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나의 도시』의 작가 정이현, 신작 소설집 출간!
「타인의 고독」 「삼풍백화점」 「오늘의 거짓말」 등 총 열 편의 단편 수록
2006년, 출판계와 평단과 각계의 독자군은 물론이고 방송/영화산업 분야에까지 걸친 끊임없는 관심 속에 일약 베스트셀러로 발돋움한 장편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의 작가 정이현의 새 소설집 『오늘의 거짓말』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2002년 「낭만적 사랑과 사회」로 제1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정이현은 그동안 소설집 한 권(『낭만적 사랑과 사회』)과 장편소설 한 권(『달콤한 나의 도시』)을 내면서 정이현식 소설의 어법이 이미 완성되었음을, 그리고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더불어, 독자들의 열광적인 지지뿐 아니라 2004년 「타인의 고독」으로 이효석문학상을, 2006년 「삼풍백화점」으로 현대문학상을, 그리고 2006년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수상하는 등 정이현식 소설의 “도발”에 평단에서도 적극적인 반응으로 그 문학적 성취를 격려하고 있다.
굉장히 빨리 순식간에 읽어나갔다._se5jin001
정이현이 한층 더 따뜻해졌다._dramafactory
경쾌하고 빠르게 읽었으나 그 여운은 길게 남았다._hoil0102
(네이버 독자서평)
이번 소설집 수록작 「타인의 고독」과 「삼풍백화점」은 이효석문학상 수상집과 현대문학상 수상집에 실려 이미 독자들의 뜨거운 찬사를 받은 터이다. 『달콤한 나의 도시』로 수많은 애독자들의 사랑을 받으며 베스트셀러 작가의 자리에 오른 정이현의 인기는 이번 소설집 『오늘의 거짓말』의 발간으로 더욱 견고해질 듯하다.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정이현 소설의 강점은 빨리 읽힌다는 점이다. 끝까지 재미를 놓치지 않고 읽을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소설을 읽는 재미에도 여러 종류가 있지만 특히 정이현 소설의 재미는 ‘세대적 공감’에서 온다. 2,30대 독자들 개개인이 지나왔을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모습들의 구석구석을 짚어내는 정이현의 감각적인 이야기들은 때로는 수수하고 때로는 화려하게 이 시대 젊은이의 감성을 자극하고 어루만진다. 소설집 『오늘의 거짓말』에 실린 열 편의 단편들은 우리의 일상이 정이현의 언어로 풀어질 때 생기는 새콤한 맛의 여운으로 가득하다.
재혼 전문 결혼 정보 회사의 분석에 의해 B+의 평점을 받은 서른네 살의 이혼남이 전처와 함께 키우던 강아지를 누가 맡아 기를지를 두고 실랑이를 벌이며 시작되는 이야기, 「타인의 고독」은 혼자 사는 현대인들의 일상을 세밀하게 스케치한다. “스물한 살에 만난 여자와 스물여덟 살에 결혼해서 스물아홉 살에 헤어졌다”라는 문장에서는 개인의 구구한 추억을 너무나 간결하게 정리해내는 데 따르는 아스라함을 느끼게 되고, “먹다 남은 라면 국물을 버리는 바람에 수세식 변기가 막히는 사건을 겪은 뒤부터는 허출한 밤 야참으로 라면을 끓여 먹는 일도 그만두었다”와 같은 문장에서는 그 적나라한 상황 묘사에 실소를 터뜨릴 것이다.
