀는 공”이다 ― 정현종 시의 원초적 장면을 찾아가기

제4부 어느새/다시
‘어느새’와 ‘다시’ 사이, 존재의 원환적 이행을 향해― 오규원의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

재5부 빈 들
전이 중에 점멸하다 수열 속으로 ― 민족을 발견하던 때의 고은
저물녘 빈 들에서 부르다 ― 고은의 『 아직 가지 않은 길』
고향엘 처음 간다고? ― 박이문의 『아침 산책』

작가 소개

정과리 지음

1958년 대전 출생으로,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1979년『동아일보』신춘문예에 「조세희론」으로 입선하며 평단에 나왔다. 저서로 『문학, 존재의 변증법』(1985),『존재의 변증법 2』(1986),『스밈과 짜임』(1988),『문명의 배꼽』(1998), 『무덤 속의 마젤란』(1999),『문학이라는 것의 욕망─존재의 변증법 4 』(2005),『문신공방 하나』(2005),『네안데르탈인의 귀환─소설의 문법』(2008), 『네안데르탈인의 귀향─내가 사랑한 시인들·처음』(2008) ,『글숨의 광합성─한국 소설의 내밀한 충동들』(2009) 등이 있으며, 소천비평문학상, 팔봉비평문학상,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김환태평론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전자책 정보

발행일 2012년 8월 28일 | 최종 업데이트 2012년 8월 28일

ISBN 978-89-320-1847-8 | 가격 10,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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