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을 휩쓰는 불길한 미신, 거대한 자연의 힘,
그리고 운명에 맞서는 인간의 의지가 부딪치는 강렬한 이야기
독일 사실주의 문학의 거장 테오도어 슈토름의 걸작 소설선
대산세계문학총서 마흔세번째 책으로 독일의 국민 작가 테오도어 슈토름의 소설선 『백마의 기사』가 발행되었다. 19세기에 활동한 테오도어 슈토름은 생전에 ‘전원 작가’ ‘향토 작가’라는 평가를 받으며 북독일의 향토적 정서를 잘 드러낸 작가로 자리매김 되었다. 그러나 화가와 음악가, 인형극 연희자와 수공업자, 빈민 들의 삶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소재를 다루었고 추리 소설, 연애 소설, 연대기 소설 등 형식적으로도 다양한 작품 세계를 선보이면서 격조 높고 풍부한 예술가적 성취를 이루었던 그는 사망 직전 발표한 「백마의 기사」로 독일 사실주의 문학의 거장으로 떠올랐다.
「백마의 기사」는 전설과 미신, 거대한 자연의 힘과 운명에 맞서는 인간의 의지가 부딪치며 팽팽한 긴장감을 형성하는 슈토름의 최고 걸작이다. 가난한 측량 기사의 아들 하우케 하이엔은 타고난 수학적 재능과 끈기를 바탕으로 제방 감독관의 위치에 오르게 되는, 기술의 진보와 이성적 세계관에 대한 믿음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 반대편에 보다 전통적인 세계관의 소유자들, 늘 자연의 위협에 시달리며 신화와 미신에 기울어진 바닷가 마을 사람들이 있다. 이 두 가치관이 부딪치며 갈등을 일으키는 가운데 자신의 고집과 독선으로 인해 마을 사람들의 반발을 이기지 못한 하이케 하우엔이 결국 쓰러져가는 이야기를 담은 이 소설은 강렬하고도 불길한 자연의 분위기가 작품 전체를 휩싸면서 마지막까지 긴장감을 늦추지 못하게 하고 있다. 1930년대 이후 50여 년에 걸쳐 독일 내에서만 네 차례나 영화와 TV 드라마로 만들어졌을 만큼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으며 현재까지도 청소년과 성인 모두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는 국민적인 작품이다.
두번째 작품 「꼭두각시패 폴레」 역시 다섯 차례에 걸쳐 드라마화, 영화화된 작품이며 슈토름의 시적 서정성과 정교한 플롯, 그리고 시민적인 미학이 조화를 이루는 작품이다. 애초에 청소년 소설의 집필을 의뢰받았던 슈토름은 청소년과 성인의 구별 없이 누구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뛰어난 성장소설을 창조해냈다. 인형극 연희자의 딸과 소년의 순수한 사랑 이야기를 산업화 초기의 독일 사회를 배경으로 애틋하게 묘사한 이 작품은 단순한 향토문학이 아니라 ‘신분이나 계급에 얽매이지 않고 인간 자체의 존엄성을 돌아볼 수 있는 곳으로서의 고향’과의 유대에 성공한 작품으로도 평가받고 있다. 작품 전반부에 소개되며 어린 소년 파울을 매혹시킨 「지그프리트 백작과 성 제노베바」 「파우스트 박사의 지옥행」 등의 인형극들은 독일 연극사의 중요한 코드들을 내포하고 있으며 당시 인형극 관람객들의 반응과 인형극 연희자의 최후를 통해 산업화 초기의 시민 삶의 변화 양상도 들여다볼 수 있다. ‘전원 작가’로 불리며 북독일의 고유한 정서와 ‘시적 사실주의’를 충실히 구현했던 슈토름의 대표작으로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번역되었다.
「백마의 기사」 줄거리
가난한 측량 기사의 아들 하우케 하이엔은 어려서부터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지만 지식인도, 한갓 농민도 될 수 없었던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과 같은 삶을 살아갈까봐 그가 더 공부를 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러나 하우케는 마을의 제방 감독관 집의 하인으로 들어가 수학적 재능을 살리게 되고 타고난 끈기를 발휘해 곧 중요한 제방 일들을 제방 감독관을 대신해 도맡게 된다. 제방 감독관의 딸 엘케와 사랑에 빠진 하우케는 감독관이 죽자 그녀와 결혼하게 되고 이어 제방 감독관의 위치에 오른다. 제방 감독관이 된 하우케는 자신이 가난한 집 출신이라는 열등감과 아내를 잘 얻은 덕에 제방 감독관이 되었다는 이야기에서 벗어나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곧 새 제방 공사를 시작하고 이 과정에서 많은 마을 사람들의 반대에 부닥친다. 제방 공사 중에 한 필의 남루한 백마를 사들이게 된 그는 곧 이 말을 훌륭히 키워 타고 다니며 자신의 위용을 드러내어 마을 사람들 사이에 ‘백마의 기사’로 불리게 된다. 새 제방이 완성되고 모든 것이 평화와 안정을 찾아가는 듯 보일 무렵 하우케는 새 제방에서 작은 흠을 발견하게 되고 제방을 잘못 건설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진다. 커다란 태풍이 몰려올 거라는 소문은 마을 사람들 사이에 퍼지는 불길한 미신들과 겹쳐 하우케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고 결국 태풍이 가져온 물난리로 인해 옛 제방이 무너지고 만다. 태풍 속에서 하우케를 찾으러 나온 엘케와 그들의 아이가 탄 마차는 바닷속으로 사라지고 그 광경을 본 하우케도 바닷속으로 뛰어든다.
