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천야록』 번역과 그 의미
『매천야록』은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이 엮은 구한말 시기의 정치, 사회 등 제반 사정을 취재, 정리한 기록물이다. 기록 시기도 1864년부터 1910년까지이며 다룬 대상도 정치, 사회, 문화에 이르기까지 그 분량과 편폭이 방대하다. 비슷한 시기 유길준의 『서유견문(西遊見聞)』이 서구 열강의 근대체제의 면모를 소개한 것이라면, 이 『매천야록』은 국내의 개항, 개화,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한반도 진출 등 국내의 당시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였다. 따라서 두 작품은 이른바 근대전환기 정치, 사회 변동을 이해하는 데 동전의 양면으로 기능한다 하겠다.
작자 황현은 1910년 한일합방과 함께, 즉 구왕조의 멸망과 함께 자결한 구지식인 계열의 애국지사이다. 흔히 ‘위정척사’ 계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낙향해서 3천 권이 넘는 책을 쌓아두고 신지식을 호흡하고자 열성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대의 신매체인 신문, 잡지 등의 탐독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런 학문적 경향 때문에 순전한 위정척사파가 아니었다. 비록 구지식으로 무장한 그였지만 근대전환기의 신지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사실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자세를 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식자인’으로서 시대에 대한 안목과 비판의식을 놓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작품을 남길 수 있었다.
조수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오.
무궁화 이 세계는 망하고 말았구려.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지난 역사 헤아리니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되기 어렵기도 합니다.
(매천 황현의 「절명시」 중 제3수)
『매천야록』은 첫 들머리를 운현궁에서 시작하여 대한제국이 일본제국에 병탄을 당한 일에서 종결된다. 운현궁이란 대원군 저택으로서 고종의 용비(龍飛)와 함께 대원군의 10년 세도가 집행되던 현실적·상징적 의미가 뚜렷한 공간이다. 그런 만큼 삼남에 걸친 민란으로 한 시대가 마감되면서 개막된 역사의 첫 무대로서 운현궁을 클로즈업시킨 셈이다.
이 대역사극은 종막에 매천 개인의 「절명시」 4수를 써놓았다. 얼핏 보아 앞뒤의 균형을 잃은 모양이다. 합병조칙이 공포된 이후 몇 조목은 매천의 제자가 추기(追記)한 것인데 이 대목은 아무래도 사족(蛇足)으로 간주할 수 없을 터이다. 어디까지나 그 자체의 성격이 공적차원의 역사서가 아닌 필기적 역사임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개성적인 역사인식으로 글쓰기를 한 결과물임을 그 종결부에서 분명히 보여주는 바 『매천야록』이 비극적인 것임을 각인시키고 있다 하겠다.
『매천야록』이 기록한 1864년으로부터 1910년에 이르는 반세기는 파란만장으로 복잡하고 급박한 시대였다. 이 기간의 역사적 사실·사건, 공적인 문건 그리고 단편적 일화와 해외의 지식까지 일관된 체계를 갖추지 않고 들쑥날쑥 잡다히 망라해 놓았다. 어떤 조목은 몇 장에 걸쳐 길고 어떤 조목은 단 한 줄로 그치기도 한다. 이런 모양 또한 견문을 잡기한 필기의 고유한 형식이다. 그러나 나름으로 체제가 있어서 전체로 연월일에 따라 정리하되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배경과 경과까지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예컨대 신분제도와 과거제도 등 문제를 거론함에 당해서는 체계적·심층적인 분석과 서술이 되고 있으며, 다산 정약용에 관해서는 학문과 저술을 상당한 비중을 두어 소개하고 국왕이 그의 개혁안을 국정에 수용할 뜻이 있었던 사실까지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편년체(編年體)를 기조로 하면서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를 배합한 형식이다.
