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테르부르크

대산세계문학총서 048

이현숙 옮김 | 안드레이 벨르이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06년 7월 5일 | ISBN 9788932017082

사양 신국판 152x225mm · 768쪽 | 가격 20,000원

책소개

역사적 테마를 상징적 언어로 재현한
러시아 모더니즘 문학의 최고봉, 『페테르부르크』

러시아의 대표적인 상징주의 작가 안드레이 벨르이Andrei Belyi의 장편소설 『페테르부르크Peterburg』가 문학과지성사에서 국내 최초로 완역․출간되었다. 『페테르부르크』는 세계 문학사적으로도 가장 독창적인 작품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같은 모더니즘 계열 중에서도 실험성이 두드러진 작품으로서 은유와 환유, 반복과 전위, 라이트모티프leitmotiv 등의 독특한 문체로 서술된 실험소설의 전형이다. 또한 니체․베르그송․슈타이너 등 20세기 초 철학자들의 사상과 역사관이 투영되는 등 러시아 상징주의 특유의 철학적 사색이 내포되어 있어 작품의 깊이를 더한다. 벨르이는 『성서』를 비롯한 수많은 신화적․역사적․철학적 텍스트들을 소설에 삽입하고 기존의 러시아 문학의 전통과 규범, 즉 구조․플롯․문체․기법 등을 혁신적으로 계승함으로써 현대 소설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독특한 문체실험의 매력과 마치 ‘퍼즐’처럼 구성해놓은 『페테르부르크』를 읽다보면 러시아 모더니즘 문학의 묘한 마력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페테르부르크』는 나보코프Nabokov가, “내게 있어 가장 위대한 20세기 소설은 조이스의 『율리시스』, 카프카의 『변신』, 벨르이의 『페테르부르크』, 그리고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일부”라고 손꼽았듯이, 20세기 모더니즘 소설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작품 자체의 완결성과 혁신성, 그리고 문학사적 의의를 고려할 때, 그간 『페테르부르크』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작품이었다. 사회주의 실험을 지속했던 러시아의 현대사에서 허용된 문학 양식은 ‘사회주의 리얼리즘’뿐이었고, 상징주의를 비롯한 모더니즘 문학은 철저하게 비판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독특한 모더니즘 스타일에 혁명을 비극적으로 묘사한 『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내에서 ‘판매 금지 도서’로 묶여 있다가 1980년대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 와서야 비로소 소개될 수 있었고, 오히려 서구에서 그 작품의 중요성을 인정받았던 것이 사실이다.

러시아 상징주의는 19세기 말 정신문명의 황폐화와 사상적 위기 속에서 종래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탈피하고 인문주의를 부흥하려는 모더니즘 운동을 주도하며 시작되었다. 프랑스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았지만 문학적인 운동에 치우쳤던 프랑스에서와는 달리 러시아에서는 문학․철학․종교 등 총체적인 사회 현상으로 받아들여져 상징을 통해 세계관을 전개시키려 했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러시아 상징주의를 선도한 솔로비요프를 비롯해, 메레쥬코프스키, 뱌체슬라프 이바노프, 안드레이 벨르이, 그리고 알렉산드르 블록 등이 유명하다. 그러나 극단적 신비주의와 엘리트주의적인 단점 때문에 현실과 유리된다는 비판을 받았고, 1910년대를 정점으로 위기를 맞았다. 1911년 집필을 시작해 1916년 단행본으로 초판된 『페테르부르크Peterburg』는 러시아 상징주의 문학의 절정기에 씌어진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간 러시아 문학 전공자들 사이에서 푸슈킨,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등과 동급으로 인정받아온 벨르이의 작품이 한국에서는 90년 만에야 처음으로 완역 소개되는 셈이다.

