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관심한 듯한 묘사가 불러일으키는 ‘이상하고 환한’ 이끌림
‘2002년 제1회 『문학과사회』 시 부문 신인 문학상을 수상’하며 시단에 첫발을 내디딘 하재연 씨가 첫 시집 『라디오 데이즈』를 펴냈다. 시인이 햇수로 5년여 동안 써온 시편 중에 총 쉰여섯 편을 가려 뽑은 이번 시집은, “내가 본 것을 믿지 않는다”라는 시인의 고백 혹은 제언이 사물 그리고 시간과 맞닥뜨렸을 때 생겨나는 낯선 이미지들에 주목하고 거기서 이상하리만치 묘한 조화로 재구성되는 프레임들을 보여준다. 그 속에는 시인이 2005년 한 해 동안 미국 버지니아에 머물면서 읽어낸 풍경의 흔적도 담겨 있다. (미리 밝혀두건대 시집의 제목만을 두고, 라디오세대 혹은 아날로그 세대에 대한 향수나 그리움의 흔적을 짐작하는 일은 섣부르다.)
우선 하재연 시의 시작(始作)은 소재나 형태 면에서 ‘구름, 벤치, 공원, 햇살이 내려앉은 창문, 티브이 화면, 골목 어귀 만화가게, 나른한 오후, 허름한 동네 철대문집’ 등 우리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시공간을 매개로 독자에게 쉬운 접근을 허용한다. 그 가운데 하재연은 시간의 ‘흐름’과 불확실한 ‘기억’에 대한 의구심에 적잖은 지면을 할애한다.
어려운 건 결심의 문제다 저 구름은 오 분간 한자리에 머물러 있기로 한 모양이다 오 분 후 구름은 쉬지 않고 내내 자세를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보고 있는 오 분간이다 ―「오 분간」 中
내 옆구리에는 몇백만 년 전 누군가 뱉어놓은 무화과 씨앗이 걸려 있는지도 모른다 올이 고운 먼지들이 손으로 짠 담요처럼 나는 덮는다 언제부턴가 나를 지나간 지상의 숨결들 내리쬐던 환한 빛을 기억하려 할 때마다 옆구리가 아파왔다
고요한 한낮을 기억할 수 없이 오랜 동안 건너왔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의 틈새에 몸을 열어두는 일 그리고 낮과 밤의 기나긴 운행 뚫린 하늘로부터 내려앉는 살비듬들, 천장이 아득해진다 ―「오래된 침대」 中
‘여러 개의 색깔로 물드는 그림자’ ‘어둠 속으로 굴러가는 자전거 바퀴’ ‘짧게 흔들리는 공기’(이상 「휘파람」) ‘노인이 노인을 잉태하고/아이가 아이를 잉태’(「아이들은 자란다」)하는, 정지해 있는 듯 보이지만 끊임없이 움직이는 사물과 현상 그리고 삶의 단면에 무관심함으로 포장한 기실 탐구적인 내밀한 시선은 하재연 시의 한 국면이다. 목소리의 고저가 최대한 절제된, 건조하면서도 평이한 시어의 연결이 간결한 행과 연을 이루는 것도 이에 한몫한다.
그녀는 책장을 넘기고 있었고
남자가 문 열린 차를 타고 벼랑으로 내달았고
고양이가 식탁 위의 커피잔을 건드렸고
양탄자가 약간 들썩거렸고
고장난 시계 초침이 열두 번을 돌았고
소년은 마라톤 결승 테이프를 끊었고
그녀는 행운을 빌었으나
양손이 쪼글쪼글해지고
머리칼이 가늘어지고
커피는 쏟아졌고 양탄자는 젖지 않았고
남자가 녹색 지붕 아래 비행하는 순간 ―「동시에」 전문
하재연의 시는, 2000년대 이후 등단해서 흔히 미래파 혹은 환상파로 주목받는 동세대 젊은 시인들의 시에 드러난 난해하고 전복적인 상상력과도 그 형태와 현상 모두에서 궤를 달리 한다. 그런데 다음에 이어지는 ‘하다 만 듯한’ 비유와 묘사는 일상적이고 익숙한 것, 전통적인 서정의 문법에서 살짝 비껴나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시집 곳곳에서 돌출되는 ‘상관없이’ ‘무관하게’라는 일상적인 어휘가 길지 않은 시 한 편 한 편의 시공간적 구성을 일거에 뒤흔들어버리는 순간이 은연중에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편 하재연의 시적 화자는 시종일관 ‘그 옆을 지나는’ ‘그 안을 들여다보는’ ‘지금 기억하지 못하는’(이상 「일요일의 골동품 가게」) 사람으로 묘사되면서 사물과 시적 화자, 혹은 시와 독자 사이에 일정한 거리감을 획득하고, 결국엔 우리로 하여금 오래된 익숙함을 낯설게 받아들이게 하는 역할을 한다.
