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한 도시에서 구원을 꿈꾸는 순례자의 노래
남진우는 설교하는 자가 아니라 몸부림치는 자이고 그의 언어는 깨달은 자의 언어가 아니라 꿈꾸는 자의 언어라서, 그는 끝내 시인의 자리에서 겸허했고 성과 속의 변증법을 놓지 않았다. 스스로 성스럽지 못한 세상에서 스스로 성스럽지 못한 자의 회한과 동경이 그의 시를 낳았다. __문학평론가 신형철
평론가로서도 활발하게 활동하며 기형도와 함께 현대시의 그로테스크 리얼리즘 대표시인으로 일컬어지는 남진우의 네번째 시집 『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2000년 여름에 발간된 『타오르는 책』 이후 6년 만에 나온 이 새 시집에서, 독자들은 참으로 오랜만에 남진우 시의 어두운 빛깔을 만나게 될 것이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남진우는 해찰하지 않는다. 그는 성(聖)을 향해 전력으로 진력한다. 지난 25년간 그의 모든 시는 단 한 편의 시였다”라고 이번 시집의 해설을 시작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시에서 남진우 시인이 보여주었던 것처럼, 삶과 죽음의 경계가 허물어진 곳에서 타자와 만나는 다양한 방식과 메마른 세계에 대한 사유는 이번 시집에서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3부에 걸쳐 총 60편의 시가 실린 이번 시집은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죽음에 대한 이미지와 그로테스크한 상상력으로 타자를 응시하며 신성을 찾아간다. 이처럼 한 대상에 대해 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시인의 ‘일물일어’에는 어떤 종교성이 엿보이는데, 이 종교성으로 인해 시인의 노래는 선택이 아닌 운명이라고 해설은 또한 덧붙이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진우의 시가 늘 한 자리에 멈춰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는 첫 시집에서 깊은 곳을 향해 그물을 던졌고, 두 번째 시집에서는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했으며, 바로 전 시집에서는 타오르는 것들에 대해 노래했다. 깊은 곳과 죽은 자, 그리고 타오르는 것을 향한 성스러운 노래가 오롯이 그의 것으로 각각의 시집 안에 녹아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는 네번째 시집에서 낯선 것들과 만난다. 그것들은 이 세계와는 또 다른 미지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다시 말해 그 낯선 것들은 미지의 세계의 한 자락이자 이 세계를 비추는 거울이며 또한 세계 안에 있는 타자라고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처럼 말이다.
1부에서 만날 수 있는 낯선 것들의 정체는 동물이다. 여우(「여우 이야기」), 개(「저수지의 개들」), 사자(「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 반달곰(「겨울잠」), 호랑이(「먼 산 먼 길」), 꽃게(「종일토록」), 악어(「열대야」 「계단 오르기」), 들소(「들소떼와 춤을」) 등이 그것이다. 여기서 나타나는 동물들은 이 세계 속에서 시인이 느낀 피로와 절망감을 나타내는 부류와 이러한 시인의 공허 사이로 찾아와 그것의 입을 더 크게 벌려 놓는 부류로 나누어진다. “발톱으로 서로의 목줄기를 찢으며 짖어”대는 「저수지의 개들」이 전자라면 “새벽 세 시”에 “내 방 문 앞”에 나타난 “사자”(「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는 후자라 하겠다. 그런데 이러한 타자들에게서는 이전까지 그의 시에서 보여졌던 일말의 성스러움을 찾아볼 수가 없다. 오히려 그 반대편에서 아비규환을 이루며 시인을 지치게 할뿐이다.
성(聖)을 탕진한 세속도시에 시인은 서 있는 것이다.