이 시대 중상류층의 삶을 대변하는 지역에서 성장한 여주인공의 삶을 보여주는 「삼풍백화점」 역시 1990년대의 현실을 살아가는 한 여성의 지극히 일상적인 내면 풍경을 묘사한다. “마음과 마음 사이의 알맞은 거리를 측정하는 일은 그때나 지금이나 내겐 몹시 어렵기만 하다”는 그녀의 말에서 도시적 삶이 요구하는 인간관계의 매뉴얼을 준수하면서도 그 속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고민을 놓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아들이 음주운전으로 사망사고를 내자 이를 수습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부모가 나오는 「어금니」, 어린 시절 화려한 보이소프라노였으나 현재는 별 볼일 없는 지방 합창단에서 일하는 남자의 하루를 다룬 「그 남자의 리허설」, 1991년에서 기억이 멈춰버린 동창과의 당황스러운 재회를 그린 「위험한 독신녀」 등의 이야기가 정이현 특유의 경쾌한 문체 아래 펼쳐진다.
“자유의 대가로서 고독을 지불해야” 하는 그들의 삶은 기실 “‘기브 앤 테이크’의 계약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네트워크” 안의 부자유를 살아가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그들이 누리는 황량한 자유와 공허한 평화는 현실의 불가항력을 수락했을 때 주어지는 최소한의 생존양식일 뿐이다. 현실의 불가항력을 거부함으로써 주어지는 일순간의 파국 대신 그들은 고독과 체념이라는 일용할 양식을 선택한다. 그리하여 파국은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연기되고 연장된다. _박혜경, 해설 중에서
여태까지 나는 정이현을 발칙할 정도로 위악적인 작가로만 알고 있었다.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런 특성이 지닌 한계가 있기 마련인데 이번 작품에서는 그의 다른 면, 따뜻하고 깊이 있는 시선을 보여줌으로써 앞으로의 다양한 가능성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_박완서
소통을 열렬히 원하면서도 이를 두려워하고 거부하는 이율배반적 모순에 갇힌 모습들을 날렵하고 경쾌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는데 그 가볍고 건조함이 표출하는 블랙유머와 고통의 감춤 혹은 드러냄은 차가운 전율을 불러일으킨다. _오정희
■ 작품 줄거리
「타인의 고독」
이혼 경력이 있는 주인공은 재혼 전문 결혼정보회사에 부모의 강요로 가입하고, 재혼 상대를 찾아 맞선을 보고 다닌다. 주인공의 전처는 주인공과의 결혼생활 때부터 키우던 개를 현재의 남자친구가 좋아하지 않는다며 주인공에게 맡기려고 한다. 주인공은 전처가 반 억지로 맡기고 간 개를 전처에게 돌려주려 새벽에 전처의 집을 찾아갔다가 전처를 옆에 태운 채 교통사고를 낸다. 그리고 둘은 암묵적 합의하에 뺑소니를 친다. 이러한 사건뒤에 주인공은 선선히 개를 맡겠다고 말한다.
(본문)
스물한 살에 만난 여자와 스물여덟 살에 결혼해서 스물아홉 살에 헤어졌다. 일곱 달을 함께 산 셈인데 주희와 나에게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우리는 ‘친하지 않은 친구’ 같은 관계로 정리되었다. 서로의 생일이나 연말 즈음에 안부 전화를 하고 한 계절에 한두 번 문자메시지를 주고받는 사이를, 아니면 다른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이혼 진행과정에서 별다른 금전적 트러블이 없었고 나누어야 할 아이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남들 눈에는 우리의 이별이 참 쉬워 보였을 수도 있겠다.
「삼풍백화점」
주인공은 취직도 하지 못하고 남자친구도 만들지 못한 채 대학 졸업을 맞는다. 그리고 삼풍백화점에 갔다가 여고시절 동창이 일하고 있는 옷가게에 우연히 들어간다. 강남에 사는 주인공은 졸업 후 인근 도서관과 삼풍백화점을 오가며 취직 준비와 시간 때우기로 세월을 보낸다. 그러는 동안 강북에 살며 삼풍백화점에서 일하는 동창과 많은 시간을 함께한다. 동창은 주인공에게 자신의 집 열쇠를 맡기고 둘은 자연스럽게 친밀해졌지만, 주인공이 일일 아르바이트로 동창을 돕다가 일어난 사소한 사건으로 인해 둘은 멀어지고 만다. 곧이어 취직도 하고 남자친구도 생긴 주인공이 삼풍백화점에 들렀다가 동창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나온 날, 삼풍백화점이 무너진다.
