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적인 동시에 감각적이고, 기괴하며 아름다운 세계의 소유자인 시인 이성미의 첫 시집이 문학과지성사에서 발행되었다.
1996년부터 2004년까지 8년 동안 쓴 시들을 모은 이 시집은 매우 참신하면서도 탄탄한 시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시인의 첫 시집이다. 이 시집을 ‘변형하는 정신과 상상하는 육체의 변증법’의 미학 세계라고 명명한 김정환은 해설에서 이성미의 시들이 ‘상상력의 주체는 흔히 정신이고, 육체는 변형의 주체거나 대상’이라는 이분법을 무너뜨리고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고 말하고 있다.
이성미의 시들은 무엇보다도 경쾌하다. 그러나 이 경쾌함이 그리는 것은 세계의 경쾌함이 아니다. 전복적이면서도 자연성과 도시성을 동시에 띠고 있는 육체의 상상력은 ‘황금빛 이파리’로 대변되는 생의 아름다움을 빚어내지만 그 이면에는 현실이라는 끔찍한 악몽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시인의 시에 펼쳐진 악몽들은 ‘생애를 닮은 심화(深化)’를 통해 현대적인 아름다움으로 형상화되며 도리어 치유적인 양상마저 띠고 있다.
건널목 앞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입 안 가득 꽃잎을 물고
달리는 차를 보고만 있었는데 밟히는
아스팔트를 동정하고 있었는데 혁명이 내 정수리에
깃발을
꽂더니
빨간 불
인데도 길을 건너가버렸습니다 나는 따라
건너다가 신호등이 고장나
길 한가운데 노란 선을 밟고 섰는데
꽃잎을 웩웩 토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트럭 위입니다
트럭은 가만 있는데 세상이 휙휙 지나가면서 클랙슨을
울리고 욕을 해댔습니다 남자가 올라타 트럭을 몰고
그곳을 빠져나왔는데
그러고 보니 없습니다
뛰어내렸는지 내가 밀어냈는지 아니면 내가 트럭을 버렸는지
나는 그냥 개흙탕물
옆에 섰습니다
아이가 하나
둘
셋
떠내려갑니다 할머니가 건져 올려
키웠습니다 나를 찾아와 니가 엄마냐 너도 엄마냐
할 것입니다 그때 할머니가 나타나
얘야, 가자 내가 에미다
할 것입니다
아이의 아장걸음이 나를 앞서갑니다 나는 마구 달렸습니다
넘어진 나를
시간이 밟고 갑니다 그리고 무언가 또 휙휙
지나가고 기억만 남았습니다
나만 남았습니다
─「휙휙」 전문
20세기 문명의 야만과 공포를 현대적 아름다움 혹은 두려움으로 형상화한 것은 바르토크와 브리튼의 음악, 릴케 시, 그리고 카프카 소설 이래 매우 드물다. 김정환은 이 계보에 이 시집을 추가하며 시인의 ‘동화들’에서 끔찍함조차 발랄함으로 가볍게 바꾸는 시인의 상상력을 읽어낸다.
검은 숲 속을 달음질치며
노란 눈을 번득이던 너는
태양과 암흑의 자식
동쪽에서 그가 왔다
그는 네가 살던 숲을 베어버렸다
너는 도망쳐 숲을 다시 세웠다
너는 북극으로 가 얼음집을 짓고 숨었다
그는 봄바람을 불어 녹여버렸다
그가 너를 독수리처럼 낚아채
하얀 빛 속으로
집어던졌다 ─「일식」 전문
시인은 또한 ‘침묵’과 ‘말하기’ 사이를 집요하게 파고들며 “나는 쓴다”고 선언한다. 소리와 침묵 ‘사이’에 음악이 있듯, 시는 침묵과 말하기 ‘사이’에 있고, 그러므로 시인이 ‘침묵과 말하기 사이’를 노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 ‘사이’는 ‘사이’라고 말하는 순간, ‘말하는 것’이 되는 사이이고, 그냥 입을 닫는 순간 침묵으로 굳어버리는 ‘사이’다. 숱한 시인들이 ‘사이’를 노렸으되 ‘사이’ 속으로 파고들지 못하고, ‘말하는 것’ 아니면 ‘침묵’으로 전락했다. 이성미가 파고든 이 ‘사이’는 중력을 벗어난 지점에 존재한다. 어울릴 수 없는 이미지들의 병치는 혁명과 전복을 넘어 쾌락과 유희로 흐른다. 이 사이의 균형을 잡아주는 것은 맑고 단정하게 형상화된 슬픔과 고통의 감각들이다. 이러한 시인의 ‘침묵과 말하기 사이’가 가장 잘 드러난 시가 바로 「붉은」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혁명의 절망을 아름답고 깔끔한 악몽의 이성적 서정으로 갈무리했다. 김정환은 해설에서 종종 이성미의 시를 김수영의 시와 비교하고 있으며, 그가 김수영을 잇는 시인 중 한 명으로 그녀를 꼽기 주저하지 않는 것은 그녀가 지극히 예민한 상상력을 갖춘 동시에 인간 사회의 절망과 악몽을 이성적으로 갈무리하는 감각의 소유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무거우나 끝내 발랄하고, 튼튼하지만 끝내 그 안에 허물어짐과 비어 있음을 포괄하는 시인의 세계는 ‘변형하는 정신과 상상하는 육체’가 꿈꾸는 다음 시들을 기대하게 만든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삶
바람은 달려가고
연인들은 헤어지고
빌딩은 자라난다
송아지는 태어나고
늙은 개는 숨을 거두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찻잔에 물이 잔잔하고
네 앞에 시 한 편이 완성되어 있을 때 ─「네가 꿈꾸는 것은」 전문
▨시인의 말
제1부 침묵과 말하기 사이
입을 다물다
비밀
밤길
허무
불안
꽃잎과 바위와 나비와 어깨
화내고 있다
회전목마
견딜 수 없는, 견디고 있는
네가 꿈꾸는 것은
봄이 오면
청춘
낮잠
비
에밀리 디킨슨
Ars Poetica
뒷모습
기차를 놓친 사람들
너무 오래 머물렀을 때
제2부 베일 뒤의 거인
나는 쓴다
벼락
봄
고요한 밤
관계
크리스마스 아침
눈밭
당신과 물통
금
빈둥거리다가
보슬비
광장
달과 돌
청춘
지퍼가 열린
일식
일식 이후
사랑의 개념
제3부 나의 세탁소
굴러나갔다
해가 저물 때 잠이 들려고 할 때 잠에서 깰 때
자전거랑 왜 그랬을까
휙휙
선인장
단단한 뼈가 되어 잠들다
방문
철교
붉은
어중간하게
풀씨는 왜 자꾸 들어오고
이상한 로맨스1
이상한 로맨스2
이것도 로맨스
지푸라기
벽과 못
▨해설·변형하는 정신과 상상하는 육체의 변증법·김정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