『매천야록』의 비판정신은 전근대적인 ‘사’의 관점으로 왕조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존의 정통적인 가치 기준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니체는 근대를 가리켜 ‘모든 가치를 재평가하는’ 시대라고 규정한 바, 매천의 비판정신의 위치는 자명한 것이다. 그렇다 해서 그 고유의 의미마저 평가절하 할 그런 것은 아닐 터이다. 더욱 주목할 점은 주관적 관점과 객관적 사실의 상호 관련 양상이다. 즉 작가의 필봉이 객관적 사실에 부딪쳐 어떻게 써나갔느냐는 것이다. 다름 아닌 서술기법상의 문제이다.
그의 비판정신이 강경했던 만큼 필봉 또한 사실에 부딪쳐서 무뎌지거나 굽어지지를 않고 그야말로 ‘직필’을 휘둘렀음은 더 말할 나위 없다. 지존의 정상에 대해서까지 종래의 사필(史筆)처럼 휘(諱)한다든지 완곡한 표현을 쓴다든지 하는 법이 없이 사실이라면 직서하는 주의였다. 『오하기문』의 서설에서는 임금을 직접 들먹이지는 않았는데 『매천야록』을 읽어보면 나라 망친 제일의 책임은 임금 고종과 명성왕후 민씨에게 지워지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밑 빠진 독처럼 뇌물을 빨아들이고 미신에 현혹되는 등 이들의 황탄무도한 일들이 구체적 사례로 폭로되고 있는 것이다. 앞서 원용했던 명성왕후 민씨가 궁정에서 잡가 소리에 취해 감탄사를 연발했다는 일화는 그런 사례의 하나이다. 매천의 필치는 이들의 긍정적 측면도 놓치지 않고 있다. 민씨는 대단히 총명하고 영리하며, 독서를 많이 했다 하고, 그녀에게 어떤 문신이 무식하다고 창피를 당한 일화를 소개하기도 한 것이다. 이 역시 비판정신은 이미 성역을 넘어서서 사실의 전모를 파고들면서 그 인간성에까지 닿았음을 보여준다.
『매천야록』의 서술기법을 이해하기 위한 방도로 일본에 대한 필치를 들어본다. 일본이라 하면 예로부터 문화적으로 얕잡아보던 터에 현재적으로 적대감정이 고조되는 상황이었다. 매천 또한 반일의식이 강했음이 물론이다. 그런데 청일 전쟁시 평양성에서 청국군이 일본군에 패전한 사실을 기록하면서 이렇게 쓰고 있다.
이 전쟁에서 왜인은 모든 군수물자를 다 자기 나라에서 수송해 왔는데 시탄(柴炭)까지도 그러하였다. 저들은 이르는 곳마다 물을 사서 마셨고 군령이 매우 엄하여 우리 백성들은 군대가 와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서 모두들 기꺼이 그들을 위하여 향도(嚮導)가 되었던 것이다. 청인(淸人)은 음행과 약탈을 자행하고 날마다 징발하기를 일삼아 관민이 모두 곤란을 당하여 그들을 원수 보듯 하였다. 평양이 포위되었을 때 문을 열고 왜를 인도한 자도 있었고, 청군이 패하여 도망가 숨어 있으면 성내의 백성들이 그 숨은 곳을 가리켜주어 벗어날 수 있는 자가 드물었다.
