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문학과지성 시인선 339

최하연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07년 11월 16일 | ISBN 9788932018218

사양 · 128쪽 | 가격 6,000원

책소개

“일상 언어로부터의 철저한 탈구가 그에게 이르면 시가 된다.”
참신한 화법으로 매혹적인 연주를 하는 최하연의 첫 시집,『피아노』

눌러도 소리가 나지 않는 건반의 독백
시단에 신선한 호흡을 불어넣으며, “이미지의 미학에 화법의 가벼움을 겹쳐놓는 새로운 미학적 기획”으로 주목 받아온 시인 최하연의 첫 시집 『피아노』가 문학과지성사에서 2007년 11월 16일 출간되었다.
2003년 제3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시 부문에서 「모피를 걸친 헬레나」 외 4편으로 시단에 나온 최하연 시인은, 심사를 했던 당시 『문학과사회』 편집 동인들(김동식, 김태환, 박혜경, 우찬제, 이광호, 정과리, 최성실)로부터 “서정시의 기본적인 규범과는 다른 지점에서 사물에 접근한다”는 평을 받았다. 우선 심사위원들이 주목한 그의 시의 강점은 “사물에 인간적인 가치와 정서를 덧입히는 익숙하고 상투적인 수사학을 넘어”서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선작 해설의 내용을 빌리면, 이 젊은 시인에게 있어 “시적 화자는 사물을 묘사하는 자도 아니며,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자도 아”닌 “‘사물과 풍경의 독백’을 듣는 자”로 나타난다. 여기서 사물의 독백이란 “사물들의 시간을 엿보는 자의 독백”이자, “풍경 안의 내적 사건들의 독백, 혹은 그 사건들을 지각하는 독백에 가깝다.” “그래서 그 독백은 누군가 엿듣기를 바라는 독백, 혹은 누군가와 함께 발견하고 싶은 독백이 된다.”
최하연 시인의 언어를 통해 나온 독백들이 한 권의 시집 안에서 독자들을 기다린다. 데뷔 후 4년 만에 나오는 첫 시집이다. 책상 위에 그려진 눌러도 소리가 나지 않는 건반들에 가만 귀를 기울여보자. 총 3부에 걸쳐 44편의 작품들로 묶인 최하연의 첫 시집 『피아노』다.