(본문)
그해 봄 나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비교적 온화한 중도우파의 부모, 슈퍼 싱글 사이즈의 깨끗한 침대, 반투명한 초록색 모토롤라 호출기와 네 개의 핸드백. 주말 저녁에는 증권회사 신입 사원인 남자친구와, 실제로 그런 책이 존재하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모범적 이성교제를 위한 데이트 매뉴얼’에 나오는 방식대로 데이트했다. 성실하고 지루한 데이트였다. 노력하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될 수 있으리라 믿었으므로 당연히,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았다.
「어금니」
주인공은 마흔아홉번째 생일날, 아들의 교통사고 소식을 듣고 병원을 찾아간다. 대학생인 아들은 옆자리에 미성년자인 여학생을 태우고 달리다가 교통사고를 내고 여학생은 즉사한다. 주인공의 남편은 아들이 과음한 상태로 음주운전 중이었다는 사실을 알고서 죽은 여학생의 할머니와 합의를 하는 등 아들을 보호하기 위한 처방들을 한다. 주인공 또한 아들이 그 여학생에게 돈을 주고 성관계를 가지려고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본문)
1990년생. 만 열여섯. 죽은 소녀의 이름은 남보라라고 했다. 참 예쁜 이름이네. 그렇게 생각하다 말고, 나는 가느다랗게 진저리쳤다. 남편이 무슨 말인가를 더 하려다가 멈추었다. 눅눅한 침묵 속에 흔들리며 우리는 때늦은 밥을 먹었다. 마흔아홉번째 생일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남보라의 소지품에서는 경상남도 M시 소재의 여자중학교 학생증이 나왔다. 작년 것이었다. 주민등록증은 없다고 했다. 아직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지 못하는 나이인 것인가.
「오늘의 거짓말」
1979년 7월 7일생인 주인공은 인터넷쇼핑몰에 상품 사용 후기를 올리는 아르바이트를 한다. 아파트에 살고 있는 주인공은 어느 날 위층에서 들려오는 소음 때문에 한 집을 방문하게 되고 그곳에 박정희 대통령과 꼭 닮은 노인이 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주인공은 이러한 사실을 남자친구에게 말해보지만 핀잔만 듣고 혼자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그 집을 다시 방문한다. 자신이 인터넷쇼핑몰에 아주 조용하다고 상품 사용 후기를 올린 러닝머신이 놓여 있는 것을 본다. 그리고 노인이 박 대통령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암시를 담은 대화를 나눈 후 집을 나온다.
(본문)
벨을 힘껏 누르고 한참을 기다려보았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어. 다시 한 번 누르려는 찰나 스륵 문이 열렸지. 누군가 얼굴을 내밀었어. 덩치가 작고 깡마른 남자였지. 얼굴 절반을 가린 새까만 선글라스가 맨 먼저 내 눈에 들어왔어. 한밤에, 실내에서 선글라스라니. 갑자기 덜컥 겁이 나더라.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어. 다행히도 그는 팔을 직각으로 들어 선글라스를 벗었지. 꽤 절도 있는 동작이었어. 그는 노인이었어. 몇 살인지 짐작하기는 어려웠지.
「그 남자의 리허설」
유년 시절, 재능 있는 보이소프라노로서 화려한 삶을 살았던 주인공은 현재 지방의 한 합창단의 단원이다. 재력 있는 아내와 사는 덕에 초고층 아파트에 사는 그는 어느 날, 카드 키를 집 안에 놓고 나왔다가 삼엄한 경비체제 때문에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아내를 만나러 간다. 이 와중에 그는 지하철 역 근처에서 한 아가씨에게 돈을 빌리기도 하고 택시를 타기도 하는데 사람들은 마치 그의 몸에서 심한 악취라도 나는 듯이 행동한다. 우여곡절 끝에 아내를 만난 그는 카드 키를 받지만, 자신의 뒤를 이어 보이소프라노가 되었던 후배의 리허설 공연을 지켜본다.
