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말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325

장영수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06년 10월 20일 | ISBN 9788932017327

사양 신46판 176x248mm · 120쪽 | 가격 6,000원

책소개

모든 것이 말한다, 나는 단지 들을 뿐이다.
장영수 시인의 다섯번째 시집 『그가 말했다』

올해로 등단 33년째를 맞는 시인 장영수의 새 시집 『그가 말했다』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1973년 계간 『문학과지성』 봄호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한 이래 그동안 『메이비』(1977), 『시간은 이미 더 높은 곳에서』(1983), 『나비 같은, 아니아니, 빛 같은』(1987), 『한없는 밑바닥에서』(2000), 『그가 말했다』(2006) 등 총 다섯 권의 시집을 상자한 장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더욱 간소해진 시선으로 삶의 표정들을 단순화시킨다. 대략 5~6년에 한 권 꼴로 시집을 내온 장 시인은 원래도 다작하는 시인은 아니었지만 특히 이번 시집 『그가 말했다』는 이전보다 더한 심혈과 숙고를 기울여 씌어진 시편들로 채워 넣었다.

1977년에 펴낸 첫 시집 『메이비』의 자서에서 시인이 밝히고 있듯 ‘우리에게 유익한 성실이나 재능이란 정확히 보고 바로 믿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꾸준히 믿고 실천해오고 있다. 오히려 그러한 믿음을 더욱 구체적으로 형상화시키기 위하여 ‘~가 말했다’ 식의 표현기법으로 시집 전체를 채워놓았다. 각각의 사물들은 각자의 세계 속에서 각자를 둘러싼 삶을 각자가 가진 고유한 시선으로 ‘보고 바로 믿는다.’ 이를테면 한려수도의 유람선에 탄 ‘나’는 ‘유람선’이 보는 객관적 상관물의 위치로 떨어지며 ‘유람선’이 보고 믿은 바대로 규정지어진다.

벚꽃 만발한 사월이라는 것이 왠지 조금은
언짢지만 평소와 다름없이 나, 유람선은
부두를 떠나간다 울긋불긋 승객들을 싣고서

나, 유람선은 뱃길 따라 남해바다를 가른다
일단의 여유 한가로움에 잠긴 이들 혹은
멀리서 온 듯도 싶은 이들을 흔들어주면서

나, 유람선 주변 물거품들은 쉴 새 없이
포말 지는데 갑판의 어떤 사람들은 술들을
마신다 혹은 풍경들을 카메라에 담는다

안내양이 음악을 틀면 아래층 공연장에선
승객들이 몸들을 부딪쳐가며 춤들을 춘다
다리가 다 풀릴 때까지라도 저러는 건 지금

여기가 동네나 집 아닌 나, 유람선의 품속인
때문인가 사실은 거기가 도로 거길 텐데
착각들이 때때로 아름답고 안쓰럽다

여하튼 누구든지 좀더 먼 바다로 나가보고
싶어지는 어느 날이 있어 오늘 마침 그대는
오래된 뱃길 어디쯤에 있었다 그렇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 뱃길은 영원한 성지였다
그렇다고 옛 충무공님 때문에 새삼 눈시울
적시진 않아도 물론 괜찮다

어쨌든 그대는 오늘 나, 유람선의 갑판
어느 모퉁이에 있었다 그대 생명의 원천이
애초에 아주 작은 물 조각 하나였던 것처럼

그대는 오늘따라 옛날의 그 하나의 물 조각이
된 것처럼 망망한 바다 위에 있었다 현실감각 쪽
도금이 조금은 벗겨진 모습으로 있었다
─「한려수도의 유람선이 말했다」

장 시인이 이전 시집들에서 담담하고 유연한 어조로 진술한 불행한 타인들의 삶은 이번 시집에서도 여전히 시인을 옭아매고 놔주지 않는다. 그리하여 시인은 그 담담하고 유연한 어조들을 ‘~가 말했다’ 속에 욱여넣음으로써 자신의 시세계를 더욱 공고히 한다. 문학평론가 오생근의 지적대로 장 시인은 ‘우리 속에서 나의 개인적 고통과 좌절은 사라지거나, 아니면 적어도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고, 타인의 불행은 바로 나의 불행으로 동화’된다고 믿고 있으며, 여기서 ‘우리’가 나를 둘러싼 모든 사물들을 포함한 그야말로 ‘우주’로 달리 불릴 수 있는 광의의 의미를 갖는다고 할 때, 이번 시집의 ‘~가 말했다’ 시편들은 그의 시관(詩觀)이 다다를 수 있는 어떤 정점을 보여주는 듯하다.

장영수의 이번 시집은 총체성을 향한 진정한 깨침과 일상성을 수락하는 평상심, 사회적 종교적 각성과 몰락의 정신, 수직성과 수평성, 상승과 하강 사이의 간격이 맞부딪히면서 불꽃을 일으킨다. 앞서 언급한 순간의 각성과 지속의 성찰 사이의 간격은 이러한 여러 겹의 간격과 충돌을 그 내부에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_오형엽(문학평론가)

이번 시집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오형엽은 장영수의 시에서 ‘나’가 보고 있는 사물이 곧 ‘나’가 되는 물아일체의 총체성, 그 안에서 얻게 되는 어렴풋한 생의 진리, 그리고 이 과정들이 너무나 순연히 어떤 거부함 없이 진행되고 있지만 그 파장은 불꽃이 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장영수의 ‘각성과 성찰 사이의 충돌로 인한 불꽃’이 숨 막히는 향기로 형상화된다고 평가하였다. 윤동주 시인은 ‘쉽게 씌어진 시’가 부끄럽다고 했지만, 쉽게 읽히는 시가 그리운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어렵게 읽히는 요즘의 까다로운 시들 가운데 모처럼 쉽게 읽혀 반가울 수 있는 시집 『그가 말했다』이다.