「꼭두각시패 폴레」 줄거리
수공업 장인인 파울 파울젠은 ‘꼭두각시패 폴레’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어린 시절 마을에 공연을 하러 찾아온 인형극 연희자 텐들러 씨 가족과 알게 된 파울은 인형극의 황홀한 세계에 깊이 빠지게 되고 텐들러 씨의 딸인 리자이와도 친구가 된다. 그들 가족의 소중한 인형인 카스퍼를 망가뜨린 일, 리자이에게 책을 읽어준 일, 파울의 어머니가 리자이에게 겨울 코트를 만들어주신 일 등 인형극 연희자 가족은 파울에게 소중한 추억과 아쉬움을 남기고 다시 유랑 생활에 들어간다. 성장한 파울은 아버지의 대를 이어 수공업 장인이 되기 위해 외지로 나와 일을 하던 중 우연히 억울한 누명을 쓴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애쓰는 젊은 처녀를 발견하게 되고 그녀가 옛날의 리자이임을 알게 된다. 파울은 리자이와의 결혼을 결심하고 그녀의 아버지까지 모시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리자이를 위해 파울을 따라온 장인이었지만 그는 끝내 인형극을 포기하지 못하고 어느 날 새로이 인형극을 공연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옛날의 영화를 되찾지 못하고 늙은 연희자의 인형극은 소동 속에 막을 내리고 신분 차가 나는 인형극 연희자와 결혼한 파울에게도 ‘꼭두각시패 폴레(‘파울’의 저지 독일어 발음)’라는 모욕적인 언사가 따른다. 힘을 잃은 장인은 소중히 간직했던 인형마저 다 팔아버리고 이어 죽음을 맞게 된다. 이 모든 일을 슬픔과 아름다움으로 간직한 파울 파울젠 부부는 평화로운 나날을 살아간다.
■책 속에서
그때 제방 저편에서 무엇인가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사방은 쥐죽은 듯 고요했지만 반달이 희미한 빛을 내보내자 거무스름한 형체는 점점 뚜렷해졌다. 가까이서 보니 그것은 다리가 긴 깡마른 백마 위에 앉아 있었다. 어깨 언저리로 짙은 외투를 펄럭이며 내 곁을 휙 스쳐가는 그의 창백한 얼굴에서 타는 듯한 두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였을까? 여기서 뭘 하는 거지?’ 그제서야 나는 내가 말발굽 소리도 말의 헐떡임 소리조차도 듣지 못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말과 기사가 바로 곁을 스쳐갔는데도! 의혹에 잠긴 채 나는 계속해서 말을 달렸다. 그러나 오래 생각할 틈도 없이 그가 등 뒤에서 나타나 나를 다시 스쳐갔다. 이번에는 휘날리는 외투가 몸을 스치기까지 한 것 같았지만, 그는 역시 처음처럼 소리없이 지나갔다. 그리고는 점점 멀어져가던 말과 기사의 그림자가 갑자기 제방 안쪽에서 어른거리는 듯했다.
나는 다소 주춤하며 그들의 뒤를 쫓아 말을 타고 내려가 보았다.
─「백마의 기사」에서
“잘 있거라, 얘야! 착하게 지내고 어머니, 아버지께 고맙다고 인사 전해드리거라!”
“안녕! 안녕!”
리자이도 외쳤다. 말이 달리기 시작하자 목에 달린 방울이 쩔렁거렸다. 리자이의 작은 손이 내 손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기 무섭게 그들은 먼 나라로 사라져갔다.
나는 다시 언덕길을 올라가 먼지를 일으키며 모래 속으로 사라져가는 작은 마차를 꼼짝 않고 바라보았다. 방울 짤랑거리는 소리는 점점 희미해져갔다. 흰 수건이 다시 한번 궤짝 위에서 펄럭이더니 서서히 모든 것이 가을 안개 속으로 사라져갔다.
그러자, 억누를 수 없는 공포감에 나는 심장이 털썩 주저앉는 것 같았다.
‘다시는 그녀를 볼 수 없을 거야! 다시는!’
“리자이!”
나는 큰 소리로 불러보았다.
“리자이!”
그러나 그와는 아랑곳없이, 길이 구부러지는 탓인지 그나마 안개 속에서 너울너울 춤추는 점처럼 보이던 마차도 내 눈 앞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나는 미친 듯 그 길을 따라 뛰고 있었다. 바람에 모자가 날아가고 장화 안으로 모래가 가득 들어왔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도 보이는 것은 나무 한 그루 없이 거친 황무지와 그 위로 드리워진 냉랭한 회색 하늘뿐이었다.
저물 녘에 겨우 집에 이르자 시 전체가 죽어버린 것 같았다. 그것이 바로 내 인생의 첫 이별이었다.
─「꼭두각시패 폴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