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성을 무너뜨린 곳에서 나타나는 익숙하고도 낯선 공간
한국 시의 전위로 첨예하고 극적인 시적 감각을 보여주는
시인 이장욱의 두번째 시집
한국 시의 모더니티의 한 극한에서 서정성 자체를 낯설게 하는 첨예한 시적 감각을 만나려 한다면, 이장욱을 읽는 것은 강렬한 경험이 될 수 있다.
_이광호(문학평론가)
현재 문단에서 가장 주목받는 시인 중 한 사람이며 문학평론가, 소설가로도 활발히 활동 중인 이장욱의 새 시집이 문학과지성사에서 발간되었다. 『내 잠 속의 모래산』(2002) 이후 두번째 시집이다.
‘현실과 꿈의 경계 지점에 놓여 있는 시들’(오형엽)이라는 평을 얻었던 첫번째 시집에서의 분위기와 마찬가지로 이번 시집에서도 시인은 나른하고 몽환적인 분위기의 환상적인 시들을 선보인다. 몽환적이며 묵시적이기까지 한 시인의 시는 불연속적인 의미의 문장들과 짧게 스쳐 지나가는 듯한 이미지들을 교차시킴으로써 생겨나며 이는 독자들을 익숙하면서도 낯선 공간 속으로 끌어들인다.
이 시집의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이광호는 이 ‘익숙하면서도 낯선 공간’이 생겨나는 이유로 시 속에서 끊임없이 이동하거나 사라지는 주체들과 파괴되어 있는 시간의 연속성을 예로 든다. 시인의 미학적 자의식은 주체들, 즉 ‘나’와 ‘그’를 이송시키거나 이탈시키고 때로는 증발하고 확산시킨다. 이러한 끊임없는 ‘이동’을 통해 주체의 자리를 지워가는 동시에 현재와 과거가 혼재된 시간을 선보임으로써 이상하고 낯선 공간 속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그리하여 독자들은 익숙한 단어, 익숙한 문장들 속에서 낯섦을 느끼는 기이한 체험을 하게 된다.
나는 코끼리의 귀가 되어 펄럭거리고
너는 개의 코가 되어 먼 곳을 향하고
우리는 공기 중을 부드럽게 이동하였다.
活命水를 마시고 있는 약국 안의 사내와 함께
머리를 말리고 있는 여자의 거울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배경이 되어
무한히 지나갔다.
오늘 아침의 세계는 역사와 무관하고
어젯밤의 세계는 다만 어젯밤의 세계,
우리는 어지럽고 아름다웠다.
먼지처럼
음악처럼
오늘은 누군가 성수와 뚝섬 사이에서 사라지고
누군가 병든 유태인처럼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누군가 박물관의 입구처럼 조용해지고
아침에는 추리 소설 속의 탐정처럼 깨어났다.
노련한 사서들은 언제나 음악의 비유를 경계했지만
우리는 미래의 음표로 나아가기 위해 현재에
집중해야만 하는 피아니스트와 같이
나는 내일도 기린의 목처럼 부드럽게 휘어졌다.
너는 모레도 하마의 입처럼 무거워졌다.
우리는 삼십 년 후에도 가득한 먼지처럼
천천히 이동하였다. ─「먼지처럼」 전문
표제작 「정오의 희망곡」은 이장욱 시의 이러한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시 중의 하나이다. 널리 알려진 FM 음악 프로그램의 제목을 가져오면서도 이로 인해 기대되는 대중문화적인 코드는 드러내지 않는다. 이 자리를 메우고 있는 것이 오히려 종말론적인 분위기를 띠는 시간 ‘정오’이다. ‘정오’라는 시간이 강박적으로 반복되고, 흘러가고 날아다니는 ‘나’와 ‘당신’ 이 등장하는 이 시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어디쯤 위치해 있을 법한 초현실적인 공간을 만들어보인다. 시집 『정오의 희망곡』은 이렇게 시의 주체를 사라지게 하고 시간의 흐름을 문제 삼음으로써 일견 서정시로 보이는 시의 외형을 깨고 서정성을 기묘하게 지워버린다.
우리는 우호적이다.
분별이 없었다.
누구나 종말을 향해 나아갔다.
당신은 사랑을 잃고
나는 줄넘기를 했다.
내 영혼의 최저 고도에서
넘실거리는 음악,
음악은 정오의 희망곡,
우리는 언제나
정기적으로 흘러갔다.
누군가 지상의 마지막 시간을 보낼 때
냉소적인 자들은 세상을 움직였다.
거리에는 키스 신이 그려진
극장 간판이 걸려 있고
가을은 순조롭게 깊어갔다.