악몽의 읊조림, 그 언어의 새로운 경지를 향한 유영
시집 소개 글에 적힌 바와 같이 『피아노』는 언어에 대한 자각이 없이는 다가가기 힘든 세계이다. 해설에서도 “최하연의 시는 이해의 영역을 훌쩍 벗어나 있”으며 “첫머리부터 끝까지, 그의 시는 전체가 불협화”라고 밝히고 있다. 이 시집에서 시인은 언어의 자유와 의미의 질서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으며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최하연의 시가 가진 또 하나의 힘이다. 그의 아슬아슬한 전진은 언어의 새로운 경지를 향해 유영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철두철미한 언어적 배반은 역설적이게도 완미한 형상의 새로운 비의성을 낳는다.” 이번 시집에서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강계숙 씨는 여기서 완미한 형상이란 “세계와 현실과 인간의 악몽화, 그것의 치밀하고 정교한 발현, 그리고 악몽의 현재화를 위한 구성의 운산(運算)을 가리키”고, 새로운 비의성은 “그러한 악몽이 세계의 꿈으로 탈바꿈되는 신비, 요컨대 ‘악몽의 꿈’이 있다면 이런 형태일 것이라 설득될 법한 불가사의한 임의 분출을 뜻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어둔 밤에는 밤의 노래가 있듯, 악몽의 세계에도 꿈은 있다. 비록 추한 심상일지라도 그것을 외면하지 않고 음유할 때, 악몽(의 세계) 역시 자기 한계와 부정성을 넘어설 가능성을 얻는다”고. 그가 시집 『피아노』에서 흘러나오는 ‘악몽의 읊조림’이 “자기 극복의 가능성을 위한 시적 도전이자 당대를 향한 예술적 응전이라 할 수 있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경계에서 들리는 불길하고도 매혹적인 선율
『피아노』 첫 곡은 「무반주 계절의 마지막 악장」이다.
강계숙 씨는 “우리의 감각을 벗어나 상식을 무용하게 만드는 비가시적인 공간성, 스스로 움직이는 어두운 공간성의 현현”을 이 시가 표상하는 풍경이자 이 시에서 나타나는 “검은 창”의 실체로 보고 있다. 또한 “이 막막한 곳을 채우고 있는 것이 물”이라고 역설한다. 그리하여 “무궁(無窮)한 검은 물의 공간”이 우리가 마주하는 첫 시의 정체라고 밝혀내기에 이른다. 그 “검은 물의 공간은 스틱스styx처럼 망각과 사멸의 이미지가 가득”하고, “밀랍 인형의 초점 없는 표정”과 “얼어 죽어라 얼어 죽어라”라는 저주, “입을 떼도 들리지 않는 숲의 비명”이 가라앉아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곳은 삶이 아니라 죽음을, 생명이 아니라 주검을 잉태하는, 자궁(子宮)이 아닌 무궁(無宮)이며, 또한 우리의 뒷면이라고 해설의 초반에 적고 있다. 그는 이러한 무궁(無窮/無宮)을 최하연 시인의 시 세계를 관통하는 핵심 모티프 중 하나로 보고, 이것이 드러나는 다양한 이미지들을 『피아노』에 수록된 작품 곳곳에서 찾아내기도 했다. 이를테면, 생명의 창조나 생성의 모태와 관련이 없다는 점에서 무궁(無宮)이라 할 수 있는 “목 한 번씩은 매봤을 물그림자 사체들”(「여의도의 봄밤」)과 무궁(無窮/無宮)의 물, 다시 말해 무궁(無窮)한 무궁(無宮)이 표상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보여주는 “아기는 여전히 튜브에 꽂혀 있고/웃고 있”는 공포스러운 광경(「산란 3」)이 그것이다.
첫 작품에서부터 “예언과 기원(祈願)과 계시가 혼재된 불길하고도 매혹적인 선율”로 독자의 발목을 잡는 최하연 시의 매력은 가만히, 조용히, 아득해지는 뒷면의 세계를 보여준다는 데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뒷면의 세계를 바라보며 우리가 서게 될 곳은 “현실과 비현실, 사실과 꿈, 낮과 밤, 육체와 영혼, 삶과 죽음,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라 할 수 있다.
그 아슬아슬한 경계를 지나,『피아노』의 칠흑처럼 검은 창을 들여다본다면, 독자들은 낯설지만 알 수 없는 전율을 느끼게 되는 특별한 미학적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 작품 속으로

바람이 눈을 쌓았으니
바람이 눈을 가져가는 숲의 어떤 하루가
검은 창의 뒷면에서 사라지고
강바닥에서 긁어 올린 밀랍 인형의 초점 없는 표정처럼
나무나 구름이나 위태로운 새집이나
모두 각자의 화분을 한 개씩 밖으로 꺼내놓고
그 옆에 밀랍 인형 앉혀놓고
여긴 검은 창의 경계
얼어 죽어라 얼어 죽어라
입을 떼도 들리지 않는 숲의 비명
뒷면들마다 그렇게 모든 뒷면들마다
입 맞추며 먼 강의 물속으로
가라앉으리 ─「무반주 계절의 마지막 악장」 전문

섬이 있다네, 교회가 있다네, 섬에는 우체국이 있고 좁은 길이 있고, 어둠 속에 숨은 달이 길의 끝을 자꾸만 늘이고 있다네, 바다는 끝내 수평선에 목을 매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네,

뒤돌아보면 하나 이상의 하나가 자꾸만 따라온다네, 앞서 가지도 않으면서 기다리지도 않으면서, 섬의 하루는 달빛을 따라 바다로 간다네,
오늘은 만선이었고, 만선 직전의 어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네, 얼마나 더 가야, 그 섬에 닿을지, 얼마나 더 가야, 나는 섬 밖에서 섬을 바라볼 수 있는지, 누군가 모든 길들을 처음으로 되돌리고 있는데,

