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조와 탐색으로 쌓아올린 명징한 언어의 세계
21세기 한국 시의 경이로운 경관
표현 미학의 한 경지 ‥ 존재의 잔상 혹은 죽음의 성찰 ‥ 시간 의식의 새로운 차원(이숭원, 문학평론가)
“손짓과 표정 사이에 시간을 섞어 그대에게 들키는 내 침묵의 전언”
이순의 문턱에 당도해 이제 시력 30년을 훌쩍 넘긴 시인 김명인의 여덟번째 시집 『파문』(문학과지성사, 2005)이 출간됐다.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문단에 등단(1973)한 지 어느덧 서른두 해째를 맞고 있는 김명인은,. 첫 시집 『동두천』(1979)을 상자한 이후 평균 3년에서 5년의 간격을 두고 꾸준히 시집을 발표해왔다.
김명인은 잘 알려진 대로, 주관적 감정을 토로하는 시인이 아니다. 세심하게 시어를 운용하여 작품의 결을 직조해가는 시인이다. 다시 말해, 내밀하고 정제된 언어로 물결따라 이어지는 사색의 항로를 그리고 있다. 때문에 그의 시어는 힘찬 기운을 품고 있으면서도 허무와 극복이란 감정의 극단 그 중간쯤에 자리잡고서 생의 상처, 세상사의 애환을 있는 그대로 옮기되 삶의 진실을 탐색하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김명인의 시가 하나의 사물, 한곳의 장소에 붙박이기보다 길 위 혹은 어느 강가와 바닷가를 떠도는 편을 택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출렁거리던 나날의 어디 움푹 꺼져버린
삶의 세목들을 허허로운 수평으로 복원하려 한다면
내 주전자인 바다는 처음부터 이 무료를
들끓이려고 작정했던 것
행락은 끊겼는데 밤만 되면 선착장 난간 위로
별들의 폭죽 떠들썩하다 밤 파도로도 한 겹씩
잠자리를 깔다보면 하루가 푹신하게 접히지
그러니 뿌리치지 못하는 미련이라도 너의 계획은
며칠 더 어긋나면서 이 무료를
마침내 완성시켜야 한다 지상에서는 무료만큼
홀로 값싼 포만 또한 없을 것이니!
―「무료한 체류」 부분
김명인의 앞선 시집들이 그러했듯, 이번 시집 역시 문학의 가장 본질적 주제인 삶과 죽음의 문제에 부딪쳐 자신의 몸과 언어를 실험 대상으로 내세우고 형이상학적 탐구를 벌이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실험의 동반자는 익숙한 바다, 바람, 파도, 파문, 포구의 선술집, 방파제에서 꽃나무, 꽃뱀, 산사 그리고 낯선 이국의 호텔까지 다양하다. 이들과 함께 삶의 표피와 죽음의 속살 사이에서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문제에 맞서면서 자연스럽게 시간의 존재감 혹은 시간의 흐름에 천착하고 급기야 시간을 사물화하기에 이른다.
그녀의 소문난 억척처럼
좁은 미용실을 꽉 채우던 예전의 수다와 같은
공기는 아직도 끊을 수 없는 연줄로 남아서
저 배는 변화무쌍한 유행을 머릿결로 타고 넘으며
갈 데까지 흘러갈 것이다 그동안
세헤라자데는 쉴 틈 없이 입술을 달싹이면서
얼마나 고단하게 인생을 노 저을 것인가
자꾸만 자라나는 머리카락으로는
나는 어떤 아름다움이 시대의 기준인지 어림할 수 없겠다
다만 거품을 넣을 때 잔뜩 부풀린 머리끝까지
하루의 피곤이 빼곡히 들어찼는지
아, 하고 입을 벌리면 저렇게 쏟아져 나오다가도
손바닥에 가로막히면 금방 풀이 죽어버리는
시간이라는 하품을 나는 보고 있다!
