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미망에서 깨어나 순간을 거머쥐기 위한 新언어를 향한 갈망”
자신의 운명과 세계의 운행에 대한 깊은 사색과 반성이 성취한 시, 그 마술적 아름다움
가시적인 사물의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저편의 심연을 응시하고 삶-존재의 근원성을 파고드는 고독하지만 깊고 차분한 목소리의 시 세계로 주목받아온 시인 조용미가 신작 시집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문학과지성사, 2007)을 펴냈다. 제16회 김달진문학상 수상작인 시 「검은 담즙」을 비롯해 4부로 나눠 총 58편의 시를 묶고 있는 이번 시집은, 담담한 일상에 내재한 불안의 기미로 힘겨워하는 존재의 목소리를 탁월한 시적 상상력으로 조탁했던 첫번째 시집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1996)와 “사물의 비밀의 숲을 가로질러” 그 내부의 “진경이 전언하는 밀어의 내용”(홍용희)을 인식해가는 여로를 형상화했던 두번째 시집 『일만 마리 물고기가 山을 날아오르다』(2000), 그리고 제목의 ‘자화상(自畵像)’이 입증하듯 사물과 삶에 대한 이해의 척도를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하고자 한 ― ‘안’을 집요하게 파헤쳐 ‘밖’을 내다보려 한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2004)에 이은 시인의 네번째 시집이다.
이번 시집 역시 그의 전작들을 통해 익숙해진 존재들 ― 꽃 ․ 풀 ․ 나무 ․ 길 ․ 천체 ․ 산 ․ 오름 ․ 사찰 들을 만날 수 있다. 흔히 풍경을 응시하거나 그 풍경 속에 자신을 투사하는 서정시의 경우 관조나 사색 혹은 구태의연한 경구나 잠언으로 기울기 십상인데, 조용미의 시는 이와 한참 거리를 두고 있는 듯하다. 시인의 발길은 복잡한 대도시를 벗어나 한반도 남쪽의 거의 전 지역에 걸쳐 고단한 몸의 궤적을 그려간다. 그 발자취는 풍경을 훑어나간다기보다 “외부의 풍경과 내적 심리가 조우하는 순간 빚어지는 갈등이나 파문을 성찰”적으로 드러내는 데 가까우며, 그것도 단순한 시각적 차원이 아니라 모든 감각이 동원되는 “전면적이고 전신적인 작업”(남진우)으로서의 ‘풍경 앓기’이다. 조용미의 시적 화자는 외부의 풍경과 관계를 맺고 이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새롭게하는 외롭고 지난한 과정에 경주한다.
나를 뚫고 지나가는 풍경들이 또 나를 앓고 있는 길 위, 몸에 미열이 인다 어불도 앞 책바위에 와 나는 내 안의 길을 다 쏟아놓는다 풍경들은 나를 잘 읽지 못한다
―「구름 저편에」 부분
한편 ‘무수한 죽음이 삶을 키운다’는 생의 비의를 너무도 잘 아는 시인이지만, 그러기에 “직관적인 시선의 힘”으로 “사물이나 풍경에 내재되어 있는 생명”을 일깨우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기에 더 절실하게 매달리는 시적 화자는 자신의 감각을 사방을 향해 활짝 열어두고 급기야 별―천체에 이르는 길목에 당도한다. 별의 운명에서 지상에 발붙이고 있는 모든 것들의 운명까지 감지해내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을 갈망하고 만질 수 없는 것을 탐문하는 자의 이름이 시인이라고 하나, 조용미의 그것은 군더더기 없이 나열한 몇 개의 지명과 일상어만으로 더할 수 없이 빼어난 시적 아름다움을 성취해내고 있다. 어둡고 서늘한 정조의 시어와 심상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가운데 유독 유순하고 따스한 정조로 각인되는 시의 모습은 이렇다.
나를 태운 기차는 청령포 영월 탄부 연하 예미를 지나
자미원으로 간다
그 큰 별에 다다라서도 성에 차지 않는지
무한의 너머를 향해 증산 사북 고한 추전으로 또 달린다
[……]
오늘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
북두칠성과 자미원의 운행을 짚어보는 것은
저 엄나무가 우뚝 서 있는 것과 새털구름이 지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자미원 간다」 부분
일찍이 그의 스승이었던 오규원은 조용미의 시를 가리켜 그리움과 삶의 비의에 가닿는 도저한 욕망이 빚어낸 ‘도상미학(道上美學)’이라 명명하고, “그 세계란 얼마나 끔찍한가. 아니, 얼마나 끔찍한 아름다움인가”라고 적은 바 있다. 한 평자는, 검은 물-하늘에 흰빛을 내뿜는 달의 천착에서 생이 활달하게 펼쳐지는 한복판을 죽음의 심연과 연결 짓는, 이른바 ‘존재의 이원성’에 집중하는 그의 시를 두고 “죽음을 품은 풍경과의 미메시스”라고 평하기도 했다. 절정의 황홀을 갈망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소멸해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 절정 뒤에 찾아오는 절멸의 운명, “지상에서 가장 헛된” 찰나의 아름다움은, 그걸 알면서도 시인이 정주하지 않고 계속해서 부딪히게 하는, 시 쓰기에서 손 뗄 수 없는 절대 화두이다.
