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지성계의 “얼굴 없는 사제” 모리스 블랑쇼,
현대 프랑스 철학계의 거목 장-뤽 낭시,
공동체의 ‘중심 없는 중심’에 대한 두 지성의 급진적인 탐색
“모리스 블랑쇼의 책들에는 어떤 음조, 어떤 목소리가 담겨 있으며, 절대적으로 유일한 세계로 다가가는 방법이 제시되어 있다. 나는 어떤 다른 작가에서도 그러한 것들을 본 적이 없다. 그 목소리를 들어본 사람은 그것을 결코 잊어버릴 수 없을 것이다. 그 목소리는 20년 이상 내 곁에 머물러 있다. 내 내면세계의 가장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이 음악을 전해준 블랑쇼에게 감사드린다. 그의 책들은 책 그 이상이다. 그의 책들은, 정확히 말해, 영혼 자체의 전투이다.” __폴 오스터
“블랑쇼의 『밝힐 수 없는 공동체』와 낭시의 『무위의 공동체』는 그 이전의 책들과 이후의 책들을 향해 매우 특이한 방식으로 빛을 던지고 있다. 내가 보기에, 이 두 저작은 의심의 여지없이 오늘날 가장 의미심장한 책들에 속해 있다.”
__자크 데리다
왜 공동체는 어떤 원리·기준·이념, 즉 어떤 동일성들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생각될 수 없는가? 왜 공동체는 항상 내재(內在)주의적이어야만, 전체주의적이어야만 하는가?
이 책은 조르주 바타유에 대한 해석을 거쳐 동일성 지배 바깥의 공동체, 즉 조직·기관·이데올로기 바깥의 ‘공동체 없는 공동체’에 대한 사유를 명확히 제시한 장-뤽 낭시의 논문 「무위(無爲)의 공동체」에 대한 응답으로 씌어진 모리스 블랑쇼의 「밝힐 수 없는 공동체」와 그에 대한 낭시의 재응답인 「마주한 공동체」를 함께 싣고 있다. 블랑쇼와 낭시는 의도적·강압적으로 조직화된 공동체에서 배제되어온 ‘공동의 영역’을 소통의 가능성과 함께 탐색한다.
중심의 부재 또는 빈 중심으로 현시되는 역설적이고 ‘밝힐 수 없는 공동체,’ 내재주의와 전체주의를 넘어서 있으며 전체의 고정된 계획을 갖고 있지 않은 공동체에 대한 가능성을 프랑스 철학계의 두 거목이 함께 모색하는 이 책은 20세기 이후 ‘공동체’와 ‘우리’의 관계에 대해 가장 급진적이며 멀리 나아간 논의를 담고 있는 우리 시대의 명저이다.
이 책에는 4개의 텍스트가 실려 있다.
4개의 텍스트가 씌어지게 된 배경과 담고 있는 간략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번째 텍스트인 블랑쇼의 『밝힐 수 없는 공동체』(1983)는 같은 해에 발표된 낭시의 논문 「무위無爲의 공동체」에 대한 응답으로 씌어졌다. 이 텍스트는 낭시의 「무위의 공동체」에서 논의된 소통·공동체·죽음·에로티시즘과 같은 주제들을 다른 관점에서 다시 조명하고 있다.
두번째 텍스트인 낭시의 『마주한 공동체』(2001)는 밝힐 수 없는 공동체가 씌어지고 나서 18년 후에 발표되었다. 이 텍스트는 낭시의 블랑쇼에 대한 재응답이며 보다 넓은 정치적 관점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세번째 텍스트인 데리다의 「영원한 증인」은 2003년 2월 24일, 블랑쇼 사망 4일 후에 거행된 장례식에서 데리다가 낭독한 추도문이다. 이 텍스트에서 데리다는 블랑쇼의 삶과 사상에 대해, 또한 블랑쇼와 낭시와의 만남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네번째 텍스트인 낭시의 「인간 블랑쇼에게 표하는 경의」는 일간지 『리베라시옹』 2003년 3월 5일자에 실렸다. 이 텍스트는 데리다의 「영원한 증인」과 마찬가지로 사라진 작가·사상가를 기리기 위해 씌어졌으며, 매우 명료하고 압축적으로 그의 삶과 죽음뿐만 아니라 그의 사상이 갖는 의미를 밝혀주고 있다.
