것들

문학과지성 시인선 319

이하석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06년 7월 7일 | ISBN 9788932017105

사양 · 116쪽 | 가격 6,000원

책소개

김수영문학상, 김달진문학상을 수상한 중견시인 이하석의 여덟번째 시집 『것들』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익히 알려진 대로 이하석의 시에는 고유한 두 가지의 특징이 있다. 그중 하나는 자연과 문명의 관계에 대한 극도의 비관적 인식을 바탕으로 문명을 비판하는 주제를 말하고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 1980년에 문학평론가 김현이 시인의 첫 시집인 『투명한 속』의 해설에서 지적했듯이 “서정 시인으로서는 희귀하게 자기의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번 시집에도 이러한 특징들이 어우러진 시들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시인은 냉정한 혹은 무심한 관찰자의 시선으로 건조하고 황폐한 도시의 삶을 증언한다.

어젯밤에 고스톱 친 팔을 새삼 세우며 해를 향해
누가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또 누가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카메라 셔터들이 여기저기서 눌러진다
그게 새해 새 꿈의 확인이라 여기는지 모두 조급하게 잇달아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그러곤 저마다 먼저 그곳을 빠져나오려고 제 차를 향해 달린다
차들이 마구 뒤엉켜서 쉬 빠져나오지 못한다
―「1월 1일」 부분

맥주처럼 마음 부글대느라 듣지 못했을까
차바퀴에 깔린 비명 소리
술과 속도감에 취해
누군가를 죽이고 도주하는 무리들

뒤이어 차들 왈칵왈칵 몰려와
부서진 삵 으깨어 아스팔트 위에 납작하니 붙여놓는다
― 「새파란 길」 부분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현대 도시 문명이 가져온 소외와 단절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킨다. 모든 게 너무나도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도시 속에서 현대인들은 제대로 발화할 수도 없고, 애써 발화한다고 해도 그것은 온전히 되돌아오지 않는다. 숫자만이 중요해진 현대 소비 사회에서 인간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뻥튀기 든 손을 과장들게 치켜들고 있다
[……]

짙게 선팅한 차 속에서는
질주자가 붉은 신호등만 노려볼 테지
그의 연인은 모자를 눌러쓴 채 랩 소리에만 귀를 열어둘 테지
― 「뻥튀기 파는 사내」 부분

몇 가지 더 필요한 것들, 예컨대 생수 여섯 병, 간식으로 먹을
초콜릿 열두 개, 산정에서 깎아 먹을 사과와 밀감 열두 개에
그것들의 껍질 깎을 칼들은 휴게소에서 총무가 공금으로 마련했다
다른 사람들은 총무와 전혀 다른 족속들인 양
등산화 신은 다리를 들었다 놓았다 하다간 봉고 속에 가지런히 포개진다
― 「途中의 안동휴게소」 부분

이하석의 시에서 건조하고 황폐한 삶을 사는 도시인들은 인격이 거세된 사물이 되어버리고 만다. 시인은 도시 문명 속에서 존재감이 점점 헐거워지고 사라지고 있는 인간을 가방, 통, 쇼핑백, 철모 등의 사물에 빗댄다. 사물이 된 인간들이 맺는 관계도 결국 물화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소통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현대인의 모습이 투영된 “여행 중인 검은 가방”은 “주인의 마음처럼” “닫혀지고 꼭꼭 매여진 채” “완강하게 입 다물고”(「누런 가방」) 있을 뿐이다.

통은 안이 안 보이게 닫혀 있다
그것들은 쌓여 있다
통들은 서 있는 게 누워 있는 것 같다
― 「통」 부분

노란 쇼핑백은 파란 쇼핑백과 한통속임을 치욕으로 여길까
노란 쇼핑백은 안을 보여주지 않는다
검은 쇼핑백은 안을 보여주지 않는다
― 「쇼핑백들」 부분

시인은 이런 소통 불가의 사회에서 자신의 시도 마찬가지로 하나의 닫혀 있는 사물이 아닌가 하는 회의를 품고 있는 듯 보인다. 자신이 쓴 글자도 결국은 “구석에 쌓”여 “바랜 채 바스락거”(「구석진 곳」)릴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심지어 “시를 만드는 일”이 하루 빨리 끊어야 할 만큼 “치명적인 것”(「담배」)이라고 절망적인 생각을 토로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자학은 잠시일 뿐이다. 시인은 “끊을 수 없는 사랑”(「담배」)”으로 “우리 있는 곳을 밖이라 할 수 없어서”(「것들」)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고투의 정신을 잃지 않으려 한다.

