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생의 이면마저 아름다운 음영으로 그리는 시인 김명인의
시간과 길의 표현미학
특유의 섬세함과 시어의 탁월한 조탁으로 쓸쓸한 삶의 풍경을 아름답게 그려내는 시인 김명인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시선집 『따뜻한 적막』을 펴냈다. 1979년 발간된 『東豆川』을 시작으로 근저 『파문』에 이르는 여덟 권의 시집에서 총 151편의 대표 시선을 뽑아 엮은 이 시선집은, 무엇보다 김명인 시인이 걸어온 지난 34년간의 시 세계를 되돌아봄으로써 시대와 현실을 담아내었던 그의 힘과 서정을 다시 한 번 곱씹는 계기이자, 더불어 시인 내면의 의식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의 시를 좋아하는 많은 독자들에게 반가운 소식이라 할만 하다. 또한 올해 회갑년을 맞은 시인의 회갑일에 맞추어 발간되는 만큼 더욱 뜻 깊은 기획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은 김명인 시집이 출간된 순서대로 각 시집에서 빼어난 시를 엄선하여 엮었다. 따라서 이 한 권으로 우리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시인이 지나온 길을 함께 걷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또한 그 과정에서 독자들은 자신의 지난 시간과 조우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번 시선집을 엮은 문학평론가 홍정선은 해설의 서두에서 “한 편의 동일한 시를 잡지에서 보았을 때와 시집에서 보았을 때, 그리고 한참의 세월이 지난 후 선집이나 전집에서 다시 읽었을 때 그 느낌이 달라지는 것은 세월의 탓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시가 놓인 자리가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시선집으로 만나는 김명인의 시는 어떤 느낌일까?
김명인의 시는 어떻게 읽어도 “각각의 상황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나기 때문에 재미있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그리고 그는 김명인 시의 이렇듯 놀라운 조화가 “그의 시가 독립된 아름다움과 함께 특정한 시기의 정서를 야무지게 지니고 있다는 사실”과 “30여 년의 시작 역정이 연속성과 집중력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기인한다고 보고 있다.
『따뜻한 적막』은 김명인의 시 속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을 또렷하게 확인할 수 있는 기회일 뿐만 아니라 기존에 읽었던 작품이 새롭게 다시 다가오는 신비한 경험으로 독자들에게 특별한 감동을 선사할 것이다.
김명인의 시간과 길, 그리고 詩
김명인 시인은 시를 향했던 원초적인 그리움이 자신의 태생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시인의 고향은 영동. 바다와 산으로 둘러싸인 자연과 그 안의 척박한 살림살이, 그리고 유년시절 배고픔을 통해 일깨워진 본능적인 감각과 매일같이 마주해야 했던 그래서 너무도 벗어나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 찼던 동해는 시인의 태생과 성장기의 아픈 흔적들이자 그가 시를 쓰기 이전부터 문학적 자양이 되어주었던 것들이다.
뿐만 아니라, 집안 형편으로 한때 아예 대학진학을 포기하기도 했던 시절과 동두천에서의 교사 생활, 그 후 월남 전쟁 참전까지, 그의 지난 세월은 「東豆川」 「嶺東行脚」 「베트남」 연작으로 고스란히 시가 되었다. 그래서 그의 시가 갖는 울림이 더욱 큰 것일는지 모른다.
소월시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산문학상, 대산문학상 등 화려한 수상경력을 가진 김명인 시인에 대한 문단 안팎의 관심은, 새로운 시집이 나올 때마다 이어지는 호평으로도 잘 알 수가 있다.
1973년에 등단한 이후 6년 만에 나온 첫 시집 『東豆川』은 현실의 상처들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시편들로 80년대의 시작과 함께 독자와 평단에 충격과 반가움을 안겨주었다. 이후 두번째 시집 『머나먼 곳 스와니』가 나오기까지는 9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는데, 그 이유는 시인이 밝히고 있듯이 “실존의 아픔으로 어쩔 수 없이 내지른 절규”였던 『東豆川』을 상자한 후, 이 시집의 주제이기도 했던 “펼쳐야 할 사랑과 접히는 마음 사이의 간극이 너무 커서 차라리 시를 포기할까 고민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다 “영영 시를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강박으로” 『머나먼 곳 스와니』를 상자하고, 1년간 객원교수로 미국생활을 했다. 그러고 나서 나온 세번째 시집 『물 건너는 사람』부터는 현실적인 문제 속에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길을 찾으려는 사색과 응시의 자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인의 자세는 『푸른 강아지와 놀다』 『바닷가의 장례』를 거쳐 『길의 침묵』에 이르면서 더욱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가며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는데, 그를 ‘길의 시인’으로 부르게 된 이유도 여기에 기인한다.