비 내리는 밤
저수지 밑에서 개들이 짖는다
흙탕물 위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울음소리
긴 혀를 늘어뜨리고
두 눈에 푸른 불을 켠 개들이
발톱으로 서로의 목줄기를 찢으며 짖어댄다
짖어댄다 소용돌이치는 저수지 밑
진흙탕을 달리며
일찍이 지상에서 쓸려 나가
저 어두운 물속에 갇힌 온갖 소리들이
물결과 물결 사이
허연 잇자국을 드러내며 거품을 뿜어댄다
물에 불은 주검들이 둥둥 떠다니는 수면 위
부우연 숲 그림자를 흔들며 번져가는 울음소리
밧줄을 내려주어도 저들은 올라오지 못한다
오직 짙은 어둠에 몸을 숨기고 짖어댈 뿐
일렁이는 수초 사이에서 뒤엉켜 싸우면서
저들은 밤새 금 간 제방을 물어뜯는다
우리가 버린 말
우리가 욕하고 더럽히고 깨트린 말들이
폭풍우 치는 밤
저렇게 어두운 물 밑에서 하염없이 짖어대고 있다
─「저수지의 개들」 전문
지금
목마른 사자 한 마리 내 방 문 앞에 와 있다
어둠에 잠긴 사방
시계 똑딱거리는 소리
잠자리에 누운 내 심장에 와 부딪치고
창 가득히 밀려온 밤하늘엔 별 하나 없다
아득히 먼 사막의 길을 걸어 사자 한 마리
내 방 문 앞까지 왔다
내 가슴의 샘에 머리를 처박고
긴 밤 물을 마시기 위해
짧은 잠에서 깨어나 문득 눈을 뜬 깊은 밤
돌아보면 아무도 없는 허허벌판의 텅 빈 방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사자의 갈기가
내 얼굴을 간지럽힌다
타오르는 사자의 커다란 눈이 내 눈에 가득 차고
사나운 사자의 앞발이 내 목줄기를 짓누를 때
천둥처럼 전신에 와 부딪는
시계 똑딱거리는 소리
문을 열고 나가보면 어두운 복도 저편
막 사라지는 사자의 꼬리가 보인다
─「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 전문
동물들이 남긴 흔적 위에서 세속도시의 삶과 죽음에 관해 성찰하는 시들이 2부를 이룬다. 1부와 마찬가지로 2부에 나타나는 죽음의 모습 역시 두 가지로 분류되는데, 세속도시의 타락상을 드러내는 발견되는 죽음과 타락한 세속도시의 파국을 꿈꾸는 죽음이다.
파국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묵시록은 검은 판타지로 반복되며 계몽이 아닌 향유로서 그려지고 있다.
나는 아주 낡고 더러운 소문의 도시에 살았다
장마가 지나가면 태풍이 다가왔고
잠시의 맑은 날 끝엔 눈사태가 기다리고 있었다
즐비한 술집 앞엔 매일 얼어 죽은 시체가 발견되곤 했다
이 도시의 주민들은 일 년 내내 기침을 해댔고
검은 안개 속을 허우적거리듯 걸어다녔다
신문과 전파는 무심히 붐비는 사람 틈새로 빠져나갔고
거리의 검투사들은 찌르고 찔리며 환호 속에 죽어갔다
변방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여전히 지루한 것들뿐
전쟁도 아니고 휴전도 아닌 막막한 세월을
유행 따라 머리 길이를 조절하며 사람들은 살아갔다
지급된 구두가 다 떨어져 나가는 순간까지
나는 아주 낡고 더러운 소문의 도시에 살았다
누추한 그림자를 끌고서 혀 밑에 쌓인 소금과 재를 맛보며
오래된 동상들이 늘어서 있는
황량한 광장을 가로질러 걸었다
이미 내 삶은 유적지를 적시는 메마른 빗방울이었고
아무도 내게 손 내밀지 않았으므로
길 잃은 소녀의 울음도 장님의 호각 소리도
내 깊은 적막을 깨뜨리지 못했다
나는 아주 먼 곳에서 온 자객처럼
하나씩 증발해버리는 소문의 도시에 살았다
아침이면 사나운 새들이 유리창을 부수고 날아들었고
저녁이면 어두운 카페에서 낯선 이국 가수의 목소리가
부우연 담배 연기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 밤
도시의 하늘을 가로질러 공습경보는 울려 퍼지고
추적자는 문을 두드리는데
방주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문밖에서」 전문
나는 흑색 소설만을 읽는다
시체들이 쏟아져 나오고 피가 솟구치는
어두컴컴한 페이지를 넘기며
