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종닭 연구소

문학과지성 시인선 310

장경린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05년 11월 25일 | ISBN 9788932016528

사양 신46판 176x248mm · 120쪽 | 가격 6,000원

책소개

생활의 표피를 훑어가는 비유의 언어들,
그리고 새로 생긴 고독
장경린 시인의 세번째 시집 『토종닭 연구소』

1858년에 태어난 브레히트는「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를 썼으며 1903년에 태어난 아도르노는 “우리는 아우슈비츠 이후 더 이상 시를 쓸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그러한 역사가 남긴 파장이 점점 희미해져 가는 동안에도, 새로운 전쟁은 계속되고 있으며 현재의 우리는 과거의 우리에 비해 항상 조금 더 ‘시에 불리한 시대’를 살아간다. 21세기 한국을 살아가는 시인들은 어떠한 점에서 특히 더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는가?
그것은 한 체제가 장기간 유지되면서 생기는 부작용에서 많은 부분 기인한다.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자본이 지배하는 경제 체제 속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비극이 없어도 그들은 불리하다. 비극에도 질적인 우열이 있다면, 브레히트와 아도르노에게 불리함을 느끼게 한 비극은 현재의 비극보다 한없이 고급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불리함과 열악한 비극 속에서 시인인 장경린이 생활인으로서의 삶을 영위하면서 이루어낸 그만의 시세계를 세번째 시집 『토종닭 연구소』를 통해 보여준다.

시인 장경린은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오랫동안 한국은행에 재직한 후 현재 경제 자문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1985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당선되어 시단에 등장한 이후 『누가 두꺼비집을 내려놨나』 『사자 도망간다 사자 잡아라』의 두 권 시집만을 상자한 그의 소박한 시단 경력에 비해 다른 차원에서의 ‘화려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력에 독자들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 자본 흐름의 중추에 있다고 할 수 있을 ‘한국은행’이라는 기관과 ‘시인’이라는 그의 또다른 직업(?)은 마치 요철이 맞지 않는 한 쌍의 톱니 같다.

장경린은 그의 시 쓰기가 ‘업자한테 속아 아파트 물딱지를 산 뒤로 매사에 이면을 들춰보는 버릇이 생긴 것’과 같이 상징계인 세상을 ‘의심’하고 들춰보는 데서 출발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는 의심함으로써 시인인 것이다. __정효구(문학평론가)
경제 체제의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생활해나가는 그의 삶은 물적인 삶의 밑바탕에 깔고 있는 고유한 정체성으로 세상을 의심하며 세상과 소통하는 시편들을 이루어낸다. 이전의 시집들에서 문법 해체의 기법을 이용하여 삶의 풍경들을 스케치했던 장경린의 시가 해학적인 느낌을 많이 주었다면 장경린의 이번 시집에서는 자신이 그려야 할 청사진이 무엇인가에 대해 절박한 자세로 끊임없이 질문하며 삶의 형태를 찾는 모험에 좀더 진지하게 집중한다.

매화는 다시 매화가 되려 하고
수련은 다시 수련이 되려 하고
북한산도 다시 북한산이 되려 하는데
걸쭉하게 몸 버린 한강도
다시 한강이 되려 하는데
쓰러진 강아지풀도
강아지풀로 일어나려 하는데

나는 뭐가 돼야 쓰겠소
응? ─「달래야」전문

시인으로, 또는 고유한 정체성을 가진 영혼으로 살아야 하는 장경린은 ‘세상의 상징계에 조종당하고 왜곡당하지 않는 자생의, 자발의, 자율의, 자유의 존재가 되고 싶’(정효구)다. 시장의 메커니즘이 지배하는 이 세계에서 우리는 누구나 그 장치의 한 부품으로서 역할하고 도구로서 이용되어진다. 그러한 메커니즘의 생리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을 시인의 자기정체성에 대한 의심은 끝없이 계속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의 탈주란 삶의 밑바탕을 갈아엎는 것 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일 것임을 알고 있다. 이럴 때 그는 작은(반영구적인) 변화를 통해 위안을 얻는다.

야근과 몸살 덕분에
55킬로그램에서 52킬로그램으로
가볍게 몸을 구조조정시키고
몸 밖으로 퇴출시킨 물질만큼 탈속해진
반물질이 되어
모처럼 만난 구름머리
주문한 버섯찌개가 나오는 동안
메추리알만한 침묵 소금에 찍어 먹으며 ─「버섯찌개」부분