__「옮긴이 서문」에서
블랑쇼는 『밝힐 수 없는 공동체』에서 바타유, 낭시와 함께 내재주의와 전체주의를 넘어서 있으며 전체의 고정된 계획을 갖고 있지 않은 공동체의 가능성을 찾는다. 공동체 없는 공동체의 가능성. 기구·조직·이념 바깥의, 동일성 바깥의 공동체의 가능성. “어떤 공동체도 이루지 못한 자들의 공동체”(바타유)의 가능성. 이러한 공동체에서 나와 타인의 관계 또는 나와 타인의 함께 있음은 개체의 확대로서의 전체의 실현이 아니며, 전체에 종속된 개체의 의식에 기초하지 않는다. 거기서 나와 타인의 관계는 양자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어떤 기준·동일성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거기서 나와 타인의 관계는 양자 모두가 소유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고정된 공동의 속성에 의해 성립되지 않는다. 나와 타인의 관계는 개체나 전체의 본질을 전제하지 않으며, 다만 관계 그 자체에 의해서만 발생하며 개체의 영역으로도, 전체의 영역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우리’의 존재를 드러낸다. ‘우리’의 존재, 공동-내의-존재, 즉 내가 타인을 향한 접근의 기호가 될 때, 내가 나의 고유한 내면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나의 내면적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오히려 나의 존재 자체가 관계 가운데 해소될 때, 그 순간에 가능한 ‘우리’의 존재, 외존(外存)ex-position을 통해 가능한 공유 내의 존재. 나의 존재 전체를 모두 내가 결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리는 내 바깥의 존재, 타자와의 소통, 타자로의 접근, 타자의 응답 가운데에서만 알려지는 관계 내에서의 존재, 나의 존재에로도 타자의 존재에로도 환원될 수 없는 공동의 영역을 알리는 ‘우리’의 존재. 블랑쇼는 『밝힐 수 없는 공동체』에서 ‘우리’의 존재를 죽음·문학·사랑의 예를 들어 보여준다. __옮긴이 해설, 「모리스 블랑쇼, 얼굴 없는 ‘사제’」에서
아마 낭시는 공동-내의-존재가 지금까지 한번도 제대로 사유된 적이 없이 망각 가운데 묻혀버렸다고 말할 것이다. 이제까지 나눔과 공동체라는 정치적 문제에 있어, ‘무엇’을 나눔과 ‘무엇’에 기초한, 또는 ‘무엇’을 위한 공동체만이 부각되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20세기에 소비에트를 중심으로 세계 전역에 걸쳐 진행된 마르크스주의 실험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었던 것은 하나의 ‘무엇’, 즉 재산의 공유(共有)였다. 나치는 열광적인 정치공동체를 이루었지만, 이는 공동의 이념적 ‘무엇’(반유대주의와 게르만 민족의 우월주의)의 기초를 바탕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어떤 공동체가 가시적 ‘무엇’(재산·국적·인종·종교·이데올로기)의 공유를 최고의 가치로 삼을 때, 그 공동체는 필연적으로 왜곡될 수밖에 없다. 왜곡, 말하자면 가시적이고 전유할 수 있는 동일성의 지배, 공동-내의-존재의 망각. 그 “무엇”에 따라 전개될 수 없고 그 ‘무엇’이 목적일 수 없는, 실존의 나눔의 망각, 함께-있음 자체의 망각. 하이데거는 우리가 존재자에 대한 이해와 소유라는 관심에 사로잡혀 존재망각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아마 낭시는 우리가 가시적인 ‘무엇’에 대한 공유 바깥의 나눔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관계에 기입되는 공동-내의-존재를 망각했다고 말할 것이다. 거기에 결국 낭시의 급진적이고 근본적인 정치적 물음이 있다. ‘우리’가 함께 있는, 함께 있어야 하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무엇’ 때문이 아니며, ‘무엇’을 나누기 위해서도 아니다(우리는 재산을 공유하기 위해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이 말은 재산을 나눈다는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가 함께 있는 궁극적 이유와 목적은 다만 함께 있다는 데에 있다. 함께 있음의 이유와 목적은 함께 있음 그 자체이다. 다만 함께 있기 위해 함께 있음, 즉 공동-내의-존재를 위한 함께 있음, ‘무엇’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음 자체를 나눔, 다시 말해 ‘나’와 타인의 실존 자체가 서로에게 부름과 응답이 됨, ‘우리’의 실존들의 접촉.
__옮긴이 해설, 「장-뤽 낭시와 공유, 소통에 관한 물음」에서
옮긴이 서문
밝힐 수 없는 공동체_모리스 블랑쇼
I. 부정(否定)의 공동체
II. 연인들의 공동체
옮긴이 해설 모리스 블랑쇼, 얼굴 없는 “사제”
마주한 공동체_장-뤽 낭시
옮긴이 해설 장-뤽 낭시와 공유, 소통에 대한 물음
부록 블랑쇼의 죽음
영원한 증인_자크 데리다
인간 블랑쇼에게 표하는 경의_장-뤽 낭시
모리스 블랑쇼·장-뤽 낭시 연보
모리스 블랑쇼·장-뤽 낭시 저서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