교회의 종탑은 순간 반짝인다네, ─「콘체르토」 전문

단, 철탑 A′의 머리는 밑변의 머리를 능히 감당할 만큼 높고 빛나 누울 시간조차 없고 전선 위의 부표는 하루 종일 끝말잇기 중이시다

1) 물고기는 죄다 폐병을 앓고 있고 낚싯대는 속이 허해 지렁이를 물고 있고 떡밥 낚시 금지보다 저렴한 벌금으로 난간 위의 저 원피스 몇 초간은 자유이고 빈 줄에 빈 갈고리 내가 사랑이라 불렀던 그녀는 찌처럼 사라지네

2) 철탑 A의 두 어깨는 늘 혈기 왕성하고 의젓하며 절두산은 도난당한 절벽이고 절벽은 매 천 년마다 얼마짜리 주차 중인지 브레이크를 밟으면 바퀴도 난간이 무섭지 않아, 강변의 도로는 밤낮으로 자폐를 앓고 있고 어제 잘린 머리들은 분리수거 대상이고 망원지구 시민공원은 지금 冬安居 순례 중이시다
3) 당인리 화력발전소 굴뚝은 순례자의 회초리고 새들은 아무 때나 종아리를 걷고 있고 일단 맞으면 구름도 금세 멍이 들어, 매 맞는 소리에 고압선의 허리가 휘고 줄 끝에선 수백만 플러그들 아우성이고 애완견은 쇠사슬이 곧 생의 담보다 노인의 운동화는 더럽게 새것이고 아저씨의 배는 아저씨보다 늘 먼저 뛰어가네

4) 철탑 A 아래 일 분 동안 열세 개의 머리통이 엇박자로 지나가고 여의도의 하늘은 충치를 앓는지 퉁퉁 부어 있고 배부른 바지선 한 척 강 끝으로 가고 있다 강인지 길인지 끝나는 큰 섬에 토사물 가득한 머리통 수억만 개 쌓여 있다 하는데 아무도 본 적 없다
─「철탑 A를 강 이쪽에 철탑 A′를 강 저쪽에 놓고 이 마름모의 밑변을
강물이라 한다면, 다음 중 고압선의 독백으로 가장 알맞은 것은?」 전문

1

손 없는 여자, 발 없는 여자, 머리 잘린 여자, 둔부만 남은 여자, 왼쪽 종아리만 셋 가진 여자, 드물지만 아무것도 안 입은 여자 하나도, 나는 갑자기 쇼윈도 안 마네킹과 결혼하고 싶어진다, 예식 촬영은 이 거리에 자주 출몰하는 커다란 외눈, VJ에게 맡기고 나는 성혼 선포와 더불어 햇빛과 창 사이를 침대를, 창과 먼지 사이에 식탁을, 금빛 가격표 뒤에는 네온으로 찰랑거리는 욕조를 들일 테야, 그녀가 출근하면 하루 종일 침대 끝에 앉아 수만 개의 채널을 돌려가며 TV를 보겠지, 어느 채널이나 다 우리 마누라가 주인공인, 동그란 브라운관이 두 개씩 달린,

2

동물의 왕국, 물고기를 잡아먹는 수초를 보고 있다, 머저리 같은 물고기, 화면 속 물고기의 얼굴이 줌─인 되는 순간, 쇼윈도 안 그녀가 그녀 눈동자 속 나에게 포획된다, 마치 동시 화면 서비스처럼, 이 포즈는 어떤가요, 모니터링을 부탁하는 그녀, 자세를 바꾸면 바꿀수록 수초의 조건은 까다로워진다, 지느러미를 최대한, 버둥거릴 것, 하체를 버리든 상체를 버리든, 아니 허리 없는 물고기에겐 너무 잔인한 포즈인지 몰라, 햇살이 빼빼로처럼 그녀의 얼굴에 박힌다,

여보, TV는 그만 보고 자꾸 풀어지는 눈동자에 송진이라도 발라주지그래,

유리 안쪽으로 손을 넣으려는데, 미니 시리즈 예고 자막처럼, 마치 비를 뿌리는 버그처럼, 앵벌이 아저씨 몸통이 한 개, 화면 하단으로 들어왔다 사라진다,

작가 소개

최하연 지음

시인 최하연은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나, 2003년 제3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다. 시집 『피아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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