‘러시아를 향한 창(窓),’ 소설 『페테르부르크』

소설 『페테르부르크』는 제1차 러시아 혁명 직후인 1905년 10월, 제국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시․공간적 배경으로 하여 러시아의 사회와 역사를 기록한다. 페테르부르크는 18세기 초 표트르 1세가 제국을 표방하며 야심차게 건설한 ‘유럽을 향한 창’(A. 푸슈킨)이었지만, 20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혁명과 전쟁이라는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 휩싸여 그 종말을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중심으로 소설 『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민족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를 중심 테마로 다룬다. 유라시아에 걸쳐 광대한 영토를 소유한 러시아는 고유의 민족적 성격을 추구한 반면, 서양과 동양의 사고가 혼재한 채 공존하고 있었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러시아는 내․외적 시련 속에서 민족의 정체성이 흔들리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제국과 민족의 불안․소외․고립 등으로 표면화된다.

러시아 민족의 정체성 문제는 푸슈킨, 고골, 도스토예프스키 등 많은 작가들의 작품에 표명되며 러시아 문학의 전통이 되었지만, 이는 벨르이의 『페테르부르크』에 와서 절정을 이룬 셈이다. 그간 러시아의 근현대 문학, 특히 모더니즘 소설은 우리에게 낯선 영역 중 하나였던 것이 사실이다. ‘유럽을 향한 창(窓)’ 페테르부르크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 『페테르부르크』의 출간은 한국의 독자들에게 ‘러시아를 향한 창(窓)’이 될 것으로 자부한다.

■ 작품 줄거리

제정러시아의 일등문관이자 원로원 의원인 아폴론 아폴로노비치에게는 대학생 아들인 니콜라이 아폴로노비치가 있는데, 그의 아내이자 니콜라이의 어머니인 안나 페트로브나는 2년 전 이탈리아 배우와 눈이 맞아 도망간 상태이다. 어느 날 아폴론 아폴로노비치는 계속되는 시위 때문에 그가 경멸과 정체 모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는 바실리예프스키 섬(평민들의 주거지로, 페테르부르크 다리 아래에 있다) 근처에 갔다 오던 중에 검은 콧수염의 잡계급인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두드킨과 마주친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길함에 치를 떠는 아폴론. 그러나 그 불길함에는 이유가 있었으니, 그는 급진주의자당의 핵심 멤버로서 아폴론의 아들인 니콜라이에게 접근해 고위인사에 대한 테러를 사주하게 될 인물이기 때문이다.

한편 니콜라이는 어머니의 가출에 이어 사랑하던 여인 소피야 페트로브나가 자신의 어릴 적 친구이자 러시아군 장교인 세르게이 리후틴과 결혼하여 페트로브나 리후티나가 된 충격이 더해져 도미노 복장(광대 복장)으로 페테르부르크의 밤거리를 헤매고 다닌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신출귀몰하며 아녀자를 놀래키는 괴물로 신문에 묘사되어 문제를 일으킨다.

그러는 사이 당의 책임자인 리판첸코로부터 꾸러미 하나를 받아 니콜라이에게 맡겨두라는 지시를 받은 두드킨은 니콜라이를 찾아가 꾸러미를 전하고 그와 긴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는 당 사업에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데다 ‘그 인간’으로 불리는 리판첸코와의 관계도 좋지 않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며 「계시록」을 읽고 있음을 밝힌다.

한편 소피야는 늘 출장을 다니는 남편 세르게이에 대한 불만의 표시로 집에서 자주 사교 파티를 여는데, 아내를 사랑하지만 아내의 생활에 일일이 간섭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세르게이는 소피야가 파티에만 빠져 지내며 자신은 뒷전이어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다. 그러던 중 소피야는 자신의 파티에 니콜라이가 참석하고 있음을 알게 되고, 또한 페테르부르크 다리에서 도미노 차림으로 자신에게 접근했던 것이 니콜라이임을 알게 된다. 애증과 질투, 오해가 뒤섞인 후 소피야는 니콜라이에게 복수를 하겠다는 생각으로, 파티석상에 도미노 차림으로 찾아온 니콜라이에게 당의 지령이 담긴 편지를 몰래 전한다.