(본문)
그 남자는 오페라에 매혹되었다. 이아고가 오텔로를 몰아낼 음모의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 그 남자의 오른쪽 옆 좌석에 앉았던 관객이 슬그머니 몇 칸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잔인한 신의 존재를 믿는다. 나는 사악하다. 나는 인간이니까. 1막 중반을 넘어 이아고가 악을 찬양하며 화산처럼 솟구쳐 오를 때에는 그 남자가 앉은 줄 전부와 그 앞뒷줄이 모두 텅 비었다.
그 남자는 개의치 않고 무대 위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데스데모나가 오텔로에게 사랑을 맹세하자 오텔로는, 그대는 내가 겪었던 위험으로 나를 사랑하였고 나는 그대가 보여준 연민으로 그대를 사랑하였다,라고 대답한다.
「비밀과외」
중학생인 ‘나’는 극성스런 엄마의 강요로 과외를 하게 된다. 당시에는 과외가 불법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비밀리에 과외수업을 받는다. ‘나’의 엄마는 미제물건을 불법으로 팔아 과욋돈을 벌고 아빠는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긴다. ‘나’는 명문대 법대생인 남자 과외 선생님으로부터 수업을 받고 나서 성적이 급속도로 좋아지고, 선생님을 따라 정부에 대항하는 데모가 한창인 대학 캠퍼스도 구경하며 선생님에게 친밀감을 느낀다. 그러나 엄마가 심각한 부부싸움 끝에 집을 나가고 과외 선생님도 격렬한 시위가 있었던 어느 날 이후로 ‘나’의 집을 방문하지 않는다. 며칠 후 과외 선생님이 찾아와 다 받지 못한 레슨비에 대해 얘기하고 ‘나’는 엄마가 가출했다는 말을 하지 않은 채 저금통을 털어 레슨비를 지불한다.
(본문)
마지막 전화를 걸어 엄마를 바꿔달라고 한 사람의 목소리는커녕 성별조차 거짓말인 듯 떠오르지 않았다. 네가 그 전화를 바꿔주지 않았더라면, 엄마는 아무 데도 가지 않았을까. 가지 않았을까. 너는 목젖이 알알하도록 소리쳐 묻고 싶었지만 누구에게 물어야 할지 몰라서 아무에게도 묻지 않았다.
월말고사에서 너는 사십 등을 했다. 성적표를 주면서 담임은 대놓고 혀를 찼다. 교실 앞문에 또다시 새로운 순위 표가 내걸렸다. 너는 멈춰 선 채, 대자보를 닮은 그 커다란 종이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빛의 제국」
여성 전용 소년원인 비원여자고등학교에서 2004년 장유희라는 한 소녀가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2022년 자살문화연구센터의 연구원인 주인공은 장유희의 죽음을 알아보기 위해 여러 사람을 만나 인터뷰한다. 비원여고의 책임 교도관은 나약하고 참을성이 부족한 성품 때문에 그녀가 자살에 이르렀을 거라고 판단하고 장유희의 동기는 그녀가 그곳을 용감하게 탈출한 것이라고 여긴다. 그녀의 오빠와 또 한 명의 동기를 만나면서 주인공은 장유희의 죽음의 윤곽을 조금씩 잡아간다.
(본문)
아이들은 모두 열여섯 살 이상 스무 살 미만입니다. 고등학교 학령에 해당하는 나이의 여자아이들만 살고 있지요. 아시는 대로, 소년분류심사원에서 제7호 처분을 받은 뒤에 이곳에 오게 됩니다. 초범은 보통 6호 처분을 받고, 7호는 반복해서 잘못을 저지른 경우예요. 처음부터 여기 오는 애들은, 그러니까 아무래도 좀 심한, 누굴 죽였다든지 하는.