내 눈동자는 나의 것
눈썹을 깜박이는 것도 나의 의지입니다
고개를 돌려 당신을 바라보는 것도 나의 의지
내 손은 나의 것
[…]
나의 말은 나에게서 나와
당신에게로 흘러들어갑니다
당신이 나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면
그것은 내 뜻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
나의 의지는 나만의 것이지만, ―「나만의 인생」 中
시인의 “검은 동자는 창문이 되고” “모든 빛을 잘 받아들여”(이상 「공생기」) 종국엔 “투명해진 눈동자”(「거품」)에 비친 세상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그의 속내를 순순히 내어놓는 대신 끝없이 자신의 시선을 의심한다. 그리고 눈앞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쉼 없이 ‘무엇이었을까’ 혹은 ‘무엇인가요’라고 되묻는다. 손지문과 먼지가 대신한 시간의 더께를 고밀도 전자현미경 같은 관찰자의 시선(視線)으로 거둬 보이는 하재연의 시들은, 농담처럼 가벼운 듯하지만 결코 평범하지는 않다(「스텔라 미장원」). 하여 어깨에서 힘을 빼고 휙, 휘파람을 내불면서 펼쳐 읽고 싶은 이 계절의 시집으로 이 젊은 시인의 신선한 시선(詩選)을 강력히 추천한다.
▣ 2002년 제1회 『문학과사회』 신인 문학상 당선 소감 中
나는 내가 본 것을 믿지 않는다. 사물에 대해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실은 믿지 않는다. 골목들은 많거나 비슷해서 우체국이나 전철역, 약국들을 찾다가 가끔 길을 잃는다. 골목과 골목은 모두 통하는 듯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대개 막혀 있다. 나는 내려오는 차단기 앞에서 기차 소리를 듣게 되고, 우체국 주변을 돌다가 포장마차에 서서 오뎅 꼬치를 빼먹으며, 보도블록 위에서 두통을 잊어버리기도 한다. 그러니 이 불확실한 기억과 시력에 대해 감사해야 할 것이다.
▣ 2002년 제1회 『문학과사회』 신인 문학상 당선작품 해설(『문학과사회』 편집동인), 「사물의 불확실성과 흔적의 상상력」 中
하재연의 시적 자아는 사물에 대해 무관심한 듯이 보인다. 그의 시들은 사물에 ‘나’의 감정이나 관념을 부과하는 시가 아니다. […] 하재연의 시는 사물에 대한 ‘나’의 인간적 관심을 드러내지 않는다. 아주 담담하고 투명하게 그 사물의 존재성을 ‘본다.’ […] 이와 같은 시선의 중심 이동은 한국 서정시의 주류 문법과는 변별되는 지점에서의 한 신인의 미학적 출발을 알리고 있다. […] 눅눅한 감정의 누설과 계몽적인 화법이 시의 미덕이 되던 시를 우리는 이미 통과했다. 시를 감상과 잠언의 양식이 아니라 존재성에 대한 질문의 방식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문제적이다. 그의 시는 기본적인 ‘견자’의 시이며, 그 ‘견자’는 사물에 대한 내적 관찰을 통해 그 존재감을 언어화하고자 한다. 그의 시가 상투성의 자리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그 흔적에 대한 투시력의 힘 때문이다.
