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미학을 형상화하는
“웅숭깊은 메타포” 가득한 비망록
1975년 계간 『문학과지성』으로 등단한 이후 30년이 넘는 시력을 통해, 시대에 대한 관찰 그리고 삶에 대한 통찰과 반성을 일상적이고 명징한 언어로 옮기는 작업에 매진해온 김광규 시인이 아홉번째 시집 『시간의 부드러운 손』을 펴냈다. 이 시집에 실린 총 72편의 시들은 시인이 2003년 여름부터 4년 동안 발표한 작품들로, 36년간 몸담았던 교직에서 물러나 전업시인의 길로 들어선 시인의 마음자리 안팎을 두루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무엇보다 시집의 제목이 ‘시간의 부드러운 손’일 수밖에 없는 이유에 눈높이를 맞춘다면 이번 시집을 오롯이 감상하는 한 방법을 찾은 셈이 될 것이다.
흙-돌멩이-잡초-고목-따뜻한 이웃 거울
시인의 도수 높은 안경 렌즈에 포착되는 자연은 진경(珍景)보다는 진경(眞景)에, 전경(全景)보다는 진경(塵景)에 가깝다. 대단한 자연에의 압도보다 뒷산 산책로에, 정원 후미진 곳에, 거실 계단참 작은 플라스틱 화분가에 먼저 가 닿는 시인의 시선이 바로 그것이다. 소박하고 차분한 시인의 눈길은, 사물의 파편을 매만져 오래도록 그윽히 퍼지는 잔향을 담아내고, 어느덧 삶의 한 국면으로 이어지게 한다. 그저 소리이기만 했던 잔가지 부딪히는 소리, 바닥에 떨어지는 잎사귀,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 텃새와 작은 집짐승과 벌레 들의 미세한 몸짓은 시인의 눈과 입을 빌려 그제서야 그늘도 만들고 물거울도 만들어 화자의 마음을 비추게 한다. 시를 읽으면서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머릿속에 소리와 감각을 그려보게 되는 그 평범한 행위가 김광규 시 속에서는 몹시도 진솔하고도 곡진한 감동, 그 자체로 빛을 발하는 순간순간이다.
가을비 추적추적 내리고 난 뒤
땅에 떨어져 나뒹구는 후박나무 잎
누렇게 바래고 쪼그라든 잎사귀
옴폭하게 오그라진 갈잎 손바닥에
한 숟가락 빗물이 고였습니다
조그만 물거울에 비치는 세상
낙엽의 어머니 후박나무 옆에
내 얼굴과 우리 집 담벼락
구름과 해와 하늘이 비칩니다
지천으로 굴러다니는 갈잎들 적시며
땅으로 돌아가는 어쩌면 마지막
빗물이 잠시 머물러
조그만 가을 거울에
온 생애를 담고 있습니다. ―「가을 거울」 전문
자유로운 리듬과 호흡의 큰 진폭
한편 자분자분 리듬을 타고 넘나드는 김광규 시 속에서 심심찮게 발견되는 유머와 재치, 은근한 사회 비판의 목소리는, 그의 시를 그저 읽기 쉬운 일상시, 산문시라 단정지을 수 없게 만드는 핵심 요소이기도 하다. 난해한 언어·문법 실험보다는 간명하고 직설화법에 가까운 그의 시를 읽다보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리듬에 실린 시인의 나직한 목소리가 포착하는 아이러니컬하고 다양한 삶의 징후와 사태 등에 자연스럽게 고개 끄덕이게 된다.