생활의 표피에 직접 닿아 있는 시어들(야근, 구조조정, 퇴출, 버섯찌개, 메추리알)로 이루어진 이 시는 장경린 시인이 끊임없는 의심과 질문 속에 지쳤을 때 그가 안주할 수 있는 곳의 위치를 보여준다. 수치상의 체중 변화가 가져다주는 안정과 평화는 그에게 ‘구름머리’를 만난 듯한 위안을 주고 이러한 위안은 ‘야근과 몸살’ 덕분인 것이다. 겨우 3킬로그램의 변화도 그에게는 삶을 각성시키는 요인이 된다. ‘야근’과 ‘몸살’과 ‘버섯찌개’로 이어지는 생활의 흐름 가운데에서 ‘구름머리’라는 반생활적인 존재를 만날 수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생활 때문이었다. 즉 언제나 시를 쓸 준비가 되어 있는 시인은 언제나 방심하지 않고 삶의 풍경들을 훑어가며 작은 변화도 놓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시를 읽으며 독자들은 이미 익숙한 현대인의 고독과 방황을 본다. 그리고 고독과 방황의 밑바탕에 서려 있는 비극의 기운을 감지할 것이다. 우리가 반복하고 있는 일상은 이미 우리를 고독하게 하였지만 그러한 고독을 시인이 반복하고 있는 시어들을 통해 볼 때 또다른 비극의 차원이 열린다. 비극은 복제되기 보다는 변주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금씩 다른 모습을 한 비극들을 우리는 시인이 만난 개인, 또는 시인 자신에게서 발견한다. ‘이것은 비극이다’라고 말하지 않아도 ‘나잇값을 해 이 양반아 술을 똥구멍으로 마셨어’(「몽유도원도 17」)에서 생겨나는 비극이 바로 그러한 종류이다. 즉 비극이 석고화된 이 시대의 시인들은 사회를 사는 개인 안으로 파고들고 그 안에서 개인의 비극을 찾아내는 것이다.

기차표를 끊어 놓고
시간 죽이러 들어간 청량리 뒷골목 극장
기형도 시인이 쓰러졌던
파고다극장보다 작고 음침한 그곳에는
세상과 담을 쌓기 위해 숨어든 백수들과
부랑자들이 굴러들어온 호구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때 절은 잿빛 스크린 펄럭이며
사람들을 가지고 노는 흉측스런 공룡보다
찢어진 스피커의 소름끼치는 소음이
사람 잡을 때마다
움찔거리며 흘리던 쥬라기의 팝콘들

그때 슬그머니
내 허벅지를 타고 넘어오는
옆자리 중년 남자의
부드러운 손길

시간을 넘나드는 영화도 보았고
가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영화도 보았다
聖이 性을 뛰어넘지 못하는 영화도 보았고
바다가 육지를 덮치는 영화도 보았다
그러나 남자가
남자를 뛰어넘지 못하고 무너지는
그 영화 같은 현실 앞에서
덥석 공룡에게 물린 듯
식은땀을 흘리며 ─「幕間』전문

■ 시집 소개글

시집 『토종닭 연구소』는 유머의 미학이 돋보인다. 유머는 기존 의미에 대한 비판이면서 새로운 의미로의 다양한 가능성을 여는 순간의 불꽃이다. 시인은 심각하고 딱딱하게 굳어 있는 현실을 단숨에 허물어뜨리면서 어디에건 자유롭게 담길 수 있는 물과 같은 의식의 상태로 열어놓는다. 새로운 현실은 어떻든 그런 의식 상태에서 싹튼다. 이 시집은 바로 그런, 유머에서 촉발된 무언가 되려고 하는 상상력으로 가득 차 있다.

■ 시인이 쓰는 산문

도시에 몰려든 사람들
자본의 물결에 휩쓸리고 내몰리며 살아가는 사람들
거리에 버려져 날리는 비닐봉지 같다
부분의 합은 전체보다 크다
아니 작다
도시가 자연보다 작아 보이기도 하고 커 보이기도 하듯이
사람이 도시보다 작아 보이기도 하고
커 보이기도 하듯이
내가 나보다 커 보이기도 하고
작아 보이기도 하듯이
내가 쓴 시는 나보다 커 보이기도 하고
작아 보이기도 할 것이다

시는 존재와 존재 사이의 벽을 넘나드는
일종의 ‘숨통 트기’가 아닐까
도시가 자연과 다르지 않듯이
과거와 미래가 다르지 않듯이
(과연 그럴까)
내가 당신과 다르지 않듯이
다르지 않기를 바라듯이
불현듯 뭔가 달라지기 위해 북한산을 오르고 있는 내가
문득 낯설어 보이듯이

목차

■시인의 말
지느러미가 잘 펴지지 않았다. 표류하고 있었다. 눈부신 햇살을 날개로 가리고 길가에 서 있는 동안 사람들이 지나갔다. 나도 나를 지나치는 날이 많았다. 어디쯤 왔을까. 휴대폰으로 문자 메시지를 날리며 걸어가는 소녀의 입가에 배꽃 같은 게 피어 있었다.

■시인의 산문(뒤표지)
도시에 몰려든 사람들
자본의 물결에 휩쓸리고 내몰리며 살아가는
거리에 버려져 날리는 비닐봉지 같은 사람들
부분의 합은 전체보다 크다
아니 작다
도시가 자연보다 작아 보이기도 하고 커 보이기도 하듯이
사람이 도시보다 작아 보이기도 하고
커 보이기도 하듯이
내가 나보다 커 보이기도 하고
작아 보이기도 하듯이
내가 쓴 시는 나보다 커 보이기도 하고
작아 보이기도 할 것이다

시는 존재와 존재 사이의 벽을 넘나드는
일종의 ‘숨통 트기’가 아닐까
도시가 자연과 다르지 않듯이
과거와 미래가 다르지 않듯이
(과연 그럴까)
내가 당신과 다르지 않듯이
다르지 않기를 바라듯이
불현듯 뭔가 달라지기 위해 북한산을 오르고 있는 내가
문득 낯설어 보이듯이

작가 소개

장경린 지음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현재 한국은행에 재직중이다. 1985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당선되어 시단에 등장했으며 시집으로 『누가 두꺼비집을 내려놨나』 『사자 도망간다 사자 잡아라』 『토종닭 연구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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