그런가 하면 아폴론은 그의 아들 니콜라이의 행태가 못마땅하면서도 도망간 아내에 대한 생각에 한편 안쓰럽기도 하다. 그러나 콩트 철학의 신봉자인 그는 칸트에 미쳐 있으면서 급진주의자들과 어울리며 점심 무렵이 되어서야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아들을 용납하기 어렵다. 한편 니콜라이는 니콜라이대로 아버지 아폴론이 구시대를 대표하는 악령에 불과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어머니의 가출도 모두 아버지 탓인 것만 같다. 그는 아버지를 악마라고 생각한다.

소피야가 전한 편지를 읽고 혼비백산한 니콜라이는 도미노 차림이라는 것도 잊고 사람들 앞에서 광분하고, 이로 인해 그간 문제를 일으켰던 괴물이 원로원 의원의 아들이라는 사실만 만천하에 밝혀지게 된다. 그 파티석상에는 아폴론도 참석하고 있었는데, 경찰서장으로부터 전후 상황을 보고받은 그는 아들에게 실망해 조용히 집으로 돌아가 니콜라이의 방을 살핀다. 그리고 책상을 뒤지다가 서랍에서 정어리 통조림처럼 생긴 것을 발견하고 자신의 서재로 가져온다. 그런 그에게 집사는 아내인 안나 페트로브나가 돌아왔으며 지금 근처 호텔에 묵고 있다고 알려준다. 그는 깊은 상념에 빠진다.

그런가 하면 세르게이는 아내가 단지 파티에만 빠져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는다. 결국 자살 시도를 하게 되지만 미수에 그치고 마는데, 니콜라이에게 한 행동 때문에 후회를 하며 괴로워하던 소피야가 그를 발견하고 경악한다. 둘은 눈물을 흘리며 화해를 하고, 세르게이는 이 모든 상황을 초래한 니콜라이를 용서하지 않겠다며 그를 자신의 아파트로 끌고 온다.

그러나 니콜라이는 니콜라이대로 충격에 빠져 있다. 편지의 내용 때문이다. 내용인즉 두드킨으로부터 받은 꾸러미는 바로 정어리 통조림으로 위장된 시한폭탄이며 그 폭탄으로 테러를 할 대상은 다름 아닌 원로원 의원, 즉 자신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세르게이로부터 빠져나와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온 니콜라이는, 그러나 서랍 속의 그 물건이 없어졌음을 알고 고민에 빠진다. ‘두드킨? 혹은 당에서 수거해 간 것일까?’ 그러는 동안 호텔로 아내를 찾아가 극적인 화해를 한 뒤 집으로 아내를 데려온 아폴론은 아들을 불러 모자 상봉을 시킨다. 오랜만에 세 가족은 한자리에 모여 저녁식사를 하고, 단란한 한때를 보내며 앞으로는 화목한 가정을 이룰 것을 약속한다.

그날 밤 리판첸코는 자신의 침실에서 두드킨에 의해 살해당하고, 아폴론의 서재에서는 폭탄이 터진다. 다행히 아무도 다치지 않았지만 정신적 충격을 받은 니콜라이는 어머니와 외국으로 나가고 아폴론은 시골로 요양을 간다. 니콜라이는 결국 부모가 모두 사망하고 난 뒤에야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 작품 속으로

페테르부르크는 내려앉을 것이다.
그날이 오면, 지상의 모든 인간들이 자리를 박차고 나올 것이다. 위대한 전투, 지상 유례없는 전투가 벌어질 것이다. 노란 아시아인들이 자리를 떨치고 일어설 것이다. 유럽 대륙을 피바다로 만들 것이다. 그렇다, 쓰시마가 재현될 것이다! 제2의 칼카가 재현될 것이다.
쿨리코프 평원에서 너를 기다리노라!
그날이 오면, 조국의 땅 위에 마지막 태양이 떠오를 것이다. 만일, 태양이여, 네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오, 태양이여, 유럽의 해안이 몽골인의 무거운 발에 짓밟힐 것이다. 해안 위로 거품이 솟아오를 것이다. 지상의 생명체들은 다시 대양 밑바닥에 가라앉을 것이다. 오랫동안 잊혀졌던 태초의 카오스 속으로……
떠올라라, 오, 태양이여!