나는 막다른 골목을 헤맨다
잔인하게 죽어가는 자의 외마디 외에
이 지상에서 더 들을 말이 뭐가 있는가
흑색 소설에서 모든 것은 해결된다
사람은 태어나 꿈틀대다 덧없이 죽어가는 것
흑색 소설을 읽으며 오늘도 나는 확인한다
모든 길 끝엔 파헤쳐진 무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사방에서 권총이 불을 뿜고
어두운 술집에서 더러운 화장실에서
으슥한 뒷마당 주차장 지하실에서
사내들은 차례로 쓰러진다 적막한
거리 저편 울려 퍼지는 불자동차 소리
내 인생에 더 이상 반전은 없다
모자를 깊숙이 내려 쓰고 코트 깃을 올린 채
온갖 범죄와 유혹이 들끓는 거리를 초연히 지나간다
마약에 절은 사내가 칼에 찔려 내 발밑에 쓰러지고
부유한 미망인이 은밀한 미소를 건네오는 밤
나는 흑색 소설만을 읽는다
안락의자에 기대어 가장 편안한 자세로
불현듯 찾아올 죽음을 기다린다
─「나는 흑색 소설만을 읽는다」 전문
3부는 앙코르와트(「앙코르」), 몽생미셸(「몽생미셸」), 인도의 시원(「반얀나무 아래」), 카타콤(「카타콤」), 인도의 두르가 사원(「멍키 템플」) 등을 순례한 기록이다. 이 시편들은 타락한 세속도시, 성소를 잃어버린 자의 비애에서 씌어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시들에서는 폐허가 된 성소를 순례하는 자가 그 성소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시인의 상상력을 만날 수 있다.
남진우의 시에서 ‘시적인 것’이 작열하는 순간은 바로 이런 순간이다. 신성을 향한 열망이 몽상을 촉발하고, 이윽고 그 몽상이 수일(秀逸)한 이미지들을 창조해내고, 마침내 그 이미지들이 대상의 완강한 현실성을 뛰어넘어 신성을 탈환하는 순간 말이다. (해설 「열세번째 사도의 슬픈 헛것들」 중에서)
어스름이 내리는 강가
기다리는 이는 오지 않고
물소 한 마리 느릿느릿 내 곁을 지나간다
내가 아직 가보지 못한 강 건너 숲 저편
낡은 사원 하나 오랜 세월 비바람에 서서히 무너져가고
나는 끊긴 길 이편에 적막하게 앉아
저녁 강물을 들여다보고 있다
해 저물도록 그림엽서를 팔던 소녀는
자전거를 타고 노을 속으로 멀어져가고
먼지를 뒤집어쓰고 놀던 아이들 소리치며 그 뒤를 따라 뛰어간다
실눈 뜨고 바라보는 강물 위로 부서지는 마지막 햇살
뿔이 긴 소를 타고
저 물속으로 깊이 자맥질해 들어가면
거기 나를 기다리는 누가 있을까
저녁이 머뭇대며 내 주위를 에워싸기까지
기다리는 이는 오지 않고
조용히 물살을 가르며 내게 다가오는 숲 그림자
나는 어느덧 온몸을 휘감아 오르는 나뭇가지 푸르름에 휩싸여
아무도 찾지 못하는 사원이 된다
─「오래된 사원」 전문
아주 멀리
돌의 도시가 떠오른다
해자를 건너 기나긴 성벽을 지나
아득한 전생의 꿈에서 보았던 탑들이 솟아오른다
황폐한 뜨락 저편 웅크리고 있는 땅거미
거대한 나무들이 금방이라도 줄기와 뿌리를 뻗어 삼키려 드는
사나운 밀림 한가운데
부서지고 무너지고 금이 간 모습 그대로
돌의 도시는 내 앞에 펼쳐져 있다
읽을 수 없는 상형문자로 가득 찬 회랑을 돌아서
왕과 승려와 병사들이 차례로 내 곁을 지나간다
얼마나 많은 전쟁과 추수를 거듭한 끝에
지금 나 홀로 이 돌의 도시에 남겨진 것일까
벽면에 새겨진 전차 위에서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는 왕은 말이 없고
그 바퀴 아래 깔린 용병들의 신음 소리만 아직도 메아리친다
그늘진 사원 한 켠
목이 달아난 불상 앞에 향을 피우고 기도하는 사람들
그 앞에 잠시 고개 숙이고 몇번째인지 모를 생을 헤아리다
어스름에 잠긴 돌의 도시를 빠져나온다
─「앙코르」 전문
남진우 시인이 꿈꾸는 타락한 도시의 파국은 세계에 대한 그의 위기의식과도 맞닿아 있다. 이것은 남진우 시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지금까지 그가 천착해온 주제가 바로 이러한 위기의식에서 출발한 구원에 대한 감각이기 때문이다.