‘왜’라는 칭호를 쓰고 있는 것만 보아도 일본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 지워지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럼에도 일본군의 이런저런 훌륭한 점들을 표출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요인을 밝히고 있다. 반면 중국에 대해 전통적인 우호의 정서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인 사실들을 여지없이 드러낸 것이다. 그 자신의 주관적인 의식 내지 호오(好惡)의 감정과는 엄정히 분리해서 객관적 사실은 사실대로 포착하려는 서술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매천야록』의 학술적 중요성은 이미 학계에서 인정되어, 수많은 논문에서 인용된 점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터다. 또한 번역이 수차례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동안 연구 분야에서도 당대 시대인식을 위한 단편적인 인용에 머무르기 일쑤였다. 『매천야록』 전반에 대한 학술적 연구는 거의 전무한 상태이다. 또한 번역도 발췌역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완역의 경우도 주석과 원문 교감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본 『역주 매천야록』은 민족문학사연구소 한문분과에서 10년간에 걸쳐 이루어진 결실이다. 1995년 3월부터 번역 작업을 진행했던 바, 10여 명의 참가 회원이 각기 분담하여 번역·조사한 것을 기초로 임형택 교수를 중심으로 이를 다시 검토, 수정, 보완 과정을 거쳤다. 특히 이 과정에서 역점을 둔 점은 원문 교감과 그에 따른 충실한 번역이었다. 원문의 교감 과정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한국사료총서』 제1집으로 1955년에 간행한 『매천야록』(국편본)과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의 교열을 거친 매천본가 소장본(교정본)과 대조, 검토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그리고 뒤에 다시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필사본(국편필사본)을 구해서 미진한 부분을 보완하기도 하였다. 또한 추가로 인명 등의 고유명사, 연도의 오류 및 단순오자는 기타 자료, 예컨대 『조선왕조실록』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등을 활용하여 바로 잡았다. 이 사실을 원문에서 각주로 밝혀 놓았다.
이 과정을 통해서 『매천야록』의 원문 교감이 처음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고, 그에 따른 편제와 내용이 대폭 수정, 보완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매천야록』 하면 주자료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활자본이었는데, 여기에는 단순 오자뿐만 아니라, 편제 상의 문제점이 적지 않았다. 이를 바로 잡을 수 있었던 점은 큰 수확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과정을 거쳐 만 7년 만에 1차 번역을 마쳤으며, 이후 약 3년간에 걸쳐 교정과 보완의 과정을 거쳐 이제 그 빛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매천야록』의 성립 과정에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오하기문(梧下記聞)』의 서설 부분을 부록으로 싣기도 하였다.
저자 및 번역진 소개
황현(黃玹, 1855~1910)
한말의 학자. 자는 운경(雲卿), 호는 매천(梅泉), 본관은 장수(長水). 1888년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이후 정국의 경색과 수구파 정권의 부패를 목격하고 구례로 귀향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이때 3천 여 권의 서적을 열람하며 시문과 역사·경세를 연구하는 한편, 지역의 학교 설립을 주도하는 등 계몽활동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과 국권운동을 전개하고자 중국으로 망명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1910년 국권이 상실되자 절명시(絶命詩) 4수를 남기고 아편을 먹어 자결하였다. 『매천야록』 외에 『매천집』 『매천시집』 『오하기문(梧下記聞)』 등을 남겼다.
번역진
임형택(성균관대 교수), 김상일(동국대 교수), 김수연(이화여대 박사과정 수료), 김승룡(부산대 교수), 김영진(성균관대 연구교수), 신익철(정신문화연구원 교수), 우응순(고려대 연구교수), 이지양(성균관대 강사), 이성호(성균관대 연구교수), 윤세순(성균관대 강사), 전진아(이화여대 전임연구원), 정환국(성균관대 연구교수), 한영규(성균관대 책임연구원)
매천야록 梅泉野錄 목록
서남 동양학자료총서 간행사
일러두기
권3
기해년(1899)
경자년(1900)
신축년(1901)
임인년(1902)
계묘년(1898)
권4
갑진년(1904)
을사년(1905)
권5
을사년(1905)
병오년(1906)
정미년(1907)
권6
정미년(1907)
무신년(1908)
기유년(1909)
경술년(1910)
부록 오하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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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매천야록 해제를 쓴 임형택 교수는
상권17페이지 체제상의 특징 3번째 줄에서 매천야록 마지막 부분의 절명시 4수 부분을 매천 황현의 아우인 황원이 추기한 것으로 보인다고 하셨는데, 아래의 책 소개에는 황현의 제자가 추기했다고 하셨네요?
책소개 내용은 임형택교수의 글을 거의 옮겨 적으시면서 촉각이 곤두서는 부분의 내용을 달리 적으셨으니 해명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