너의 죄는 비애를 길들이려 한 것이다 생의 단 한 순간에도 길들여지지 않는 비애는 그을린 태양 아래 거칠고 긴 숨을 내쉬며 가만히 누워 있다
쓸갯물이 모여 생을 가르는 검이 되기도 하다니 검은 폭포 아래에서 모든 것을 부수어져 거품이 되어버린다 거품이 되어 날아가는 것들의 헛된 아름다움이 너를 구원할 수 있을까
―「검은 담즙」 부분
순간의 외형에 경도되는 것을 철저히 경계하고, 본시 변화를 본질로 삼는 자연, 그것이 품고 있는 내부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인은, 그리하여 “무서운 고독 속에서 벼리어낸 저 선연하고 아름다운 적멸의 언어”(이혜원)와 마주한다. “시인의 살과 잠과 영혼”을 태워 간신히 부여잡은, 하여 무섭도록 장엄한 생의 진실이라면 우리도 한번 귀기울여봄 직하지 않은가.
빗소리가 작아지고 있다 밤새 높았다 낮았다 하던 빗방울의 음계가 머리맡을 오래 어지럽혔다 문을 여니 수련이 한 송이 피어 있는 연못 저쪽에서 개구리 울음소리가 금방 방 안으로 들어왔다 소리들은 다 어디서 쏟아져 나오는 것일까
뿌옇게 비안개가 내려오고 있다 비안개는 대숲의 한쪽으로 총총 발걸음을 옮기다 바람이 몰아치면 소리를 퍼뜨리며 아무렇게나 여기저기로 흩어진다 진박새가 보랏빛 꽃송이가 둥그렇게 피어있는 수국 속을 포동포동 들락거리고 있다
몸을 가다듬는 것이 마음을 깨침만 하겠는가, 하겠는가…… 간밤의 글을 중얼거리는 내 목소리가 빗소리와 함께 섞여버리는 산속, 계곡의 급류는 온갖 소리를 내며 흐른다 그날 절벽 구멍 난 바위틈에서 들은 목탁소리는 내가 보지 못한 물거품이 세운 절,
흰 거품을 일으키며 쏟아지는 물소리에서 나는 여러 날 무엇을 듣고 있는 것이냐 개안을 하듯 세상이 새로워지는 일은, 한 우주와 한 세계를 다시 얻는 일은 저 물소리에서 목탁소리를 듣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물소리가 다시 커지고 있다 고요하다 ―「두륜산 小記」 전문
[시인의 말]
시선의 힘,
그 신비하고 강력한 무언의 말을 나는 믿는다
시선은 최대의 언어다
세계는 나를 바라본다
삐걱삐걱
몸에서 이쁜 소리가 난다
내면의 어둠, 그 검은 슬픔을 창조의 원동력으로 삼는 이 시인의 시쓰기는 우리 시에서 보기 드문 음울하면서도 아름다운 풍경을 조형해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생을 가르는 검의 서늘한 날카로움을 아는 자만이 일상의 무감각에서 깨어나 상실의 슬픔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때 그녀를 사로잡고 있던 어둠은 단지 어둡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마술적 아름다움으로 빛나게 될 것이다.
―남진우, 시집 해설 「생을 가르는 검」 중에서
[앞날개 소개글]
시집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은 자연 혹은 풍경 속에 자신을 집어넣으려 하는 시적 욕망의 지도이다. 자연은 거기에 있을 뿐, 무엇을 위한, 무엇을 향한, 움직임이나 의미가 아니다. 시인은 의미의 세계에서 탈출하여 그저 거기에 있는 나무나 꽃이 되고 싶은 건지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러한 자연이나 풍경을 통해 시인은 어느새 자신을, 자신의 이미지를 그려내고, 읽어낸다. 결국 시인의 발걸음은 풍경과 자신, 세계와 자아와의 진정한 화해 혹은 일치를 향해 나아간다.
(표지 컷: 이제하)
[뒤표지 시인 산문]
직관적인 시선의 힘은 사물이나 풍경에 내재되어 있는 생명을 일깨운다. 풍경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그것에 귀 기울이면 존재가 심화되는 것을 느낀다. 시선을 내부로 파고들수록, 사물들은 몸을 더 쉽게 열어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삶이란 무엇일까. 어느 순간 문득 느껴지는 미열이거나 서글픔 같은 것, 혹은 거품 같은 것은 아닌가. 천지를 나눈 사이에 빈 허공이 있고 그 쪼개어진 시원의 틈에 인간이 겨우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무수한 죽음이 삶을 키우는 것이리라.
아름다움은 인간의 세상을 능가한다. 그런 이미지가 살아 펄떡이는 시를 만나면 아직도 가슴이 뛴다. 새로운 이미지는 한 세계를 창조하는 것과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 오직 새로운 시적 이미지들만이 순간을 거머쥘 수 있게 해준다. 새로운 이미지와 새로운 언어를 향한 갈망은 계속 시인의 살과 잠과 영혼을 앗아갈 것이다.
우리에게 자연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자연에서 배우는 것은 ‘변화’일 것이다. 만물이 모두 실체가 없고 상주가 없고 공적하여 손에 잡히는 것이 없이 흘러간다는 것,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 이것을 늘 깨닫게 해준다. 변화를 자신의 존재방식으로 받아들이는 삶은 진정 자유로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