아아, 그런 얘기는 그만두죠. 본성이 사악한 아이는 거의 없으니까요. 문제는 환경입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아이들을 지켜본 제가 내린 결론으로는 틀림없이 그렇습니다.
「위험한 독신녀」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같이 다녔으나 전혀 친했다고는 할 수 없는 동기인 양채린을 다시 만난 주인공은 그녀가 대학 때 유행하던 패션을 그대로 재현한 채 등장한 것에 놀란다. 주인공은 우연히 채린을 다시 만났으나, 서른일곱 살의 노처녀라는 현재의 삶이 버거워 여전히 소녀적의 낭만을 그대로 갖고 있는 채린을 피한다. 그러다 어느날 채린이 1991년에서 기억이 멈춰버린 채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주인공은 고등학교 때와 대학교 때의 채린과 얽힌 기억들을 되새기며 당시의 유행했던 모습으로 채린을 만나기 위해 외출준비를 한다.
(본문)
지금 테이블 맞은편에 다리를 꼬고 앉아 우동 면발을 젓가락에 말아 올리고 있는 서른여덟 살의 양채린. 예전처럼 자르르 윤기가 흐르지는 않았지만 해말간 낯빛은 여전했고, 귀염성 있게 반듯반듯한 이목구비도 그대로였다. 세월의 잔인한 흔적이 채린만을 슬쩍 비껴간 것 같았다. 아무리 예리한 눈썰미를 가진 사람이라도, 내후년에 사십 줄에 들어서는 그녀의 나이를 명확히 판단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혹시 저 시대착오적인 머리모양과 우스꽝스러운 옷차림 덕분일까? 문득 어지러웠다.
「어두워지기 전에」
맞선을 본지 반년 만에 결혼한 남편과 무난한 삶을 영위해 나가고 있는 주인공. 어느 날 주인공의 윗층 아이가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주인공은 여러 가지 정황상 자신의 남편이 범인일지 모른다는 의심을 하게 된다. 주인공의 의심이 깊어갈수록 남편은 이런 상황을 모르는 채 방황하는 모습을 보인다. 주인공은 결국 남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지만 남편은 엉뚱하게도 자신이 외도를 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진실은 오리무중 속으로 빠져버린다.
(본문)
나는 집 안의 전등을 모두 켰다. 시간을 견디기에는 역시 인터넷이 제일 좋았다. 네트워크 속을 유영하다 보면 혼자라는 기분은 곧 사라졌다. 포털 사이트 검색 창에 ‘독살’이라는 단어를 넣자, 동서양 역사 속의 무수한 독살 의심 사례들이 화면에 나타났다. 나폴레옹도, 정조도, 고종도, 스탈린도 누군가에 의해 독살당했을지 모른다는 내용의 웹 페이지들을 차근차근 읽어나갔다. 비소로, 청산으로, 전갈의 독으로 사람은 사람을 죽여왔다.
「익명의 당신에게」
주인공은 같은 병원에서 일하는 안과의사와 교제하고 있다. 그러나 남자친구는 주인공과의 관계에 전혀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아 주인공은 애가 탄다. 어느 날 병원의 항문외과에 입원 중인 한 환자가 항문의 사진촬영을 당하는 사건이 퍼지고 범인을 찾아내기 위해 일대 소란이 일어난다. 결국 범인으로 지목된 사람은 주인공의 남자친구. 주인공 역시 자신의 남자친구가 범인일 것이라는 여러 가지 심증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 주인공은 남자친구를 돕기 위한 방도를 마련한다.
(본문)
잔뜩 찌푸려진 그의 이마가 연희의 눈에 들어왔다. 연희는 자신의 남자 친구의 얼굴을 새삼 말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눈매, 콧잔등, 입술, 안경, 어디 하나 평범하지 않은 데가 없었다. 지하철 옆자리에 앉았대도, 거리에서 어깨를 스치고 지나간대도 기억에 남지 않을 인상이었다. 왜 나는 그를 사랑하는 것일까. 막막하고 불가해한 덫에 발목 잡힌 자의 도취에 젖어 연희는 자문했다. 하드 디스크 속의 파일에 대해 물어야 한다면 왠지 지금이 적기일 것 같았다.