[……]

모두, 모두, 모두, 이제 분명해졌다. 백 년이 지난 지금, ‘청동 손님’이 직접 찾아왔다. 소리가 메아리쳤다.
“잘 있었느냐, 아들아!”
세 걸음, 거대한 손님의 발밑에서 통나무가 세 번 쪼개졌다. 청동 황제가 앉은 금속 의자에서 쪼개지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쪼개지는 소리, 울리는 소리와 함께 망토 자락 속의 초록색 팔꿈치가 싸구려 책상에 청동 무게를 실었다. 황제는 천천히, 무심하게 머리에서 청동 화관을 벗었다. 메아리치며, 청동 화관이 이마에서 떨어져 나왔다.
딸깍딸각, 철컥철컥, 수천 킬로그램의 손으로 옷자락에서 붉게 달구어진 파이프를 꺼냈다. 파이프를 눈으로 가리키며, 파이프를 향해 윙크했다.
“Petro Primo Catharina Secunda……(표트르 I세에게―예카테리나 2세가).”
꾹 다문 입술에 밀어 넣자, 구리에서 떨어진 초록색 연기가 달빛 아래 피어올랐다.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예브게니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백 년의 도주는 잘못되었다. 도시에서, 농촌에서, 입구에서, 계단에서― 등 뒤를 쫓아 울리는 소리에는 아무런 분노도 없었다. 그는 영원히 용서받았다. 과거와 현재의 모든 일들은 아르항겔의 나팔 소리가 울릴 때까지 겪어야 할 무상한 시련일 뿐이었다.
그는 ‘손님’의 발밑에 무릎을 꿇었다.
“스승님!”
‘손님’의 청동 눈동자 속에서 청동 애수가 빛났다. 돌을 깨는 손이 다정하게 어깨 위로 떨어졌다. 붉게 달궈지며, 어깨뼈가 으스러졌다.
“괜찮다. 죽는다, 서둘러라……”
이제 수천 도 열기의 달빛으로 달구어진 붉은-적자색 화염에 휩싸인 ‘금속 손님’이 그의 눈앞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의 온몸이 작열하며 눈부신 하얀색이 되었다. 엎드려 있는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에게 잿물이 흘러들었다. 완전히 정신을 잃은 채,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가 수천 킬로그램에 안겨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청동기사’의 금속이 그의 혈관 속에 스며들었다.

■ 「옮긴이 해설」 중에서

‘페테르부르크 신화’에 나타난 표트르와 페테르부르크에 대한 상반된 이미지 역시, 문학이 아직 분명히 형성되지 않았던 18세기와 문학이 사회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던 19세기에 그 성격을 달리한다. 공식 문학이 주류를 이루었던 18세기 문헌에서 페테르부르크는 신의 은총이 실현된 천년 왕국의 거점으로 나타나는 한편, 19세기 러시아 문학은 민간설화나 예언 등 비공식 구비문학으로 전승되던 파멸이 예정된 악의 상징으로서의 페테르부르크를 묘사했다. 19세기 러시아 작가들은 표트르 1세의 개혁이 러시아를 진보적 방향으로 이끌었다는 역사적 사실에는 동의하는 한편, 그 화려한 개혁 이면에 존재하는 어두운 측면에 주의를 돌렸다. 개인의 운명을 통해 국가의 운명을 관찰했던 러시아 작가들은 사회적 불평등으로 고통받고 운명의 힘에 휩쓸리는 ‘작은 인간’들의 비극에 공감했으며, 그들의 작품 속에서 페테르부르크는 인간에게 파멸적인 힘을 행사하는 왜곡된 도시의 형상으로 고착되었다. 이렇게 ‘페테르부르크 신화’는 구비 전설과 궤를 같이 하는 내용으로써 러시아 문학에 등장하고, 이후 19~20세기를 관통하며 이른바 ‘페테르부르크 텍스트’라는 문학적 현상이 야기된다. [……]