나는 사랑을 잃고
당신은 줄넘기를 하고
음악은 정오의 희망곡,
냉소적인 자들을 위해 우리는
최후까지
정오의 허공을 날아다녔다. ─「정오의 희망곡」 전문
해설은 줄곧 이 시집의 시간성을 주목하고 있다. 과거는 현재의 기원이 아니며, 현재는 과거의 원인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나’도 그 속에서 어떤 분명한 기원을 가질 수 없다. 바로 이것이 기억을 기초로 하여 만들어진 개인 신화와 서정성의 틀을 깬다는 것이다. 이장욱에 와서 우리는 순결한 지혜와 위안의 목소리로서의 서정시, 잠언적 미학으로 기억되는 서정시를 그 안에서부터 무너뜨리는 시를 만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장욱은 한국 시의 모더니티의 한 극점을 보여준다. 바로 지금이 서정을 부정하는 서정시, 익숙하면서도 낯설고 몽환적인 공간을 만들어내는 그의 첨예한 시적 감각을 만나는 강렬한 경험을 할 때이다.
너와 나 사이에 비밀이 있었다.
나는 침묵했다.
사소한 비밀들로 팽팽히 채워진 채
진군하는 행인들, 우리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애.
나는 내 얼굴을 지우고
그 얼굴을 기억하는
다른 얼굴이 되겠지만
보이지 않는 별들 사이로
새들의 저공 비행은
영원히 감추어진다.
좌판에서 거스름돈을 세던 남자는 잠시
죽은 여자를 잊을 것이며 그 순간
여자의 어둠 속으로 일년생 나무의 뿌리는
천천히 가닿을 것이지만.
쓰레기 차 한 대가 도시를 흘러나가고
나는 민노당을 지지하고
지구는 정기적으로
회전 중이다. 내 머리 위를 횡단하는
인공위성들.
오늘은 날씨가 좋다.
또 내일도
그럴는지 모른다. ─「새들의 비밀」 전문
■ 시집 소개글
시집 『정오의 희망곡』은 일상이 숨기고 있는 기묘한 낯선 세계를 보여준다. 현실과 환상이 경계가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 이 세계에는 일상 속에 판타지가 표 나지 않게 뒤섞여 있어서 우리를 보이지 않는 것들의 질서 안으로 밀어넣는다. 그러나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시간과 공간의 이러한 혼재를 시인은 오히려 단정한 문체와 가지런한 구조 속에 구축함으로써, 역으로 단단하게 보이는 현실과 매끈한 시적 질서가 얼마나 허물어지기 쉬운 가공물인가를 반어적으로 드러낸다.
■ 시인이 쓰는 산문
개구리들이 비처럼 내렸다.
폴 오스터를 위한 컴필레이션, 잘 듣고 있어요. 아침에는 여행을 떠난답니다. 고마워요.
심증만으로 하루를 건너가는 예수를 상상하도록 하자. 그도 자기를 믿고 싶었을 거야. 간절히.
사람들의 얼굴은 모두 비슷한 얼굴일 뿐인데, 전 오늘 당신을 처음 봐요. 신기해라.
주체란 실체 내부의 자기 부적합성, 실체 내부에 그어져 지워지지 않는 빗금에 다름 아니다. 아아, 지겨워.
아님 말고: 박찬욱의 가훈.
귀국하는 권희로씨의 경호를 위한 경찰의 작전명: “그 얼굴에 햇살.”
9·11 이후 미국이 벌인 대테러 작전명: “무한 정의.”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에는 태초에 카오스가 있었다고 적혀 있다. 하품하는 아가리의 이미지. 빠끔히 입 벌리고 있는, 단 하나의 공허.
하지만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총체성의 불가능함을 반영하는 총체성. 악무한의 쳇바퀴를 벗어나기 위한 다람쥐의 고투.
노킹 온 헤븐스 도어를 한 옥타브 낮춰서 부르기로 하자. 밥 딜런 풍으로. 우리 모두 입을 벌리고. 하나. 둘. 셋―
돈을 벌고 싶어.
개구리들이 비처럼 내리고 허공에 온 세계가 무지개처럼 피어났다. 화사했다.
안녕. 잘 지냈어요?
가을이 오면, 그 가을이 다시 오면
우리는 손을 잡고 우리의 오래된 해변을 걷기로 해요.
시인의 말
제1부
전선들
우리는 여러 세계에서
인파이터
좀비 산책
결정
엉뚱해
완전한 밤
근하신년
불균형한 생각
정오의 희망곡
19세기의 비
기린의 사랑
소음들
가을에 만나요
눈 내리는 마을
정확한 질문
아프리카 식 인사법
10년 후의 야구장
제2부
여름의 인상에 대한 겨울의 메모
여행자들
지진
春子
당신과 나는 꽃처럼
이탈
잡담
불놀이야
식물성
아마도 악마가
만남의 광장
오해
마네킹
먼지처럼
복화술사
비열한 거리
괴물과 함께 톨게이트
궤적
제3부
실종
내일은 중국술을 마셔요
투우
황혼 무렵의 투우
계단의 힘
사생활
중독
물질들
기하학적 구도
달려라 버스
칼
오늘도 밤
용의자
외계인 인터뷰
당신의 활동 영역
오늘의 날씨
나의 우울한 모던 보이
확산
새들의 비밀
해설|코끼리군의 실종 사건과 탈인칭의 사랑·이광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