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깨어 있는 시인 문충성의
결코 묻히거나 사라지지 않을 낮은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은 시작(詩作) 활동을 펼친 어언 30여 년 동안 ‘허공’을 찾아 배회하고 있었던 셈이다. 하여 시인은 소중한 시적 통찰을 얻는다. ‘허공’은 찾을 수 있되, 찾지 못한다. 찾았다고 믿는 순간, 이내 또 다른 ‘허공’이 생성될 뿐. 이것이 곧 ‘허공’의 본연적 속성인바, 이러한 ‘허공’을 찾아 자유롭게 떠난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일이다. __문학평론가 고명철
제주도의 시인으로 잘 알려진 문충성 시인의 새 시집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1977년 계간 『문학과지성』을 통해 시단에 나온 후, 다작(多作)의 시인으로 30년 동안 많은 시집을 출간한 문충성은 첫 시집 『濟州바다』를 비롯하여 이번 『백 년 동안 내리는 눈』까지 총 아홉 권의 시집을 문학과지성 시인선을 통해 내게 되었다.
첫 시집에서 이번 시집에 이르기까지 문충성 시인의 시는 일관적인 두 가지 모습을 담고 있다. 하나는 그의 시 의식의 공간적인 근원이 되는 ‘제주도’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집요하게 천착하고 있는 ‘죽음’의 이미지이다. 이러한 일관성으로 인해, 한편으로 그는 많은 작품을 발표함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문학평론가 김춘식은 문충성 시인이 이렇게 일관성을 견지하며 많은 작품을 쓰고 있는 것에 대해 “어떤 점에서는 그 자체가 그의 ‘의지’와 삶에 대한 ‘연민’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행위”라고 보면서, “정말로 첫 시집이 ‘운명의 그림자’와 같다면 그는 첫 시집에서 보여준 그 그림자로부터 잠시도 벗어나본 적이 없는 그야말로 자신의 ‘진정성’에 충실한 시인”이라고 평한 바 있다.
문충성 시인은 제주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대학 시절과 군대 기간을 빼고도 50여 년을 넘게 그곳에서 살아왔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인식 속에 제주도는 아름다운 천혜의 자연으로 손꼽히는 관광 명소지만, 삶의 터전으로서의 제주도는 시인에게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2003년 발간된 시 선집 『그때 제주 바람』의 「나의 시를 말한다」에서, 시인은 제주도가 자신에게 “가난과 굴욕과 나아가 치욕”을 주었다고 고백한다. 하여 그가 쓴 제주도와 관련된 시는 “이 ‘가난과 굴욕’을 해소하고자 하는 꿈꾸기”로 보여진다. 그에게 있어 ‘제주 바다’는 역사적으로 “몽고거나 일제거나 조선 왕조 탐관오리들의 탄압과 폭정에 신음해온 토착민들의 피비린내 나는 삶과 죽음의 바다요, 가깝게는 4? 사태 이후 이데올로기의 싸움에서 빚어진 삶과 죽음의 바다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개인적·역사적·사회적 상황들이” 문충성 시인이 써온 제주도와 관련된 시들의 모티프가 되어왔다.
이번 시집의 앞날개에 씌어진 소개 글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백 년 동안 내리는 눈』은 현실과 공모하거나 그것에 섞여들기는 거부하는 자의 안타까운 노래이다.” 여기서 시인이 인식하는 현실은 “썩어 있고 욕심 많고 무반성적인” 부정적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것은 제주도라는 공간에 사는 시인의 눈으로, 혹은 세상의 이치를 이해하는 이순을 훌쩍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더 많은 한 인간의 눈으로 본 현실이 바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상처를 간직한 섬, 제주. 그러나 세상은 그것을 드러내고 치유하기는커녕 그저 묻어둔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제주에만 국한되어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과거의 과오와 현재의 문제들을 그저 덮어두는 현실은 썩고 죽어가기 마련인 것이다.
그 가운데에 “늘 깨어 있”는 시인, 문충성이 있다. 독자들은 이 시집을 통해 “백 년 동안 내리는 눈” 속에서도 결코 묻혀 사라지지 않을 시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시집의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고명철은 “우리 사회에서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역사의 파행과 구조악(構造惡), 그리고 숱한 행태악(行態惡)이 망각의 유혹에 빠져 있는 엄연한 현실을, 시인은 신랄히 풍자한다”고 이 시집의 성격을 밝히면서, “일체의 부정한 것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는” 문충성 시인의 “미적 윤리 감각”을 짚어내고 있다.
고명철은 또한 이번 시집을 시인 문충성의 자유로운 도정으로 보고, 이 도정을 “‘허깨비’로부터 벗어나 망실하고 있던 ‘도채비’를 진심으로 만나러 가는 길”로 파악한다.