그의 시 속에서 낯선 것들의 안내를 받아 마주하는 미지의 세계에서 독자는 자신을 타자의 모습으로 만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만난 세계와 타자의 모습은 공허하기만 하다. 시인은 그 공허를 채우려는 열망으로 성을 찾는다. 그리고 독자에게 타락한 도시를 구원하는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고 소리 없는 질문을 던지는 듯 하다.
이번 그의 시집은 그 자체로 독자를 미지의 세계, 죽음과도 같은 암흑의 세계로 안내하는 낯선 것, 『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시집 소개
시집 『새벽 세 시의 사자 한 마리』에서 시인은 낯선 것과의 조우에 대해 노래한다. 그 낯선 것들은 사자, 악어 같은 짐승이기도 하고, 식물이나 기후, 자연현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낯선 것들의 정체는 우리를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로 데려가는 매개물이다. 그것들은 미지의 세계의 한 자락이면서, 이 세계를 비추는 거울이며, 또한 이 세계 안에 있는 타자이기도 하다. 우리의 일부이면서 영원히 타자이기도 한 죽음과도 같은 잠처럼.
■ 시인이 쓰는 산문(뒤표지 글)
봄날 뻐꾸기가 울고 있다. 가까운 산에서 들려오는 소리다. 평소에는 잘 들리지 않는다. 아마도 도시의 소음 탓이거나 분주함 때문이리라. 잘 의식하지 못해서 그렇지 건물 안팎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소리가 늘 내 귀를 채우고 있다. 건물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사라진다 해도 실내의 TV 음향이나 오디오의 음악, 전화벨 소리가 끊임없이 내 몸을 가로지르며 흘러다닌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하는 일에서 풀려나 멍하니 앉아 있을 때, 그리고 마침 주변에 아무도 없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을 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뻐꾸기는 운다. 한 번 울고 잠시 틈을 두었다가 다시 운다. 무심코 그 울음소리에 귀 기울이던 나는 한 순간 전신이 빨려들어가는 것을 느낀다. 뻐꾸기는 나를 삼키고 내가 있던 공간을 삼키고 이윽고 우주 전체를 삼켜버린다. 나도 사라지고 세상도 사라지고 오직 뻐꾸기 울음소리만 존재하는 그런 순간이 몇 초 정도 지속된다…… 무중력 상태의 공간을 비행하는 느낌이 이럴까…… 그 소리에 잠겨 있으면 내 몸이 깊은 우물 속으로 한없이 낙하하는 것 같기도 하고 열기구를 타고 점점 멀어지는 지상을 굽어보며 광막한 허공으로 떠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이렇게 한동안 뻐꾸기 소리에 빠져 있다가 슬며시 놓여 나온다. 가만히 아주 가만히 내 의식은 내 몸이 속한 공간에 닻을 내린다. 여전히 내 곁엔 아무도 없고 보이지 않는 세계 저편에서 한가로이 뻐꾸기가 울고 있다. 한 번 울고 잠시 틈을 두었다가 다시 운다. 고요의 밑바닥에서 내 생의 비밀을 알려주겠다는 듯 울고 있는 뻐꾸기. 내 몸을 들락날락하는 저 소리를 징검다리 삼아 한 시절 건너가면 거기 무엇이 있을까. 나는 다시 하던 일을 계속하기 위해 몸을 일으킨다. 뻐꾸기 울음소리가 멀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