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정하고 정밀한 언어와 문체 실험을 통해
의식의 분열―언어의 해체―자아와 세계의 단절 사이의 역학 관계를 탐색해온
작가 최수철이 5년 만에 선보이는 새 장편소설
삶과 죽음, 희망과 절망이 대치한 자살자들의 도시, 무망.
죽음에의 충동이 역병처럼 번져나가고,
삶의 의지를 저버린 영혼들 위로 잿빛 공포가 드리운다.
필립 아리에스는 『죽음 앞의 인간L’homme Devant la Mort』(1985)에서, 죽음에도 역사가 있어 시대별로 죽음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 그 양상이 달랐음을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2005년 세밑이 가까워오는 이때, 우리가 접하는 죽음의 모습은 어떠한가.
5년 만에 선보이는 장편소설 『페스트』(문학과지성사, 2005)에서 작가 최수철은, 지금껏 자신이 천착해온 의식의 해체, 엄정한 문체, 도저한 지적 사유라는 작가적 과제와 스타일을 견지하면서도, 개인 스스로 삶을 방기하는 ‘자살’이란 문제를 전면화한다. 그리고 폐쇄적 개인에서 사회로 문제 의식의 확대를 시도하고 있다. 90년대 중반 이후 조심스럽게 이러한 변화를 꾀했던 최수철은, 원고지 3000매가 넘는 방대한 분량의 이번 작품에서 그 변화의 양상을 본격화 ․ 구체화시키고 있다. 개인 의식사에서 사회구조로 확대된 내러티브 속 구체적 무대, 구체적 등장인물, 구체적 사건의 출현 그리고 이어지는 한껏 외연화된 주제의식 등을 고려할 때, 그의 소설이 전통적 서사 문법에 이전 작품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근접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죽음이 끊임없이 자기복제화해가는 도시, 무망. 라틴 댄스를 추는 무리들, 거리를 가득 메운 꼬리를 물고 달리는 자동차들, 화장터의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는 관들의 행렬, 머릿속으로 넘쳐드는 어린 시절의 기억들, 어둠 속 바다 위를 떠도는 부표들…… 도시 무망을 채우는 그 어느 것도 죽음의 그림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검은 버펄로 떼처럼 방향을 알 수 없고, 자기 식의 논리로 육체와 죽음 사이의 모호한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자살자들의 욕망은 동시에 인간의 나약한 면모를 적나라하게 표출함과 동시에 도시를 점차 전쟁 직후 소개령이 떨어진 황폐한 사회로 변모시키면서 독자들의 심경을 뒤흔든다.
이야기 전편에 걸쳐 작가는 그 어떤 장르, 어떤 소설에서도 시도된 바 없는 자살에 대한 종교적, 철학적 성찰―실제로 작품에는 빈번히 프로이트, 융, 성 아우구스티누스, 비르길리우스, 키케로, 세네카 , 푸코, 니체, 쇼펜하우어 등의 글과 함께 불교, 힌두교 경전 등이 언급된다―과 마주하고 있다. 주요등장인물 중 의사 한기형과 작가 임서상을 통해 언급되는 ‘인간 정신에 대한 방대한 임상 보고서’라는 대목은 이번 작품의 성격을 잘 대변한다고 하겠다. 동시에 의식과 무의식(꿈) 사이를 위태롭게 줄타기하는 최수철의 집요한 탐색은 때로 냉철한 분석자의 목소리를 띠면서도 등장인물의 내면과 사물(까마귀, 도마뱀, 바실리스크 등등)을 파고드는 구체적이고 섬세한 시선 때문에 그 언어와 문체가 때로 관능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일종의 원죄의식처럼 결국 인간의 삶 자체가 죽음으로 다가가는 도정이고 죽음 앞에서 순결, 엄숙해지는 개개인의 심리 묘사에 초점이 맞춰진 최수철의 이번 장편 역시 독자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는 마찬가지지만, 한 치의 빈틈 없이 촘촘하게 짜여져 있는 서사의 전개와 등장인물 간의 기묘한 역학관계가 속도감 있게 전개되면서 작가의 이전 어느 작품보다 흥미진진하게 읽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