여기서 ‘허깨비’는 아직까지도 시인을 따라다니는 두려움으로, “시인의 무의식 한편에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1980년대 신군부의 폭압과 연루된 두려움”이라는 것이 그의 해석이다. 또한 현실의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그런 ‘허깨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시인은 “허깨비가 설쳐 다닌다”고 단언한다”며, “시는 넘쳐나되, ‘허깨비’ 소리의 실체를 듣지 못하는 시들이 시집을 채우고, 그 시집들이 도서관을 소리 없이 잠식해 들어간다는 데 대”한 시인의 우려에 대해서도 밝히고 있다.
반면 “‘도채비’는 제주 태생인 시인의 아름다운 유년 시절의 풍경 속에 오롯이 존재하는 대상”으로, “근대적 도시 문명에서는 좀처럼 만날 수 없어 인간과 자연의 길을 소통해주는 역할을 맡는 비의적(秘義的) 존재”이다. 역시 같은 제주도 태생인 고명철은 여기에 “제주인들은 ‘도채비’를 두려워하되, 마냥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간주하지 않았”으며, “제주의 어린애들은 어른들로부터 ‘도채비’와 관련된 구전 설화를 들으며 삶의 경건성을 체득하기도 하고, ‘도채비’ 놀이를 하며 자연과 인간의 친연성이 몸에 배기도 하였다”고 설명을 덧붙인다.
하지만 냉혹한 현실 속에서 ‘도채비’는 유년 시절의 기억일 뿐, 되돌릴 수 없는 현실의 한계에 시인은 부딪히고 만다. 물신화가 횡행하는 현실은 그야말로 허깨비에게 저당 잡힌 죽은 삶, “살아 있는 묘지”와도 같은 세상인 것이다. 그 속에서 시인은 비움의 시적 통찰의 길로 독자를 안내한다.
시인이 욕심을 비롯한 부정한 모든 것을 버리고자 하는 공간은 다름 아닌 허공이다. 바로 그 허공을 향한 시인의 도정이 이번 시집에 오롯이 드러나 있는 것이다.
시인의 성인 시절에 횡행한 ‘허깨비’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유년 시절 그토록 보고 싶어한 ‘도채비’를 만나는 길을 갈 채비를 하고 있다. 그것은 죽음을 자연스럽게 맞이하는 길이되, 또 다른 삶의 길을 떠나는 채비가 아닐까. “의혹과 반란의 허무 다 내버리고/죽음이 걸려올 때까지/한 뼘 남은 목숨”을 정갈히 갈무리하는 삶의 길을 채비하는 것 말이다. ─해설 「‘도채비’를 만나는 허공으로의 도정」에서
■ 작품 속으로
사금파리 속 도채비 나라엔 도채비들이 살고
그 도채비 나라엔 내 유년이 살고
제삿날 심부름하다 깬 유리그릇
이튿날
내다 버리면 겁에 질려
도채비 나라에 갔네
마을 쓰레기들 쌓아놓은 그 위로
깨진 유리그릇 내던지고
걸음아, 날 살려라!
단숨에 집까지 달려왔네
때로 도채비 놀이하며
달 진 밤 신나게 놀았네
길가에서 동네 아이들과
개똥벌레 잡으며
도채비 이야기하며
이웃 동네 어떤 할아버지
도채비에게 홀려
죽을 뻔하다 살아났다고
결국 죽었지만 도채비 만나면
돌멩이 주어 돌가루 만들라고
돌가루 뿌리면 도채비는꼼짝 못한다고
겁났지만 몹시 궁금했네
어떻게 도채비 나라에 갈 수 없을까
어두운 밤 마을 쓰레기장엘 찾아가고
사금파리 속 도채비 나라 기웃거리다
할아버지에게 들켜 욕만 먹었네
너 이 녀석, 도채비 될래! 그러나
한 번도 만나지 못했네, 도채비여! 도채비여!
어디 있니? 너도 영어 모자라 이민 갔니?
미국으로, 아니면 호주로? 나의 유년도?
사금파리 속 도채비 나라엔 도채비들이 살고
그 도채비 나라엔 나의 유년이 살고 ─「사금파리 속 도채비 나라엔」 전문
밤이 아닌데도 유령들
묘지에서 걸어나온다 어정어정
돈 벌러
돈 쓰러
부지런히
자가용 몰고
버스 타고 구조조정
전철 타고 데모하며
몰상식한 택시 타고
자전거 등에 앉아 비틀비틀
걸어서 간다 유령들이
사는 묘지엔
새가 날지 못하지만
꽃도 짖지 않지만
컴퓨터들 꽃피어난다
유행가들 흘러다닌다
국산 개들도 제법
외국어로 노래 부른다
전깃불 환한 길들이
묘지로 걸어간다 뒤뚱뒤뚱
병든 개 기어가듯 ─「살아 있는 묘지에서」 전문
동으로 가면 동으로 간다
서로 가면 서로 간다
허깨비 하나가
오공 때부턴가
따라다닌다 졸졸
거짓을 할 수 없다
세상은 점점 추워들고
덜덜 떨면서 하루를 살고
점점 자그마해진다 졸졸
허깨비 하나가
색안경 쓴 정보원처럼
감시한다 제발
따라다니지 말라고 빌고
애원도 하지만 어림없다
더 가까이 다가와
말없이 따라다닌다 졸졸
밥 먹으면 그도 밥 먹는다
잠자면 그도 잠잔다
책 읽으면 그도 책 읽는다
노래할 때 그도 노래한다
모르는 척 곁눈질하면
그도 모르는 척 곁눈질한다 점점
자그마해진다 세상은
추워들고
친구들에게 물어봤다 바보같이
친구들은 말한다 단호하게
민주화 시대에 허깨비라니!
