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독서하기=침묵하기=사랑하기”라는 삶의 새로운 공식을 깨우쳐준
세계 현대 문학계의 보석 같은 존재, 파스칼 키냐르.
그가 들려주는 소설 같은 동화, 동화 같은 소설!
그의 사유의 깊이에 탄복하고, 언어의 아름다움에 매혹된다…
“내게는 늘 강이 필요해요. 흐르는 강물을 보며 작업합니다. 나는 내가 쓰는 글이, 비록 단장(斷章)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저 강물처럼 융합되어 흐르기를 바랍니다.”_Pascal Quignard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은 2003년 발간된 『떠도는 그림자들』(2002년 프랑스 공쿠르 상 수상작) 이후 2년 만에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되는 키냐르의 동화 같은 소설, 에세이 같은 동화이다.
144쪽의 비교적 짧은 분량으로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이 작은 책은, 일찍이 2003년 번역자 송의경씨가 키냐르를 만나러 프랑스에 갔을 때, 작가 자신이 “가장 아끼는 장르인 동화에 자신의 내밀한 고백”을 담은 귀한 텍스트라고 강력 추천했던 작품이다. 짧은 이야기 속에 감춰진 의미와 풍부한 상상력을 담아내는 꿈의 장르, 동화.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에서 키냐르는 다름 아닌 이 동화를 선택해 삶의 철학과 도덕, 인간의 원초적 욕망과 육체적 성(性)이 충돌하여 발산시키는 슬픔과 기쁨, 절망과 환희를 환상적으로 조율해냈고, 자기 글쓰기의 본질이자 특장인 또 하나의 색다른 소설 세계를 구축해냈다. 한 편의 신화 같은 이야기로 순식간에 독자를 사로잡아버리는 키냐르는 이로써 다시 한 번, ‘살아 있는 프랑스 문단의 최고의 지성’으로 우리 뇌리에 깊게 각인될 것이다. 한편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은 앞서 말한 동화라는 장르적 속성과 예의 단장(斷章) 형식의 에세이, 그리고 신화와 전설이 적절이 스미면서 작가 자신의 과거를 고백한 성적(性的) 메타포로 긴밀히 압축되어 있어서, 스탕달의 『연애론』 이후, ‘사랑’에 관한 가장 독특한 담론을 담아 일약 키냐르 독서 열풍을 낳았던 『은밀한 생』(문학과지성사, 2001)과 함께 키냐르의 문학 세계를 탐색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가장 편안한 안내서 역할을 해줄 것이다.
이 책은 ‘문학 창조’에 관한 동화와 에세이로 이루어져 있다. 총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번째 「아이슬란드의 혹한」에서는 ‘언어를 기억하지 못해 일어나게 되는 사건을 다룬 어떤 동화’를 쓰게 된 경위를 말한다.
두번째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은 그 동화의 내용이다. 시간과 장소가 명확하지 않고 대신 신화와 전설, 명부와 내세에 대한 믿음이 지배적인 땅, ‘디브’라 불리는 마을에 아름다운 용모의 청년 재봉사 ‘죈느’가 살고 있다. 그리고 이웃에는 그에 대한 사랑이 깊어 결혼을 열망하는 실 잣는 처녀 ‘콜브륀’이 있다. 마침내 콜브륀은 용기를 내어 죈느에게 청혼하고 이에 죈느는 한 가지 조건을 내건다. 자신이 지닌 화려한 벨트와 똑같은 것을 만들어달라고. 연일 밤을 새워가며 화려한 수가 놓인 그 벨트를 만들고자 콜브륀은 애쓰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매일 밤 신께 기도하며 절망으로 몸부림치던 콜브륀 앞에 낯선 영주가 등장한다. 그녀의 가슴 아픈 사연을 전해들은 그 영주는 자신의 이름 ‘아이드비크 드 엘’이란 이름을 기억해주는 대가로 마침 자신이 가지고 있던 똑같은 벨트 장식을 선뜻 건네준다. 다음 날, 콜브륀과 죈느는 마을 사람 모두의 축복 속에 결혼식을 올리고 하루하루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그러고 아홉 달이 지나갈 무렵, 콜브륀은 문득 결혼 전 자신이 이름을 기억하겠노라 약조한 그 영주와의 인연을 떠올린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고 다만 혀끝에서 맴돌 뿐이다. 이로부터 죈느와의 꿈같은 결혼 생활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식사를 거르고 잠을 못 이루고 집안일은커녕 모든 일상생활을 거부한 채 하루하루 여위어만 가는 콜브륀을 바라보는 남편 죈느의 마음 또한 갈갈이 찢긴다. 결국 그 이유를 알아낸 죈느는 아내가 잃어버린 그 영주의 이름을 찾기 위해 지옥으로의 여행을 떠난다.
세번째 「메두사에 관한 소론(小論)」에서 ‘나’(키냐르)의 유년기에 관한 자전적 이야기―언어, 침묵과 관련된―에 이어서, 이 동화에 자신이 16세 때 또다시 자폐증에 걸렸던 비밀이 들어 있다고 전제한 뒤, 다시 총 5부로 나누어 키냐르 자신의 시론(詩論)과 삶의 철학을 이야기한다. 즉, “망각은 기억 상실과는 다르다. 망각으로 인해 우리는 자신의 기원을 공백으로 만들어버린다. 이를 치유하기 위한 방편으로 글쓰기가 있다. 글쓰기는 말을 찾아내기, 잃어버린 목소리를 듣기,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을 준비하기, 혹은 사정(射精)하기와 동일한 것이다. 시(詩)는 오르가슴이며, 찾아낸 이름이자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의 반대편에 있는 엑스터시”이다.
■차례
아이슬란드의 혹한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
메두사에 관한 소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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