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의 길
적막 너머 세상의 소요를 바라보는 시 속에서 찾는 아름답고 치열한 꿈
문학평론가 이혜원의 새 비평집 『적막의 모험』이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왔다. 199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후, 얼마 전 에코페미니즘 평론집 『생명의 거미줄』을 출간한데 이어 이번 『적막의 모험』까지 모두 다섯 권의 저서를 펴낸 이혜원은 현재 고려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 현대시에 대한 정치한 분석과 독창적인 감상법으로 활발한 비평 활동을 해온 이혜원의 이번 『적막의 모험』 출간으로 한국 시 비평은 한층 풍요로운 성과물을 얻게 될 것이다.
현재의 문단은 일견, 문학의 혼돈과 위기에 대한 진단으로 떠들썩한 것이 사실이지만 한국 시 자체는 위축되거나 정체됨 없이 꾸준히 그 영역과 망을 넓혀가고 있다. 이혜원은 이번 비평집에서 1990년대 이후 확산되었으며 여전히 대세를 이루는 개인적 서정을 다룬 시들과 시대 변화에 대응하여 출현한 새로운 어법을 지닌 시들까지 꼼꼼하게 짚어내며 그만의 깊이 있는 통찰력과 예리한 감각으로 일구어낸 시 비평을 선보인다.
이 시대의 시가 직면하고 있는 부정의 대상은 전 시대처럼 명료하지 않다. 이혜원은 물신화나 기계화, 그리고 지리멸렬한 일상과의 싸움은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자기 자신과의 대결일 수밖에 없다며, 한없이 미약해 보이는 시가 이 싸움에서 의외로 저력을 보이는 것은 물신화의 유혹에서 비교적 자유롭기 때문일 것이라고 판단한다. 시는 물신의 권역에 놓인 적이 없기 때문에 마음껏 그것을 비판할 수 있고 기계화가 불가능한 정교한 미학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편, 거침없이 증식되는 젊은 시에 대한 선별과 평가에 대한 적극적인 비평 작업 또한 필요하다고 이혜원은 전한다(「경계의 응시」). 젊은 시의 도전정신은 우리 시의 장래를 위해 환영할 만한 현상이나 이제 양적으로 무시할 수 없이 증대된 젊은 시에서, 전복이나 혁신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생산적인 방법론을 창출하는 시들과 유행에 편승하여 의미 없는 언어 파괴에 열중하거나 매너리즘에 빠져든 시들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혜원은 이 글에서 무분별한 자아도취의 언어들이나 보편적 이해의 지평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진 고립된 언어들에 우리 시의 미래는 없다고 명쾌하게 선언한다.
개인적 체험과 사유에 충실하면서도 시대의 조류와 무관하지 않게 호흡하는 시들, 과격한 실험을 행하지는 않지만 독자적인 미학을 수립하는 시들, 목청 높여 울분을 토로하거나 재바르게 새로운 담론을 창출하기보다 묵묵히 자신의 세계를 형성해가는 시들에서 우리 시의 미래를 본다는 평론가 이혜원의 이번 비평집은 이 시대에 시가 갖는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겉은 차갑지만 속은 뜨거운” 반성의 글이다.
1부에는 총론에 해당되는 글들이 모여 있다. 급격한 시대변화에 대응하며 새로운 지평을 모색하는 시들을 주목함으로써 디지털 시대에 문자시가 갖는 존립 방식이나 역할로부터 여성시가 갖는 혁신과 전복의 지점, 물신의 시대에 시가 갖는 고유의 감성과 통찰력의 의미 등을 살펴보았다.
2부는 시인론에 해당한다. 김춘수, 황동규, 정진규, 김명인, 이성복, 오태환, 김신용, 이윤학 등 시인들의 문학적 삶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는 글들이다. 길게는 60년에서 짧아도 10여 년에 이르는 시간을 시에 바친 시인들을 통해 시업의 숙명성과 엄숙함을 확인할 수 있다.
3부는 시집 해설과 서평들을 모았다. 조용미, 조창환, 길상호, 김태형, 김기택, 류인서, 이정록, 서영처, 김사인, 박해람 등의 시집에서 한 시기 동안 시인을 사로잡았던 긴요한 문제의식이나 미학적 탐색을 살펴보았다. 침묵 속에서 삶을 발견하고, 비천함에서 성스러움에 도달하고, 차가움 속에 불꽃을 감추며, 부패를 발효로 전환시키고, 죽음을 넘어서 삶에 이르는 이 시대 시인들의 역전의 미학이 드러난다.
이 시대에 시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를 고민하면서 ‘적막의 모험’이라는 제목을 떠올렸다. 저 검은 문자에 붙들려 고군분투하는 행위가 그러하고, 외롭고 쓸쓸한 자리를 스스로 선택하고 지키는 자세가 그러하다. 시를 통해 적막 너머 세상의 소요를 관통하고 또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다. 시는 언어의 뼈와 살을 다듬는 골똘한 시간 속에서 최고의 유희와 미학으로 실현된다. 나는 목청 높여 울분을 토로하거나 재바르게 새로운 담론을 창출하는 시들보다 묵묵히 자신의 세계를 형성해가는 시들이 좋다. 겉으로는 차갑고 속은 뜨거운 시가 좋다. 시의 ‘적막한 모험’을 지켜보는 비평은 그보다 더 적막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적막 속에서 언뜻언뜻 보이는 아름답고 치열한 꿈을 발견하는 것은 항상 설레는 일이다.
_「책머리에」 중에서
책머리에
1부
디지털 시대의 문자시─이원의 시를 중심으로
경계의 응시─젊은 시의 모험
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의 길─이장욱, 이종수, 박성우의 시
페르세포네의 귀환─1980년대 이후 여성시의 주요 담론들
천(千)의 몸을 한 그녀들─여성시와 변신 모티프
시간을 포획하는 시간
소멸하는 빛을 바라보는 시선들
물신의 시대를 횡단하는 시─황학주, 이병률, 유홍준의 시
2부
무용지용(無用之用)의 시_김춘수론
시의 시간과 시간의 시_황동규론
romanticism+realism=R_정진규론
적막의 모험, 깊이의 시학_김명인론
고통의 언어, 사랑의 언어_이성복론
별빛의 높이와 감각_오태환론
성스러운 흉터_김신용론
구멍과 사리_이윤학론
3부
상처의 미학─조용미의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
물과 빛의 성소(聖所)─조창환의 『수도원 가는 길』
침묵의 집─길상호의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
차가운 불꽃─김태형의 『히말라야시다는 저의 괴로움과 마주한다』
거대한 침묵─김기택의 『소』
투시의 시학─류인서의 『그는 늘 왼쪽에 앉는다』
따뜻한 구상(具象)─이정록의 『의자』
공명(共鳴)과 공생(共生)─서영처의 『피아노악어』
발효의 시학─김사인의 『가만히 좋아하는』
싱싱한 죽음─박해람의 『낡은 침대의 배후가 되어가는 사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