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화와 산업화에 소외된 우리의 삶에 대한 아름답고 애절한 절창(絶唱)
‘우리 모두가 돌아가야 할 길’에 관해 시인이 마지막으로 남긴 이야기들
“이 시집은 역사상 가장 파괴적이고 어리석은 이 시대에 있어서 가장 근원적이면서도 지금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_김종철(『녹색평론』 발행인)
끝없이 소외당해온 사람들의 일상과 그 내면을 깊은 연민과 공감 속에서 애절하게, 때로는 해학적으로 묘파하는 뛰어난 시들을 선보였던 고 윤중호 시인의 유고 시집 『고향 길』이 문학과지성사에서 발행되었다. 고인의 타계 1주기를 맞아 발행된 이 시집은 근대화와 산업화 속에 소외된 고향의 모습과 우리의 삶에 대해 근본적으로 성찰하는 드문 시적 성취를 보여준다.
이 시집은 고인이 2004년 12월 말 어머니의 칠순에 맞추어 출간을 준비 중이었다. 그러나 2004년 9월 안타깝게 시인이 운명함으로써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가 지인들이 뜻을 모아 새로이 출간 계획을 세우게 되었고 이 소식을 알게 된 문학과지성사에서 선뜻 유고 시집 발간을 맡음으로써 8월 20일 고인의 1주기에 즈음하여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고인의 친우이자 온누리출판사 대표인 김용항씨가 유고를 문학과지성사에 전달하였고 출간 과정에서의 책임 교정은 고인과 문학 활동을 같이하였던 채진홍씨가 맡았으며 시집의 발문은 『녹색평론』의 김종철 선생이 맡았다. 이 시집은 그러므로 생전의 시인과 그의 문학을 소중히 하던 사람들이 고인을 기억하며 길이 되새기고자 하는 커다란 마음의 산물이기도 하다.
생전에 고인의 은사였으며 오랜 친분을 나눈 김종철(『녹색평론』 발행인)은 발문에서 이 시집을 ‘우리 모두 돌아가야 할 길’에 대한 절절한 이야기로 요약하고 있다. 시집 『고향 길』은 단순한 고향상실을 노래하는 또 하나의 상투적인 노스탤지어 문학이 아니다. 시인이 고향과 고향 사람들의 삶과 죽음의 이야기로 회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근대적 도시생활의 피로와 고통에서 일시적인 탈출을 통하여 위안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날이 훼손되어가는 우리들의 삶의 본연의 모습을 기억하고자 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기억을 위한 노력은 당연히 소박한 인간성을 옹호하고자 하는 시인의 뿌리 깊은 본능에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집은 고향을 노래하되 퇴행으로서의 고향이 아닌 ‘삶의 원형’으로서 이를 다시 끌어올리려는 깊은 울림의 언어들로 이루어져 있다. 시인이 궁극적으로 발견하여 이루고자 했던 시의 모습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외갓집이 있는 구 장터에서 오 리쯤 떨어진 九美집 행랑채에서 어린 아우와 접방살이를 하시던 엄니가, 아플 틈도 없이 한 달에 한 켤레씩 신발이 다 해지게 걸어 다녔다는 그 막막한 행상길.
입술이 바짝 탄 하루가 터덜터덜 돌아와 잠드는 낮은 집 지붕에는 어정스럽게도 수세미꽃이 노랗게 피었습니다.
강 안개 뒹구는 이른 봄 새벽부터, 그림자도 길도 얼어버린 겨울 그믐밤까지, 끝없이 내빼는 신작로를, 무슨 신명으로 질수심이 걸어서, 이제는 겨울바람에, 홀로 센머리를 날리는 우리 엄니의 모진 세월.
덧없어, 참 덧없어서 눈물겹게 아름다운 지친 행상길. ─「詩」전문
시인도 당대의 다른 많은 ‘지식인들’과 같이 “한때는 칼날 같은 세상의 경계에 서고 싶은 적이 있었다. 자유라는 말, 정의라는 말, 노동이라는 말, 그리고 살만한 세상이라는 말, 그 날 위에 서서 스스로 채찍질하며 고개 숙여 몸을 던져도 좋다고 생각했다.”(「영목에서」) 그러나, “이제 이 나이가 되어서야, 지게 작대기 장단이 그리운 이 나이가 되어서야, 고향은 너무 멀고, 그리운 사람들 하나 둘 비탈에 묻힌 이 나이가 되어서야, 돌아갈 길이 보인다”(「영목에서」)고 시인은 말한다. 그 길은 “아무것도 이룬 바 없으나, 흔적 없어 아름다운 사람의 길” 즉, 이름 없는 우리들의 고향 사람들이 살고 돌아간 길이다.
산딸기가 무리져 익어가는 곳을 알고 있다.