■ 차례
타인의 고독
삼풍백화점
어금니
오늘의 거짓말
그 남자의 리허설
비밀과외
빛의 제국
위험한 독신녀
어두워지기 전에
익명의 당신에게
해설 | 당신은 파국으로부터 안전한가? 박혜경
작가의 말
재작년 가을 온라인 서점을 클릭만 하면 여기 저기 달콤한 나의 도시가 춤을 추었다. 지인의 선물로 내 품에 온 은수와 친구들은 지금쯤 잘 살고 있을까? 그 사이 그네들은 좀 더 넓은 시야로 세상을 보고 자신만의 달콤한 도시에서 새로운 집을 짓고 살고 있겠지.
그 도시에서 살고 있는 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로 쓰여진 이 가을을 들썩이게할 ‘오늘의 거짓말’이라는 책은 제목과 표지가 무척이나 의미심장하다. 입술만 동동 떠나니는게 전화기를 통해 흘러나오는 것은 진실이 아닐꺼라는 막연한 확신까지 던져준다.
정이현의 이 책은 지난해 장편소설보다 무척 밀도가 깊고 시선도 다양하다. 달콤한 나의 도시로 인해 국한된 마니아층을 형성했다면 이 소설집을 통해서는 아마도 그 폭이 무척 넓어질꺼라는 것은 나만이 가지는 느낌이 아닐것이다.10편의 단편속의 몇 편들은 내가 지나온 학창시절이 거슬러 올라오듯 많은 부분이 나의 또래와 비슷한 부분이 많았다. 어쩌면 그녀의 진짜 이력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게 되기도 한다.
서른중반을 넘어선 그녀가 만든 이야기 속에 그녀와 같은 연배의 나도 있다. 그래서 이 책에 더 빨려들었는지 모른다. 나의 10대와 책속 그녀의 10대. 나의 20대와 그의 20대. 그리고 이어지는 내가 살고 있는 30대라는 지금의 모습.더 나가 앞으로 살아가야할 그 다음 세대를 포함한 이야기가 퍼즐처럼 펼쳐진다.
실제사건을 소재로 삼은 삼풍백화점과 드러내지 않았지만 거짓이 진실을 뛰어넘음을 잘 표현한 어금니,진실이지만 무기력하게 거짓이 되고 마는 그 남자의 리허설이 가장 기억에 남고 주목할만 하다.
삼풍백화점 – 그저 순탄하게 살아왔다고 말하는 나는 삼풍백화점에서 직원으로 있는 R을 다시 만나게 되고 취업준비를 하면서 저녁시간을 R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잦아진다. 그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 시간으로 기억될지 그때는 몰랐을 나. 혼자 살고 있던 R에 대하여 아무것도 묻지 못하고 또한 알지 못한다. 취업이 되면서 어느새 점점 연락이 멀어지고 사고가 일어나던 날 내가 그곳에서 빠져나오나 마자 백화점은 붕괴된다. 붕괴사건은 금새 잊혀지고 만다. 거짓말처럼. 그곳을 지키고 있는 아파트만이 그 땅을 기억할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억은 희미해지고 있다. 부의 상징으로만 여겨지는 강남의 어느 곳에는 화려함에 밀려 살고 있는 무채색의 삶들도 많다. 그 무채색과의 조화에 힘입어 우리는 화려해지고 있음을 가끔 잊고 산다. 정이현이 정말 썼을까? 싶은 느낌이 자꾸 드는 단편이다.