―「조이미용실」 부분
한편 고통스러운 내면의 어둠 속에 함몰되거나 주저앉지 않고 대신 스스로를 호되게 채찍질하고 단련해온 시인만이 쓸 수 있는 지극한 깨달음이 그가 긴장감으로 길어올린 시어 하나하나에 배 있다. ‘개성적 비유와 정밀한 묘사의 정신이 결합하여 삶의 표층과 이면을 하나의 화폭 안에 잔상처럼 펼쳐내는 독특한 표현 미학’은 김명인 시인이 한국 시단에 새긴 두드러진 이정표일 것이다.
바닥 없는 적요 속으로 피어올랐던 꽃뱀의 시간이
문앞에서 순식간에 제 사족을 지워버렸다
아직도 한순간을 지탱하는 잔상이라면
연필 한 자루로 이어놓으려던 파문 빨리 거둬들이자
잘린 무늬들 그 허술한 기억 속에는
아무리 메워도 메워지지 않는
말의 블랙홀이 있다 마주친 순간에는 꽃잎이던
허기진 낙화의 심상이여!
―「꽃뱀」 부분
아직은 제 풍경을 거둘 때 아니라는 듯
들판에서 산 쪽을 보면 그쪽 기슭이
환한 저녁의 깊숙한 바깥이 되어 있다
어딘가 활활 불 피운 단풍 숲 있어 그 불 곁으로
새들 자꾸만 날아가는가
늦가을이라면 어느새 꺼져버린 불씨도 있으니
그 먼 데까지 지쳐서 언 발 적신들
녹이지 못하는 울음소리 오래오래 오한에 떨리라
새 날갯짓으로 시절을 분간하는 것은
앞서 걸어간 해와 뒤미처 당도하는 달이
지척 간에 얼룩지우는 파문이 가을의 심금임을
비로소 깨닫는 일
하여 바삐 집으로 돌아가면서도
같은 하늘에서 함께 부스럭대는 해와 달을
밤과 죽음의 근심 밖으로 잠깐 튕겨두어도 좋겠다
조금 일찍 당도한 오늘 저녁의 서리가
남은 온기를 다 덮지 못한다면
구둘 한 장 넓이만큼 마음을 덥혀놓고
눈물 글썽거리더라도 들판 저쪽을
캄캄해질 때까지 바라봐야 하지 않겠느냐
―「따뜻한 적막」 전문
■시인의 말
두어 달 嚴冬을 바닷가 시골집에서 야산의 고사목을 잘라 군불 지피며 갯바위에 올라 낚시나 하면서 살았다. 저녁 늦게까지 들리지 않던 파도 소리가 자정 넘겨 점차 스산해져가는 것을, 잠귀에 고여 오면 뒤척거려 쏟아버리곤 했다. 그러고 보니 오랫동안 그 비몽사몽간에 내 자각을 세워두었던 것 같다. 애써 의식하지 않았으므로 이 적요 길게 이어질 듯 하다.
■시인의 산문(뒤표지)
질문하고 대답하면서 수많은 생각들을 포개고 허물었다. ‘가장 요구가 없는 詩’와 함께했던 이 물리칠 수 없었던 시간이 隔絶의 골짜기로 나를 몰고 갔던가. 적층을 흩어야 비로소 지나가는 이 협곡 어딘가 그러나 발원이 범람과 맞닿는 기적이 있어 어제 흘렀던 강물 오늘도 첫물로 흘러든다.
시인의 말
꽃뱀
조이미용실
얼음물고기
산 아래
장엄 미사
향나무 일기장
꽃을 위한 노트
기억들
배꽃 江
외로움이 미끼
집
무료한 체류
분수
가다랑어
맨홀
달의 뒤쪽
아직도 누군가 서성거린다
바다 광산
말들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간 것일까
흐르는 물에도 뿌리가 있다
매물에 들다
바람 耕作
滿潮
가두리
봄 산
消燈
구멍
울타리
우물
신발
길
빨래
하노이 대우 라운지
복날
한치
오동나무 배
마늘
절 아래 酒幕
잠의 힘으로 가는 버스
우뭇가사리
캄보디아 호텔
심해물고기
봄꽃나무
식목
모과
門
구름정거장
찰옥수수
석류
고복저수지
따뜻한 적막
해설|꽃뱀의 환각, 절정의 시간들·이숭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