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한 잔의 붉은 거울』의 놀랍고 신기한, 끔찍하도록 적나라하고 처절하게 아름다운 세계는 현실의 무자비한 삭제로부터 시작한다. 상상력에 의한 부분 부분의 뒤집기, 비틀기, 비교하기가 아닌 전반적인 무(無)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는 듯하다. 그러나 현실이 없다면 언어도 없고, 이 시집도 이 시집의 세계도 없는 것. 결국 이 시집의 세계는 현실을 비추는 거울로 기능한다. 현실을 그대로 비추는 평면거울이 아닌 수많은 프리즘으로 만들어진 만화경 같은 거울. 그리하여 이 시집을 통과하는 사람이나 사물은 온전한 하나의 유기체에서 낱낱이 분해되고 뒤섞여 완전히 새로운 개체로 다시 태어난다. 이 믹서 같은 시집이 만들어낸 새로운 종의 개체는 시인의 무의식과 우리의 다채로운 감각의 표정과 감정의 저 밑바닥에서 분출하는 언어가 만들어낸 것이다. 이 개체와 사랑에 빠질 것인가, 맛볼 것인가, 바라만 볼 것인가?
[시인의 말]
얼음을 담요에 싸안고
폭염의 거리를 걷는 것처럼
그렇게 이 시간들을 떨었다.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한 줄기 차디찬 핏물이
신발을 적실 것처럼.
_2004년 5월
김혜순
▧시인의 말
제1부
붉은 장미꽃다발
끓다
그녀, 요나
얼음의 알몸
얼굴
한 잔의 붉은 거울
오래된 냉장고
칼의 입술
나비
心臟
입술
O
움켜쥔 마침표 하나
기상 특보
그녀의 음악
박쥐
봄비
그믐
저 붉은 구름
제2부
낙랑공주
1306호
유화부인
물거미의 집
새가 되려는 여자
태풍의 눈
꿈속에 꿈속에 꿈속에
백년 묵은 여우
구멍
판화에 갇힌 에우리디케
시 같은 거
BASKIN ROBBINS 31 대학로점
암탉
거미
문익점
깃발
붉은 이슬 한 방울
그녀의 지휘봉
제3부
슬픔
분수
Detective Poem
Mixer & Juicer
예술의 전당 밖의 예술의 전당
신기루
장엄 부엌
나의 판 옵티콘, 그 조감도
말씀
갈겨쓴 편지
흐느낌
캄보디아
두통
깊은 곳
티티카카
두 장의 혀
눈보라
내 꿈속의 문화 혁명
살아 있다는 것
날마다의 장례
▨해설: ‘그녀, 요나’의 붉은 상상 _이인성