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들, 끝없는 상실의 노래로 부활하다!
오르페우스의 시선으로 바라본 2000년대 한국 문학의 표정들
2008년 제19회 팔봉비평문학상 수상작
계간 『문학과사회』 편집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문학평론가 박혜경의 여섯번째 비평집 『오르페우스의 시선으로』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19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평단에 나온 저자는 20여 년간 꾸준한 평론 활동으로 세기 말과 21세기 벽두를 찬찬히 살펴왔다. 특히 이번 여섯번째 비평집에서는 “근대문학의 종언에 대한 풍문” 속에서도 “한국 문학이 한국 문학의 구각(舊殼)을 뚫고 오르페우스의 시선으로 문학 내부의 심연을 투시하기 시작한” 2000년대 한국 문학의 표정들을 세밀하게 포착해 날 선 비평의 도마 위에 올려놓았다.
이번 비평집의 제목인 ‘오르페우스의 시선으로’는 박혜경 평론가의 문학에 대한 인식론적 세계관을 내포하고 있다. 오르페우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최고(最古)의 시인이자 악인(樂人)이다. 그는 아내 에우리디케가 죽자 하프 솜씨를 발휘해 명계(冥界)의 왕 하데스로부터 아내를 데려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냈다. 그러나 지상에 돌아갈 때까지 아내를 돌아보지 말라는 약속을 어기는 바람에, 에우리디케를 다시 잃고 만다. 저자는 오르페우스 앞에 놓인 평생의 굴레, 즉 “절대적 상실과 그리움의 탄식을 노래하며 방랑해야 할 운명”에 주목한다. 그리고 “끝없는 상실의 노래로 부활한” “문학이 처한 운명적 딜레마”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을 늦추지 않는다. 아니, 그 시선은 더욱 굳건해져서 “문학은 결국 문학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 자신의 고통과 영광을 실현한다”는 다짐과도 같은 선언을 통해 문학의 항구성(恒久性)을 주문한다.
근대문학의 주요한 성장 동력이었던 리얼리즘으로 인해
“한국 문학은 단단해진 대신 딱딱해졌고, 선명해진 대신 빈곤해졌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사실주의의 제국을 뛰쳐나온 작가들의 한껏 난만하고 풍성해진 상상력의 군무를 목도하고 있다.”
저자는 특히 근대의 신화와 더불어 한국 문학의 한가운데를 질주해온 리얼리즘의 약점들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이제 “사실주의의 제국을 뛰쳐나온 작가들의 한껏 난만하고 풍성해진 상상력의 군무를 목도하고 있다”고 말한다. 즉 리얼리즘의 단단함과 선명함은 형식의 자유 대신 문학의 권능으로 바뀌어 한국 문학을 “단단해진 대신 딱딱”하게 만들었고, “선명해진 대신 빈곤”하게 만들었다는 것인데, 그 근대문학의 종언과 사실주의 제국의 붕괴 시점에서 이제 문학 내부의 심연을 투시하는 새로운 시각들을 찾게 되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이번 여섯번째 비평집 『오르페우스의 시선으로』는 그러한 ‘난만하고 풍성해진 상상력’을 발산하고 있는 한국 문학과 그 작가들에 대한 날카롭고 세밀한 기록들인 셈이다.
박혜경 비평집 『오르페우스의 시선으로』가 다루고 있는 텍스트들은 소설가 배수아, 김연수, 이인성, 한유주, 천운영, 윤성희, 편혜영, 정이현, 이혜경, 전경린, 박완서, 이청준, 그리고 시인 김혜순, 김록, 조용미, 이진명, 황인숙 등의 작품들로 이루어졌다.
■ ‘책머리에’ 중에서
반면 오르페우스는 스스로 명부의 어둠 속으로 내려가 세이렌의 자매인 에우리디케, 낮의 현실 속에서 지워져버린 죽은 연인을 다시 낮의 세계로 불러내려 한다. 그러나 명부의 어둠을 관통하는 그의 간절한 사랑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 위에서 무너져내린다. 찰나에 명멸하는 죽음의 에피파니만을 남기고 사라진 에우리디케는 낮의 세계로 귀환한 그에게 영원한 결여와 상실을 표상하는 부재의 표지가 된다. 그리하여 사라진 에우리디케는 블랑쇼가 “예술이 도달할 수 있는 극단”이라고 말했던 것, 존재 자체의 순수한 부름을 영원한 갈망의 이름으로 호명하는 예술의 기원이 된다. 세이렌의 치명적인 노래는 오디세우스가 세이렌의 섬에서 벗어나는 순간 지워져버리지만, 에우리디케는 오르페우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끝없는 상실의 노래로 부활한다. 문명의 세계에서 지워져버린 바깥의 여자들, 그 기원의 자리를 찾아 헤매는 글쓰기의 운명은 이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블랑쇼에 의하면 “글을 쓴다는 것은 오르페우스의 시선과 함께 시작된다.” 오르페우스의 시선은 자신의 노래로써 세이렌과 에우리디케가 사라진 지점을 응시하는 시선이며, 그 응시에 의해 기원의 자리에 가까이 다가가려는 시선이다.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를 이끌고 무사히 죽음의 문턱을 넘어 이승의 삶으로 귀환했다면? 아마도 그는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키우는 필부의 삶에 머물렀을지 모른다. 기원이 상실된 자리에서 글쓰기가 시작된다. 영원한 상실과 결여의 빈자리를 메우려는 열망과 절망은 글쓰기가 지닌 가장 본질적인 운명이다.
[……]
글쓰기가 언어를 통해 도달하려는 존재의 기원은 글의 바깥, 언어의 바깥에 있다. 세이렌의 노래는 언어 이전의 “파도의 골, 바위들 사이의 입 벌린 동굴, 백색의 해변”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존재 자체의 순수한 부름이다. 그 부름에 응답하기 위해 글쓰기는 문명이 자신에게 부여한 언어의 형식을 찢고 나와야 한다. 그러나 글쓰기는 동시에 언어의 형식을 통해서만 자신의 운명을 살아갈 수 있다. 문학은 결국 문학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 자신의 고통과 영광을 실현한다. 문학이 처한 운명적 딜레마는 문학이 뿌리내린 근원적 토양이다.
제1부
기원을 향한 물음―배수아와 김연수의 작품들을 중심으로
소설, 자기부정의 형식―이인성과 한유주의 경우
계몽의 패러다임과 상상력 빈곤의 문제―한국 문학의 도식성 혹은 정형성이라는 문제제기와 관련하여
‘악’의 도덕으로서의 문학―‘좋은’ 문학에 대한 단상
문명에 대한 반문명적 사유―천운영, 윤성희, 편혜영의 소설들
제2부
당신은 파국으로부터 안전한가?―정이현
가족의 이름으로 살아간다는 것―이혜경
재와 불꽃의 시간 사이에서 떠도는 여자들―전경린
겉멋과 정욕―박완서
생의 어두운 미궁을 향해 던지는 또 하나의 물음―이청준
제3부
불온한 꿈, 혹은 실천적 사랑의 형식
시, 혹은 여성성의 잃어버린 영토―김혜순론을 위한 시론(試論)
시의 현실과 시의 꿈, 그 관계의 동력학―김록, 조용미, 이진명, 황인숙의 시들
제4부
문학과 여성과 직업, 그 두 겹의 불화(不和)―한국 소설 속의 여성과 직업
젊은 비평의 현장―김미현, 김태환, 오형엽의 비평집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