찔레 새순을 먹던 산길과
삘기가 지천에 깔린 들길과
장마 진 뒤에, 아침 햇살처럼, 은피라미떼가 거슬러 오르던 물길을
알고 있다. 그 길을 알고 있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넘실넘실 춤추는 꽃상여 타고 가시던
길, 뒷구리 가는 길, 할아버지 무덤가로 가는 길
한철이 아저씨가 먼저 돌아간 부인을 지게에 싣고, 타박타박 아무도 모르게 밤길을 되짚어 걸어간 길
웃말 지나 왜골 퉁정골 지나 당재 너머
순한 바람 되어 헉헉대며 오르는 길, 그 길을 따라
송송송송 하얀 들꽃 무리 한 움큼씩 자라는 길, 그 길을 따라
수줍은 담배꽃 발갛게 달아오르는 길
우리 모두 돌아갈 길
그 길이 참 아득하다. ─「고향 길 1」 전문
시인은 이름 없는 사람들의 지나간 ‘모진 세월’을 따뜻하게 보듬으면서도 대도시의 아파트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삶을 깊이 성찰한다. 주말 농장, 농촌 관광, 유기농, 웰빙과 같이 우리가 슬기롭게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방식들이 실은 근본에서부터 뒤틀린 것이며 나아가서 산업주의 문화에서 파생한 갖가지 위기를 그런 식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사고방식 자체가 이미 근원적으로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인식이 시집 곳곳에서 드러난다. 시인은 “이 세상이 진보라는 이름으로 쌓아 올린 여러 가지 혜택이 결국은 우리 모두를, 이 땅 위에서 살고 있는 모든 생명을 망가지게 할 것이라는 걸, 이론이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그런”(「발문: 우리가 모두 돌아가야 할 길」) 사람이었다.
사람을 아끼는 게 제일이라는 믿음으로 사회의 밑바닥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에서 행복을 느낀 철저한 ‘비근대인’이었던 시인 윤중호가 남긴 마지막 시집은 사라져가는 고향의 모습, 삶에 대한 애절함에 있어 백석과 신경림의 맥을 이으면서도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진경을 보여준다. 뛰어난 문학성과 사람에 대한 뜨거운 마음을 다 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시인 자신이 살아온 삶과 돌아간 길, 그리고 우리의 삶을 위해 잊지 말고 되돌아보아야 할 것들이 이 시집에 모두 담겨 있다.
어릴 때는 차라리, 집도 절도 피붙이도 없는 처량한 신세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뜬구름처럼 아무 걸림 없이 떠돌다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때는 칼날 같은 세상의 경계에 서고 싶은 적이 있었다. 자유라는 말, 정의라는 말, 노동이라는 말, 그리고 살 만한 세상이라는 말, 그 날 위에 서서 스스로 채찍질하며 고개 숙여 몸을 던져도 좋다고 생각했다.
한때는 귀신이 펑펑 울 그런 해원의 詩를 쓰고 싶었다. 천년의 세월에도 닳지 않을, 언듯 주는 눈길에도 수만 번의 인연을 떠올려 서로의 묵은 업장을 눈물로 녹이는 그런 詩.
이제 이 나이가 되어서야, 지게작대기 장단이 그리운 이 나이가 되어서야, 고향은 너무 멀고 그리운 사람들 하나 둘 비탈에 묻힌 이 나이가 되어서야, 돌아갈 길이 보인다.
대천 뱃길 끊긴 영목에서 보면, 서해 바다 통째로 하늘을 보듬고 서서 토해내는 그리운 노을을 가르며 날아가는 갈매기.
아무것도 이룬 바 없으나, 흔적 없어 아름다운 사람의 길,
어두워질수록 더욱 또렷해. ─「영목에서」 전문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시
詩
영목에서
고향, 또는 늦봄 오후
그해 가을
봄비
올해는
겨울비
고향, 옛집에서
제2부 고향 길
고향 길 1
고향 길 2
회인 가는 길
졸린 하루
遠同里 獨居老人 朴氏어르신
전댕이 할머니
황새말 당산나무 할아버지
노루목 우리 김형
경은이 성님
엎드려 절하며 쓰는 글
봄날에 기대어
구장터 외갓집
성골마을 대보름날
기찻길 옆 애호박
다시 금강에서
꽃사과나무꽃
하지 감자
제3부 입적
入寂
거미는 평생 길을 만든다
균열
능금
초파일 연등제
立春
아지랑이
大寂殿 앞에서
운문사에서
雲柱寺
불두화
頭陀山
向日庵
제4부 일산에서
일산에서
텃밭에서 1
텃밭에서 2
완두콩
열무꽃
봄
배추벌레
치과에서
임진강에서
金昭晉路에서
대변항에서
자유로에서 1
자유로에서 2
자유로에서 3
마두1동 참새
백마역 앞 느티나무 세 그루
노숙자 김대봉씨의 겨울
나헌티는 책음감 있이 살라구 허시등만
광부의 딸 김옥림씨
늙은 초빠이의 노래
발문|우리가 모두 돌아가야 할 길·김종철
연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