이러한 그의 시를 일컬어 문학평론가 황현산은 “강인한 서정”이라 평하며 “그 강인함의 비밀은 인간 심상의 위대함에 대한 믿음, 곧 문학에 대한 믿음”이라 설명한다. 또한 문학평론가 이숭원의 말을 빌리면 김명인 시인은 “막막하고 어두운 생의 지평을 넘어서려 하면서도 결국은 제자리로 되돌아오는 순환의 사슬에 힘겨워하며, 유적과도 같고 몽유와도 같은 현실 속을 끝없이 헤”매고 있으며, “그 몽유의 흔적은 사원에 내장되어 있는 낡은 경전처럼, 혹은 순례자의 고통을 담은 유적처럼, 뒤에 오는 고행승들에게 반려와 이정표의 역할을 해”주기 때문에 “그의 시는 고통과 상처를 노래함으로써 역으로 상처 입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독특한 기능을 수행”한다.
김명인의 시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시간’이다. 이것은 『바다의 아코디언』에서 잘 드러난다. 문학평론가 오형엽은 “김명인이 보여주는 실존적 사색의 중심에는 시간이 놓여 있다”고 보고 “영원에 도달할 수 없는 시간의 유한성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어둡고 쓸쓸한 내면 의식”이 이 시집의 주조를 이루고 있다고 평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어진 『파문』은 삶의 허무와 상처를 감지하게 하는 세상과 우주의 시간이자 신호로 그려지고 있다.
이렇듯 시가 되어 우리에게 드러난 시인의 시간과 길. 『따뜻한 적막』으로의 여행은 이 가을, 우리를 더욱 깊어지게 할 듯하다.
시인 박라연은 김명인에 대해 “생의 남루를 서늘한 미학으로 바꾸어놓는 데 천재인 것 같다”고 평하며, 그 힘을 “좋은 시는 핍진한 생의 현실에서 나오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따뜻한 시선”이라는 말로 설명한 바 있다. 이것은 고단한 생의 기억을 애정과 아쉬움이 담긴 글썽이는 눈길로 망연히 응시하는 이번 시선집의 표제작 「따뜻한 적막」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자신의 시간이자 길이었던 시를 글썽이는 눈으로 되돌아보는 시인의 시선을 가만히 좇다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
■ 작품 속으로
내가 국어를 가르쳤던 그 아이 혼혈아인
엄마를 닮아 얼굴만 희었던
그 k이는 지금 대전 어디서
다방 레지를 하고 있는지 몰라 연애를 하고
퇴학을 맞아 고아원을 뛰쳐나가더니
지금도 기억할까 그때 교내 웅변대회에서
우리 모두를 함께 울게 하던 그 한마디 말
하늘 아래 나를 버린 엄마보다는
나는 돈 많은 나라 아메리카로 가야 된대요
일곱 살 때 원장의 姓을 받아 비로소 李가라던가 金가라던가
朴가면 어떻고 브라운이면 또 어떻고 그 말이
아직도 늦은 내 귀갓길을 때린다
기교도 없이 새소리도 없이 가라고
내 詩를 때린다 우리 모두 태어나 욕된 세상을
이 强辯의 세상 헛된 강변만이
오로지 진실이고 너의 진실은
우리들이 매길 수도 없는 어느 채점표 밖에서
얼마만큼의 거짓으로나 매겨지는지
몸을 던져 세상 끝끝까지 웅크리고 가며
외롭기야 우리 모두 마찬가지고
그래서 더욱 괴로운 너의 모습 너의 말
그래 너는 아메리카로 갔어야 했다
국어로는 아름다운 나라 미국 네 모습이 주눅들 리 없는 合衆國이고
우리들은 제 상처에도 아플 줄 모르는 단일 민족
이 피 가름 억센 단군의 한 핏줄 바보같이
가시같이 어째서 너는 남아 우리들의 상처를
함부로 쑤시느냐 몸을 팔면서
침을 뱉느냐 더러운 그리움으로
배고픔 많다던 동두천 그런 둘레나 아직도 맴도느냐
혼혈아야 내가 국어를 가르쳤던 아이야
─「東豆川 4」 전문
원양 어선을 타다 온 친구는
上席을 잡아 울릉도로 떠난다 한다
번 돈도 없이
먼 바다에서 끌고 온 그의 주정
뜰에는 장다리꽃들만 떨기로 피어
흔들리지 않아도 먼 수평선을 흔들고 섰다
왜 그리울까
올해나 작년에 죽은 사람들의 이름보다
더 생생한 우리들의 가난
그 그리움 밖으로
낚시를 물고 청년 하나가
삼각파도 위에 솟구쳤다 떨어진다
어딘가 억새풀 적시며 구름이 흘러
저물기 전에 한 차례 비바람아 불어라
나는 모든 억새가 풀어놓는 어둠을 거쳐
지나가리라 상머리에 한 마리씩 떨어지는 날들을
잠 깨는 아이의 등을 토닥거려 다시 재우며
숨어서도 너는
마침내 가수가 되어 가는구나
한밤이 끝나고 또 어둠이