작가 벨르이는 『페테르부르크』의 주인공들의 왜곡된 모습을 통해 고통스런 상황에 처한 영혼의 비극을 나타낸다. 『페테르부르크』에서 등장인물들은 공포와 의심 속에서 고독을 형벌처럼 짊어지고, 이들의 진정한 얼굴은 마스크 속에 숨겨져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가장 무도회는 등장인물들의 영혼의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등장인물들은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 마스크 속에 숨어 버리는 것이다. 이때 등장인물들의 깊은 내면세계는 ‘의식의 흐름’을 통해 드러난다.

『페테르부르크』에서는 등장인물 각각의 심리 상태와 다양한 의식 구조가 영혼의 동요, 내적인 갈등, 의식 속의 투쟁 등으로 표명되는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신비한 꿈이나 병적인 환각 속에서 자신의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장면을 재생한다. 『페테르부르크』에서 의식의 흐름을 통한 심리묘사는 아폴론 아폴로노비치의 ‘제2의 공간,’ 니콜라이 아폴로노비치의 ‘최후의 심판’에 나타나고, 이는 두드킨의 환각과 쉬슈나르프네와의 대화, ‘손님’이 혈관에 금속을 흘려 넣는 장면에 이르러 절정을 이룬다. [……]

벨르이는 『페테르부르크』에서 도시 페테르부르크에 파멸적 형상을 부여함으로써 도시의 필연적 멸망에 관한 러시아 작가들의 전통을 계승한다. 푸슈킨이 서사시 서문에서 ‘그 앞에서 모스크바가 빛을 잃는’ ‘젊은 도시’ 페테르부르크의 위용을 묘사했다면,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있어 페테르부르크는 시적인 위대함을 상실한 자본주의적 부르주아적 도시였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페테르부르크를 인간적인 감정을 상실한 도시로서, 전 러시아 역사에 걸쳐 유령적․환상적 색채의 화신으로 간주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비(非)러시아적인 도시 페테르부르크가 장차 러시아 역사에서 종말을 고할 것이라 생각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푸슈킨의 서사시 서문에 동의하는 한편, 유럽 국가들이 다른 체제로의 전환을 꾀하는 19세기 말의 현실 속에서 페테르부르크가 소멸됨으로써 역사적 상징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즉 페테르부르크는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으며 이제 역사의 시련을 맞이하여 새로운 시대에 자리를 양보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사고는 벨르이의 『페테르부르크』에서 현실로 나타난다. 페테르부르크의 멸망이 푸슈킨과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있어 미래의 일이었다면, 벨르이 시대에 이르러서 그것은 필연적인 현실이었다. 페테르부르크의 멸망은 러시아 역사에서 페테르부르크 시대를 마감하는 것이며, 그것은 바로 벨르이 자신이 살던 시대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역사적-세계사적 격변기였던 20세기 러시아에서 페테르부르크는 기억 속에만 존재해야 하며, 청동기사가 탄 말은 황폐한 택지로 쫓겨나야 한다는 것이다. (옮긴이 해설: 「『페테르부르크』, 모자이크 혹은 퍼즐의 미학」 중에서)

■ 뒤표지 소개 글

1703년, 근대화를 통한 대제국 건설을 계획한 표트르 1세는 핀란드 만 연안에 ‘유럽을 향한 창’(A.푸슈킨)인 도시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한다. 소택지(沼澤地)라는 최악의 자연 조건을 극복해야 했던 도시의 건설에 수많은 희생이 요구되었고, 러시아 민중의 의식 속에 페테르부르크는 억압과 박해를 상징하는 타인의 도시로 각인된다. 이에 페테르부르크는 신을 배반하고 러시아 민족을 파멸시키는 악의 화신으로 수마에 휩쓸려 ‘폐허’가 될 운명을 지닌 저주받은 도시의 형상을 갖게 된다.