어금니 – 49번째의 생일을 맞는 중년여인에게 닥친 아들의 모습은 이미 썩어질대로 썩어버린 그래서 발치를 해아함이 분명한 어금니과 같다. 모범적이라 여긴 아니 그렇게 믿은 아들은 채팅을 통해 미성년자와 원조교제를 하게 되고 그 과정에 인사사고를 낸다. 아무렇치 않은 듯 교통사고 병실에 누워있는 아들과 그 사실을 알면서도 말하지 못하는 나. 재력으로 사건을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남편. 셋은 모두 거짓말쟁이가 되고 만다.
그 남자의 리허설 – 시립합창단원인 남자에게도 총망받는 어린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성악을 전공한 남자일 뿐이다. 그에 반해 아내는 뛰어난 연출기획자이며 재력이 든든한 집안을 두었다. 초고속 초고층의 무슨 무슨 아파트는 보안이 철저한다. 남자는 아파트를 나올때 경비의 극진한 인사를 받는다.그러나 남자가 지갑을 놓고 나온 사실을 확인하며 다시 경비앞에 섰을때는 남자는 외부인이며 불청객이 되고 만다. 결국 남자는 키를 받으러 아내에게 가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남자는 구차하면서 쓸모없어 보이는 자신없는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는 듯 현기증을 느낀다.자신에게 악취가 나는 듯하고 모멸감을 느낀다. 남자가 느끼는 내면의 감정변이와 남자를 둘러싼 시선처리가 무척 잘 쓰여졌다.
나머지 7편의 소설도 무척이나 구성력이 좋다. 이혼한 부부가 기르던 강아지를 놓고 시작된 갈등이 교통사고의 공범으로 마무리되는 타인의 고독, 거짓된 이용후기를 작성하는 일을 하는 여자의 이야기인 오늘의 거짓말,80년대의 중학생의 시선으로 그 시대를 꼬집어 놓고 비밀과외는 특히 읽는 내내 재미있었다. 빛의 제국과 어두워지기전에 익명의 당신에게는 현재의 겉도는 대화뿐인 부부,권력라는 힘의 아래속에 빛나는 거짓말등을 통한 안감힘을 쓰는 인간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마지막으로 위험한 독신녀는 이 소설집에서 조금은 거리가 있는 이물감이 느껴진 소설이었다.
정이현은 그녀를 기다리는 독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10편의 소설속 주인공들은 모두 도시라는 배경속에 있지만 도시라는 화려나 불빛이 아니라 고층빌딩숲에서의 고독함과 외로움을 껴안고 사는 사람들이다. 누구를 만나서 술잔을 부딪히며 하루를 마감하고 싶어하고 흐트러진 모습으로 거짓이라는 옷을 벗어버리고 싶어한다. 당신의 예쁜 포장지로 포장된 거짓말이 아닌 툭 내던지는 일상의 진솔한 한 마디의 진실을 기다리는 누군가를 돌아보라고 정이현은 그녀 나름대로 귀여운 웃음을 지어내며 손가락을 가리키고 있다.
진실이라는 것은 항상 존재한다. 거짓이라는 것도 역시나 항상 존재하고 있다. 수 많은 거짓과 진실속에서 진실의 눈을 바로 찾아내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일뿐이다. 숙제라 여기면 또 어려울지 모르겠다. 반복된 학습은 때론 거짓을 진실로 여기게도 한다. 바른 눈과 바른 귀를 갖기를 소망함은 어쩜 거짓이 진실 인채 돌아가고 있는 세상에 대한 부질 없는 바람인지도 모른다.
한 번의 거짓말에 가슴을 졸이던 십대를 지났고 선의의 거짓말은 괜찮다고 눈감음으로 지나간 나의 이십대도 지나갔다. 그건 거짓말이라고 내심 알면서도 그래 한 번 만 봐준다는 마음로 사는 30대를 살고 있다. 명백한 거짓이 아닌 모호한 거짓의 경계(가끔 진위와 진심을 찾을 수 없는 경우) 를 만날때면 정말 당신의 진실이 무엇이냐고 소리쳐 묻고 싶지만 너무 큰 거짓이 드러날까 두려운 것은 나만이 겪는 갈등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