두 달 걸려 공사가 끝났다
엄청나게 많은 새 가구와 새 집기가
새로 고친 아파트 안으로 차곡차곡 들어갔다
넓은 바깥세상 바꾸는 대신
새로 이사 온 이웃 사람은
좁은 집 안을 몽땅 뜯어고치고
안으로 들어가 (인터넷
홈쇼핑을 이용하는지) 좀처럼 얼굴을
보이지 않는다 ―「새 이웃」 부분
TV가 갑자기 꺼졌다 느닷없는
정전 때문에 오래간만에
연속극도 끊어지고 온 집안이
모처럼 캄캄하고 조용한 저녁
거북하게 코를 높인 탤런트의 인조 눈물 대신
피자 배달 오토바이가 방정맞게 달려가고
행인들 지껄이는 소리에 섞여
골목길에서 개 짖는 소리
옆집 아줌마가 퍼부어대는 악다구니
깊어가는 가을밤 귀뚜라미 노래
오동나무 잎 떨어지는 소리
참으로 오래간만에 이웃과
동네의 소식 들려왔다
[……]
소리 없는 소식들은 그러나
이십 분도 채 못 되어 끊어지고
냉장고 다시 붕붕거리며 ―「잠깐 동안 정전」 부분
세월의 미학이 보여주는 결코 가볍지 않은 성찰의 세목
평론가 우찬제씨는 김광규 시인의 시력 30년을 아우르는 시집 해설에서, 그가 “일상적 진실과 본원적 가치의 넓고도 깊은 부챗살을 예리하게 인식”해온 시인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열린 감각으로 일상적 실존의 내력을 자유로운 리듬에 실어 ‘중얼중얼’거렸다는 점, 하여 일상시라는 한국시사의 큰 광맥 하나를 형성”해온 김광규 시인은 여전히 섣부른 감정의 포즈나 수사적 몸짓을 경계한다. 그리고 생애의 마지막 순간을 향한 심원한 눈빛이 그것들을 대신한다. 여기에 자기 세대에 대한 아낌없는 변호와 안타까운 마음도 불어넣는다. 단, 그의 언어 혹은 노래가 “체념이 아닌 달관을, 미망이 아닌 성찰을, 노욕이 아닌 겸양의 미덕”을 품고 있기에 우리의 공감은 결코 작지 않다. 젊건 늙건 우리 모두는 그 무언가를 “잃어버리며 그리고 잊어버리며” 급히 돌고 도는 시간의 수레바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깨달음 말이다. 오늘, 일상의 깊은 절망에서 허우적대는 당신에게 세월의 힘에도 그 빛 지속되는 삶의 가치를 전하는 담담하고도 담박한 목소리가 찾아들었다.
오래 생각하며 천천히 쓴 편지
봉투 한구석에 정성껏 우표를 붙여서
우체통에 갖다 넣고
모레 들어갈까 글피에 들어갈까
답장을 기다리는 마음
이미 오래전에 사라져버렸어요
쉴 새 없이 문자질 하면서
갈 길 재촉하는 청소년들 붙잡고
우체통이 어디 있는지
묻기조차 힘든
저 후줄근한 어르신을 보세요 [……]
머지않아 우체통처럼 사라져버릴
저 20세기 인간을 보아두세요 ―「우체통」 부분
시간의 바퀴 피해보려고 백미러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가속페달 밟아보지만
소용없습니다 이제는 주행차선을
양보하고 천천히 갓길로
들어섰다가 인터체인지 진출로 따라
내려가야지요 어둡기 전에 ―「어둡기 전에」 부분
■ 시집 앞날개 글
시집 『시간의 부드러운 손』에는 소박하고 작고 안락하고 평화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그 세계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와는 다른 별천지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늘 부딪치며 살아가는 일상의 세계이다. 삭막하고 냉혹하고 바쁜 세상 속에 그런 고요한 세계가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지만, 시인의 눈은 우리 곁에서 그것을 발견하고 끄집어낸다. 우리는 미처 체험하지 못하고 지나친 그 따뜻한 세상을 시인의 시를 통해 비로소 다시 산다.
시인의 말
제1부 산길
춘추(春秋)
산길
달밤
게 다리 선인장
밤바다
청단풍 한 그루
산 아래 동네
담쟁이덩굴의 승리
해협을 건너서
가을 거울
마지막 잎새들
언덕 위의 이층집
팽나무
이대목의 탄생
땅거미 내릴 무렵
제2부 핸드폰 가족
핸드폰 가족
어느 금요일
비 오는 주말
우리 아파트
세발자전거
그리마와 더불어 2
강북행
소리
새 이웃
면장갑 한 켤레
잠깐 동안 정전
움직이는 성곽
알트슈타트
법인(法人)의 집
클라인하우젠 일기
제3부 비둘기들의 행방
십장생보다 오래
비둘기들의 행방
새천년
책의 용도
잃어버린 비망록
돌아오지 않는 강
든든한 여행
화산이 많은 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