우리들을 어디로 이끌 것인가
비가 내린다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荒天 아래로
우리들의 서른 살이 물거품처럼 떠올랐다 꺼져
가는 것이 보인다
─「嶺東行脚 1」 전문
장례에 모인 사람들 저마다 섬 하나를
떠메고 왔다, 뭍으로 닿는 순간
바람에 벗겨지는 연기를 보고 장례식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만
우리에게 장례 말고 더 큰 축제가
일찍이 있었던가
녹아서 짓밟히고 버려져서
낮은 곳으로 모이는 억만 년도 더 된 소금들
누구나 바닷물이 소금으로 떠다닌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죽음은 연둣빛 흐린 물결로 네 몸속에서도 출렁거리고 있다
썩지 않는다면, 슬픔의 방부제 다하지 않는다면
소금 위에 반짝이는 저 노을 보아라
죽음은 때로 섬을 집어삼키려 파도치며 밀려온다
석 자 세 치 물고기들 섬 가까이
배회할 것이다, 물밑을
아는 사람은 우리 중 아무도 없다
물속으로 가라앉는 사자의 어록을 들추려고
더 이상 애쓰지 말자 다만 해안선 가득 부서지는
황홀한 파도의 띠를 두르고
서천 저편으로 옮겨진다는, 질펀한
석양으로 깎여서 천천히 비워지는
─「바닷가의 장례」 전문
아직은 제 풍경을 거둘 때 아니라는 듯
들판에서 산 쪽을 보면 그쪽 기슭이
환한 저녁의 깊숙한 바깥이 되어 있다
어딘가 활활 불 피운 단풍 숲 있어 그 불 곁으로
새들 자꾸만 날아가는가
늦가을이라면 어느새 꺼져버린 불씨도 있으니
그 먼 데까지 지쳐서 언 발 적신들
녹이지 못하는 울음소리 오래오래 오한에 떨리라
새 날갯짓으로 시절을 분간하는 것은
앞서 걸어간 해와 뒤미처 당도하는 달이
지척 간에 얼룩 지우는 파문이 가을의 심금임을
비로소 깨닫는 일
하여 바삐 집으로 돌아가면서도
같은 하늘에서 함께 부스럭대는 해와 달을
밤과 죽음의 근심 밖으로 잠깐 튕겨두어도 좋겠다
조금 일찍 당도한 오늘 저녁의 서리가
남은 온기를 다 덮지 못한다면
구들장 한 뼘 넓이만큼 마음을 덥혀놓고
눈물 글썽거리더라도 들판 저쪽을
캄캄해질 때까지 바라봐야 하지 않겠느냐
─「따뜻한 적막」 전문
■ 해설 속으로
-초기에 자신의 문제보다는 주변의 세사에 주목하면서 공간적으로 퍼져 있던 그의 시적 관심은 뒤쪽으로 갈수록, 마치 넓은 습지의 물들이 모여서 도도한 줄기를 이루는 강처럼, 시인 자신을 중심으로 한 우리의 ‘인생’으로 통합되어 흐르는 모습을 보여준다.
-과연 김명인은 하응백의 말처럼 길 위에 선 시인이다. 김명인 시의 화자는 늘 ‘가고’ ‘떠나고’ ‘흐르고’ ‘지워지는’ 길 위에 서 있다. 두 번째 시집 『머나먼 곳 스와니』에서부터 가파른 상향 곡선을 그리며 부쩍 빈번하게 등장하기 시작한 이 ‘길’의 이미지는, 세 번째 시집 『푸른 강아지와 놀다』에서는 정점에 도달했다고 할 정도로 자주 나타나고, 이후 여덟 번째 시집까지는 여섯 번째 시집의 제목이 『길의 침묵』이라는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듯 줄곧 지배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김명인의 시에서 여행은 공간의 이동이며, 공간의 이동은 세월의 흐름이고, 세월의 흐름은 거기에 실린 마음의 움직임, 곧 인생이다. 그래서 김명인의 길은 여행의 길이며, 세월의 길이고, 세월 속에서 마음이 머무르고 움직였던 발자취의 길이며, 마침내는 우리가 모두가 걸어가야 하는 고단한 삶의 길이다.
-기억/회상은 과거를 현재 속에 간직하거나 불러들이는 행위이다. 그래서 기억은 과거이면서도 현재를 간섭한다. 시도 때도 없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기억은 현재 속으로 침입해 들어온다. 산에서도, 바다에서도, 미국에서도, 연해주에서도 기억은 계기만 생기면 되살아나서 현재와 뒤섞인다. 이미 끝난 과거의 삶이 마치 현재인 것처럼 우리를 구속하거나 즐겁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김명인의 길, 그가 시에서 그려 보이는 시간/인생은 많은 부분이 기억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기억의 포로들이며, 그 기억 때문에 힘들게 인생의 여로를 걸어간다는 사실을 그의 여덟 권의 시집은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