▣ 앞날개 시집 소개글
시집 『라디오 데이즈』는 향기처럼 휘발하는 감각들에 대한 재빠른 스케치다. 시인과 부닥치고 스쳐지나는, 또는 시인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서는 끊임없이 느낌들이 탄생한다. 색깔과 감촉, 냄새 등 대상과 접촉하는 시인의 감각에 의해 생겨나는 이 즉흥적인 느낌은 미처 그 정체를 알아채기도 전에 공중으로 휘발하고 만다. 그러나 그러한 느낌을 시인은 언어와 언어의 부딪힘, 문장과 문장의 얽힘, 행과 행의 연속과 단절을 통해 재탄생시킨다. 이렇게 시 안에 들어 있어서 우리가 읽을 때마다 돋아나는 그 감각과 느낌은 오로지 감각의 세계 그 자신의 것이다. 이 시집은 향기를 가둔 향수병처럼 우리에게로 온다.
▣ 시인의 말
너는 안녕이라고 말하고,
나는 안녕하냐고 말하지.
비틀스의 노래가 생각났다.
언제부터 알고 있던 음악일까? 2006년 초겨울 하재연
▣ 시인의 산문(뒤표지글)
먼 나라를 찾아가다 귀찮아진 계절들이 거기 머물렀다. 지구 어느 편에 있는지 잘 모르는 나라들의 길고 뜨거운 이름들이 좋았다. 뾰족하고 높은 성을 탈출하던 소녀의 파란 머리카락이 떠오른다. 창밖으로 치렁하게 늘어뜨려진 머리카락, 그건 소녀나 마귀할멈과는 상관없이 살아 움직이며 빛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난 정말로 그 그림을 보았던 걸까. 두고 온 눈동자를 찾으러 돌아가면 먼지를 묻히고 굴러다니던 속눈썹이 반짝, 눈을 떴다가는 책꽂이 사이로 숨어버렸다. 눈 속에 무릎까지 소복소복 파묻히며 책장이 넘어갔다. 창틀이 정말로 여러 개였다. 한 개의 창문으로 뜨거운 햇볕이 내리쬘 때 다른 세 개의 창문에서는 별이 떴다. 그곳을 눈 내리는 만화가게라고 부른다.
주석 달지 못한 여러 개의 이름들, 내 시에 섞여 들어와 찰흙처럼 몸을 만들어주었다. 이름 따위는 상관없이 내 살이 그 살들과 섞여 기분 좋게 물렁물렁해지기를 바란다. 처음과 끝이 어디부터 어디쯤인지, 새로 시작된 건 언제인지 기억한다면 많은 것들이 지금보다 훨씬 어려웠을 것이다. 여권과 비자 없이 국경을 넘어 불법 체류자가 되지 않는 나라, 도시, 마을에 대한 글이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상상이 현실에서는 시적이고 정치적인 메타포가 된다. 이 상상과 정치 사이, 또는 그걸 넘어 내가 가고 싶은 나라의 이름을 언제쯤인가는 써볼 수 있을까.
▣ 이광호, 시집 해설 「초연성의 시 쓰기」 中
하재연은 ‘순간과 압축성’이라는 서정시의 미적 자질을 재전유하여 그것의 세계관을 내파한다. […] 서정적 감동과 파토스적인 감동을 모두 비껴가는 시적 화자의 초연한 시선은 그 시선의 주체성을 비워버린다.
제1부 우리들은 물고기처럼
휘파람
천국의 계단
동시에
나비 효과
팔월의 일요일들
일요일의 골동품 가게
거품
장미 덩굴처럼
사계절의 상인
향수
오 분간
네 얼굴은 불빛 아래
오래된 침대
한여름의 스노볼
아마도 내일은
제2부 이상하고 환한 요일
아이들은 자란다
구름의 식탁
복도의 아이
할머니의 침대
라디오 데이즈
Snow White
내 꿈은 학교
나는 얼굴이 검은 아이
내 사랑 변전소
스텔라 미장원
이동
봄의 교향악
공생기
제3부 안녕, 안녕
나만의 인생
서커스
스파이더맨
우리는 만난다
눈뜨는 영혼
피의 책
그대는 마네
여름의 달력
의자
토요일은 밤이 좋아
간선 도로
우리들의 일요일
문들
봄날의 인사
제4부 여기는 나일, 여기는 고베, 여기는 이름 모를
지상의 저녁식사
머나먼 북쪽
드림 캐처
아름다운 날들
음악들
에코
빵의 황제
열한 개의 창문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흑백 영화
고속도로 위에서
미드나잇 트레인
흐르는 강물처럼
나는 자전거를 타고
해설 | 초연성(超然性)의 시 쓰기·이광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