그러니 시가 필요한 시대 그러나
필요한 시는 없고
시가 필요한 녀석도 없어
필요 없는 시만 시집 가득
도서관 한편 그득 넘쳐날 뿐
허깨비가 설쳐 다닌다
세종대왕 그려진 한 장짜리
자그만 책 몇 권 우리는
가죽 지갑 속에 당당하게
구겨 넣고 다닌다 돈 세상을
마침내
카드 한 장
두 장 넣고
다닌다 그 속에 길이 있어 ─「허깨비 하나가」 전문
목소리 가다듬으며
눈 내린다 백 년 동안
동학교도들
눈 내리는 풍경 속에
있다 나는
백 년 동안
잠자는 왕자 아니다
깨어나지 않는다
아니다, 늘 깨어 있다
아름다운 전설
몹쓸 바람에 휘말려
지상에서 사라져가는
날
쓸쓸하다
백 년 동안
눈 내리는 풍경 속 ─「백 년 동안 내리는 눈」 전문
■ 시집 소개
시집 『백 년 동안 내리는 눈』은 현실과 공모하거나 그것에 섞여들기를 거부하는 자의 안타까운 노래이다. 그는 늘 새나 꽃이기를 바라지만 가난한 꿈속에서만 그러할 뿐, 여전히 썩어 있고 욕심 많고 무반성적인 현실에 담겨 있다. 그가 현실과 마찰할 때마다 그는 지지 않고 그 반동의 열기로 고달프고 지저분한 현실의 세목을 조목조목 지적한다. 그것이 한낱 도로에 그치더라도 오래 살아온 자의 힘이, 죽음에 가까워진, 즉 자연에 한층 가까워진 자의 대범함과 희망이 그를 한사코 현실과 불화하게 한다.
■ 시인이 쓰는 산문(뒤표지 글)
그대는 실패하지 않았네
죽음으로 완성했네 사나이
새 천지 열지 못했다지만
아니다, 항우여, 당신은
새 천지 열었네
중국보다 더 큰 천지를
처음이자 마지막을 나는
열아홉에 시작 했네
십 년을 애써도 사랑은
완성되지 않았네
사랑이란 완성하는 게 아니란 걸
칠순을 보며 겨우
깨닫느니 너무
늦었을까 나는
실패한 삶의 절정에
홀로
서
서
꿈꾸네
열아홉에 ‘사랑’을 발견한 나는
시인이 되고자 안 했네
이제 나는
열아홉으로 가네
그때
나의 마지막은 시작되었으니
녹슨 내 귀는
올챙이의 꿈
눈물 속을 빠져나오자
母音
夢遊
上京
종로1가 혹은 광화문 근처
괭이밥 宴歌
空空
녹나무 그늘
여름 소나기
사금파리 속 도채비 나라엔
겨울 강가에서
醉遊
쐐기풀
봄눈
巡禮
전생
이 겨울에 우리가 산다는 것은
낮은 목소리로
더 낮은 목소리로
가장 낮은 목소리로
메밀묵을 먹으며
저녁의 노래
카드 한 장으로
飛翔
살아 있는 묘지에서
눈꽃
그런데
신영의 방에 누우면
반달처럼
침팬지 한 마리가
허깨비 하나가
백 년 동안 내리는 눈
빗소리
빗소리2
대전을 지나며
부엉이
떠나야 할 길이
낮잠 자는 할머니
밤바다에서
숟가락에 대하여
廢船의 낡은 꿈
鳥裝 이후
계백 장군의 무덤
단재 신채호
속리산 법주사
사람이 하늘이니
문 앞에서
종이학을 접으며
지리산 천왕봉에서
건망증
자본주의
빈 거미집에 대한 빈 단상
저승에 가면
나도 나비넥타이를 맬까
소리왓에서
똑같은 꿈나라
수첩
실어증
목숨
密談
철물점에서
부재 증명
虛裝集
餘命
곤륜산 근처에 묻고 온 나의 꿈
하늘은 원래 환상이므로
마지막으로
새가된 소년들은 하늘을 날아다니고
해설·’도채비’를 만나는 허공으로의 도정·고명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