바다는 우리의 것들을 밖으로 쓸어낸다
우리 있는 곳을 밖이라 할 수 없어서
생각들이 더 더러워진다 끊임없이
되치운다

우리가 버린 것들을 바다 역시 싫다며 고스란히 꺼내놓는다
널브러진 생각들, 욕망의 추억들, 증오와 폭력들의 잔해가 바랜 채 하얗게 뒤집혀지거나
검은 모래 속에 빠진 채 엎어져 있다

나사가 빠지고 못도 빠져나가 헐겁지만
그것들은 우리 편도 아니다
더욱 제 몸들 부스러뜨릴 파도 덮치길 겁내며
몇 번이나 우리의 다리를 되걸어 넘어뜨린다

여름 홍수에 그런 것들 거세게 바다 파고들지만
바다는 이내 그 모든 것들을 제 바깥으로 쓸어 내놓는다
우리 있는 곳을 밖이라 할 수 없어서
우리 생각들이 더 더러워진다 끊임없이
되치워야 한다
― 「것들」 전문

이하석의 시가 보여주는 일련의 냉정하고 서늘한 시선, 풍자적 묘사가 보여주는 일상의 견고한 어둠들은 도시 삶의 정직한 묵시록적 기록이다. 이하석의 시는 그런 점에서 폐허의 거리에서, 잉여의 쓰레기와 과잉 속도 속에서 유령처럼 살아가는 우리 삶의 뛰어나면서 치열한 고백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_김용희(문학평론가)

■ 시집 소개글

시집 『것들』은 사물에 묻어 있는 인간의 표정, 인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나하나의 사물들은 사물 그 자체라기보다 그들과 관계한 인간들의 증거로 존재한다. 그런 뜻에서 이 시집 속의 사물은 물건에 가깝다. 냉정한 혹은 무심한 관찰자인 시인에 의해 물건들은 그들에게 흔적을 남긴 인간들의 일상의 한 단면, 삶의 한순간을 증언한다. 그 증언은 얕으면서도 언뜻 삶의 가장 깊은 부분을 끄집어내는 부조리한 시인의 손을 닮아 있다.

■ 시인이 쓰는 산문

도시 근교의 공동묘지는 유독 조용하게 느껴진다. 어쩌다 그 조용함에 끌려 잠깐씩 들러보곤 했는데, 그런 일이 잦아지더니 이즈음엔 마음먹고 찾아가서 서성이다 오기 일쑤다. 거기서 책도 읽고, 간혹 원고도 다듬는다. 편지를 쓰거나 전화를 하진 않는다. 너무 조용해서 누군가에게 연락하는 것조차 소음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공동묘지가 조용한 것은 죽은 이들의 영역이기 때문이리라. 그 자리에 서면 살아 있는 이들도 숨소리조차 죽이기 마련이다. 수천의 무덤들이 산등성과 비탈을 덮고 있다. 봉분들이 큰 상 위에 밥그릇들을 씻어 엎어놓은 듯 가지런하다. 그 상 위의 고요를 고봉밥으로 퍼먹은 듯 나는 때로, 식곤증에 빗대서 하는 말이지만, ‘적(寂)곤증’으로 나른해지기도 한다.
공동묘지를 들어 고요를 말하지만, 우리 삶의 이면에는 그런 적적한 곳들이 더러 있다. 이 소음천지에서 그런 곳들을 찾아다니고 들추어내는 게 얼마나 생광스러운 일인가. 시와 예술은 상당 부분 고요에 기반을 둔다. 그것들은 폐허의 적요가 피우는 꽃 같은 것이라 생각되기도 한다. 도시 근교의 공동묘지는 이렇게 생각하는 내게 친숙한, 전혀 낯설지 않으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버려져 있는, 우리 삶의 아주 고요한 뒤안의 세계이다. 거기선 삶이 새삼 각별하게 여겨지고, 내 시도 그런 내 삶의 뒤안에서 어른대는 그림자라 여겨지기도 하는 것이다.

목차

시인의 말

제1부

의자의 구조
나무 의자
누런 가방
가방
途中의 안동휴게소
1월1일
노래하는 사내
뻥튀기 파는 사내
서 있는 여자들
쇼핑백들
철모
불안한 의자

악어
커피숍
담배 피우는 이
담배

제2부

야적-구제역1
야적-구제역2
야적-노인
야적-포대들
물통
것들
파편들
긴 나무 의자
기울어진 지평
열 수 없는 창
새파란 길

제3부

봄꽃
사막
둔황
운촌 강 둔덕에서
경주 남산
구석진 곳
폐교
나무 아래

제4부
휴전선
매미
빈잠
밥상
검은 가방
자부동 의자
분신1
분신2
철거주택
추락지점
진정한 나는?

해설|문명의 멀이와 구토 자국에 대한 한 보고서·김용희

작가 소개

이하석 지음

시인 이하석은 1948년 경북 고령에서 태어났다. 1971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한 이후, 『투명한 속』『김씨의 옆얼굴』『우리 낯선 사람들』『측백나무 울타리』『금요일엔 먼데를 본다』『녹』『고령을 그리다』 등의 시집을 상자했다. 대구문학상, 대구시문화상(문학부문), 김수영문학상, 김달진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현재 영남일보 논설실장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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