안개 낀 신기루와 비현실적 환영의 도시 페테르부르크의 형상은 푸슈킨, 고골,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등의 작품을 통해 러시아 문학사를 관통하고, 음울하고 파멸적인 도시 페테르부르크의 신화는 안드레이 벨르이에 이르러 절정을 이룬다. 러시아 제국 최대의 격동기였던 1905년 가을, 문화의 황금기를 비집고 싹트기 시작한 역사적 혼란의 조짐은 결국 전통적 가치의 붕괴 속에 파국으로 치닫는데…… 뛰어난 언어 기교로써 장식체 산문을 창조한 벨르이의 문체 실험은 역사적 테마를 상징적 언어로 재현한 소설 『페테르부르크Peterburg』를 통해 러시아 모더니즘 문학의 정수를 선보인다.

목차

프롤로그
제1장
제2장
제3장
제4장
제5장
제6장
제7장
제8장
에필로그

옮긴이 주
옮긴이 해설: 『페테르부르크』, 모자이크 혹은 퍼즐의 미학
작가 연보

기획의 말

작가 소개

이현숙 옮김

1965년 서울에서 출생, 고려대학교 노어노문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러시아 상징주의를 전공하여 「안드레이 벨르이의 『페테르부르크』와 푸슈킨의 『청동기사』의 상호텍스트성 연구」(1998)로 모스크바국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러시아 상징주의자들의 페테르부르크 텍스트 연구」 「러시아 미래주의 시학의 현대성」 「소설 『페테르부르크』의 라이트모티프 연구」 등의 논문을 발표했으며, 번역서 『스크린과의 대화』(유리 로트만․유리 치비얀 저, 2005)를 출간했다.

안드레이 벨르이 지음

안드레이 벨르이(본명: 보리스 니콜라예비치 부가예프)는 러시아 상징주의 시인·소설가이며, 문학이론가이자 상징주의 철학가이다. 모스크바 대학의 수학 교수인 아버지와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지닌 어머니에게서 지성적․감성적 재능을 부여받은 벨르이는 청년 시절 철학에 몰두하여 러시아의 종교철학자 솔로비요프를 비롯하여 서구 철학자 칸트, 니체, 쇼펜하우어 등의 영향을 받았다. 시집 『쪽빛 황금Zoloto v Lazuri』(1904), 『재Pepel』(1909), 『항아리Urna』(1909) 등을 출간했으며, 연작 『심포니아Simfoniia』[「영웅」(1901), 「드라마」(1902), 「귀환」(1905), 「눈보라의 잔」(1908)]와 소설 『은빛 비둘기Serebrianyi Golub’』(1909), 『코틱 레타예프Kotik Letaev』(1922)를 창작했다. 상징주의 이론가로서 벨르이는 상징주의 철학과 문학 이론에 관한 많은 논문들을 저술했고, 이는 『녹색 초원Lug Zelenyi』(1910), 『상징주의Simbolism』(1910), 『아라베스크Arabeski』(1911) 등에 수록되어 있다. 1916년에 발표된 소설 『페테르부르크Peterburg』는 벨르이의 대표작으로서, 역사적 테마를 상징적 언어로 재현하여 러시아 모더니즘 문학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전자책 정보

발행일 2012년 8월 28일 | 최종 업데이트 2012년 8월 28일

ISBN 978-89-320-1708-2 | 가격 1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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