어찌하여 해당화는 까다롭고
짜디짠 모래밭에조차 뿌리를
내리는가 신비스런 그 강인함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서슬 푸른, 날카롭고 완강한 가시,
가시들로 무장된 줄기들을 에워
싸는 잎들, 누군가가 꽤 오랫동안
벼려냈을 것만 같은 잎, 잎들, 사이
사이, 새빨간, 새빨간 꽃잎들

그, 한 그루 한 그루에 맺히고
서린 푸른 하늘, 푸른 바다,
서늘한 바람, 무더운 바람,
세찬 모래 바람, 매운 모래 바람……

그, 숨 막힐 듯이 깊어만 가는
그 향기……
─「바닷가 모래밭의 해당화」

■ 시집 소개글

『그가 말했다』는 제목으로만 보면 누군가가 말한 것을 받아 적은 시집으로 잘못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집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말했다’ 시편들은 모두 한 사람의 화자의 목소리다. 이 화자를 우리는 시인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시인은 겸손하게 이 세계 혹은 이 사회에 대한 자신의 목소리를 숨기려 한다. 그 방법은 자신의 능동적 글쓰기를 수동적 글쓰기로 바꾸려는 전략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우리는 시인의 그 수동적 목소리에서 오히려 뜨겁고 날카로운 비관을 듣게 된다.

■ 뒷표지(시인이 쓰는 산문)

가령 한 잎의 낙엽에서 온 세상 모든 세계 모든 모습들을 볼 수도 있으리라. 한 줄기 강물에서 어느 해변 한 모퉁이에서 다만 한 구역의 거리에서 우주를 볼 수도 있으리라. 누구의 심층적 고뇌의 깊숙한 근원도 볼 수 있으리라. 본다는 것은 보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본다는 것은 즉 그 어떤 것의 원인 이유 그리고 그 치유에 대한 것까지를 본다는 것이다. 본다는 것은 그러므로 그냥 보기만 하는 게 아니고 빛의 방향 쪽으로 살아가고자 한다는 것이다. 현실이 어떠하든 어떤 고통이 누구를 잡아 내리든 진실로 버텨내기가 버겁든 어쨌든 간에 어떤, 길이라고 하는 것이 나 있는 쪽으로 한사코 나아가고자 한다는 것이다.

■ 시인의 말

그간의 안팎의 빛 또는 빛과 연관된 것들 몇몇의
그 안팎에 대해 말해본다

총체성이 실재할 수 있는 것인지 문득 어떤 문들을
두드려본다

만약 홀로 외줄 타는 광대의 발길 하나하나에도
시를 말할 수 있다면 이책에 실린 것들은
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외딴곳에서의 평생의 외줄 타기 모두를 걸고
모두와 대면해야 했던 외줄 타기 자기 얼룩들쯤을
털어낸 연후에만 무연히 이어질 수 있을
평생의 외줄 타기……

2006년 가을
장영수

목차

시인의 말
바닷가 모래밭의 해당화
행락객이 말했다
누가 어떤 궤멸에 대해 말했다
누가 어떤 생존에 대해 말했다
누군가의 어떤 지령이 떨어졌다
함장이 말했다
기장이 말했다
누구네 마음들은 바스락거린다
그가 말했다 1
그가 말했다 2
그가 말했다 3
그가 말했다 4
그가 말했다 5
그가 말했다 6
낙엽 속에 청춘이 말했다
어떤 논객이 말했다 1
어떤 논객이 말했다 2
델게르 나랑, 다리온 사나, 바야르 자르칼
첫사랑 찬미 학도에게 누가 말했다
안면 앞바다가 말했다
한려수도의 유람선이 말했다
단체 모임에 따라간 사람이 말했다
어떤 해변을 떠올리며 그가 말했다
해변의 길손이 말했다
옛 소년이 말했다 1
시민이 말했다
강변에서 그가 말했다 1
강변에서 그가 말했다 2
강변에서 그가 말했다 3
강변에서 그가 말했다 4
수행자가 말했다
옛 소년이 말했다 2
강변 숲 속 작은 길에서 그가 말했다
자연 찬미 학도가 자연 찬미 학도에게 말했다
자연 찬미 학도에게 누가 말했다
시간 강사가 말했다
어떤 예술가가 말했다
자기 자신이 말했다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말했다
함장 집의 안부를 듣게 됨
바람 쐬러 나온 사람이 말했다 1
바람 쐬러 나온 사람이 말했다 2
바람 쐬러 나온 사람이 말했다 3
육십 년대 동해안 도로가 말하는 것 같았다
경포 앞바다에서 그가 말했다
이별 예식을 치른 사람이 말했다
어떤 연수생이 말했다 1
어떤 연수생이 말했다 2
그가 깨침의 형상에 대해 말했다
운전자가 말했다
면도기 광고 앞에서 웬 남자가 말했다
바람벽엔가 기대서 그가 말했다

해설|각성과 성찰·오형엽

작가 소개

장영수 지음

시인 장영수는 1947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났다. 1973년 계간 『문학과지성』 봄호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서울대 사범대 불어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 국어교육과를 졸업했으며, 고려대 국문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시집으로 『메이비』 『시간은 이미 더 높은 곳에서』 『나비 같은, 아니아니, 빛 같은』 『한없는 밑바닥에서』 『그가 말했다』 등이 있고, 역서로 『시란 무엇인가』 『문학의 상징, 주제 사전』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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